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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보다 좋은 우리 '상말' (84) 족탈불급

[우리 말에 마음쓰기 839] '내 노래는 족탈불급足脫不及' 다듬기

등록|2010.01.16 16:32 수정|2010.01.16 16:32
족탈불급

.. 딱 까놓고 말해 내가 들어도 나훈아나 배호의 노래와 비교하면 내 노래는 족탈불급足脫不及, 도저히 같은 반열에 올려놓을 수준이 아니었다 ..  <이홍우-나대로 간다>(동아일보사,2007) 47쪽

"배호의 노래와 비교(比較)하면"은 "배호 노래와 견주면"이나 "배호가 부른 노래에 대면"으로 다듬습니다. '도저(到底)히'는 '도무지'로 손보고, "반열(班列)에 올려놓을"은 "자리에 올려놓을"이나 "높이에 올려놓을"로 손보며, '수준(水準)'은 '만큼'이나 '솜씨'로 손봅니다.

이런 낱말이든 저런 낱말이든 쓰는 사람 마음이 아니냐고 여기며 그냥저냥 지나치기 쉬운 낱말들인데, 한 번쯤 내가 어떠한 낱말을 어떠한 뜻으로 어느 자리에 넣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말밑이 한자로 이루어져 있든 아니든 굳이 따져야 하느냐고 여길 수 있는데, 말밑이 어떠하느냐가 아닌 이 땅에서 좀더 널리 나눌 수 있는 말과 한결 살갑거나 따사로운 느낌을 담으며 주고받으면 좋은 말은 어떠해야 할까를 헤아려 보면 좋겠습니다.

 ┌ 족탈불급(足脫不及) :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능력ㆍ역량ㆍ
 │    재질 따위가 두드러져 도저히 다른 사람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임을 비유적
 │    으로 이르는 말.
 │   - 난 손가락 하나도 태우지 못하는 겁쟁이일 뿐이야. 족탈불급이라고
 │
 ├ 내 노래는 족탈불급足脫不及
 │→ 내 노래는 형편없어
 │→ 내 노래는 초라해
 │→ 내 노래는 보잘것없어
 │→ 내 노래는 엉성해
 │→ 내 노래는 모자라
 └ …

보기글을 쓴 분은 한글로만 '족탈불급'이라 적어 놓으면 알아보지 못할까 싶어 한자를 나란히 밝혀 줍니다. 그러나, 이 한문 '족탈불급' 옆에 '足脫不及'을 적어 준다 하여도 잘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제대로 알아들을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제대로 알아듣고자 곰삭여야 하느라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오래 걸려야 하고, 이 말을 풀어내는 데에 그렇게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따로 이 한문을 알아야 알아들을 수 있으며, 이 한문을 알지 못하는 이로서는 한자를 수백 번 되읽어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글씀씀이는 끊이지 않고 나타납니다. '문자를 아는' 분들은 기꺼이 이와 같이 글을 쓰면서 '문자를 모르는' 이들 위에 올라서려고 합니다. 문자를 알기에 더 고개를 숙이면서 문자를 모르는 이들과 어깨동무하거나 손을 맞잡으려는 매무새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릴 적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동네에서나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인다'고 배웠습니다. 아니, 요즈음은 이런 옛말을 안 가르치는지 모르나, 저는 어릴 적에 이 말을 숱하게 듣고 배웠습니다. 조금이라도 알은 체를 하거나 잘난 체를 한다면 어김없이 누군가 이 말을 읊었고, 동무들 사이에서도 터져나왔습니다(동무끼리는 장난 삼아 했을 테지만). 제아무리 똑똑하거나 많이 안다 하여도, 여느 사람 앞에서 문자 자랑이나 지식 자랑을 하는 일은 부질없을 뿐더러 스스로 못났다고 알리는 꼴이라고 배웠습니다. 더 똑똑하고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쉽고 살갑게 말을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족탈불급'이라는 한문을 안다손 치더라도,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에, 섣불리 이런 말을 읊으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말이란 생각나눔이요 마음나눔이요 뜻나눔이니까요. 글이란 넋나눔이요 얼나눔이요 사랑나눔이니까요.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이며, 나란히 손을 맞잡는 길이며,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길입니다. 말과 생각과 삶은 한동아리가 되어 서로를 한껏 북돋우고 이끌어 올리는 흐름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 내 노래는 들어 주기 어려워
 ├ 내 노래는 썩 좋지 않아
 ├ 내 노래는 노래라 하기 힘들어
 ├ 내 노래는 여러모로 뒤처져
 └ …

이 보기글이라면, "내 노래는 돼지 멱따는 소리라서"라든지 "내 노래는 턱없이 새된 소리라서"처럼 적어 볼 수 있습니다. 노래를 더없이 못 부른다는 이야기이니, 말 그대로 "나는 노래를 참 못 불러서"라 적어도 잘 어울립니다.

언제나처럼 있는 그대로 적으면 되고, 늘 그렇듯 꾸밈없이 밝히면 됩니다. 수수하게 적바림하면 됩니다. 투박하게 보여주면 됩니다. 꼭 멋들어지거나 예쁘장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거나 어딘가 잘나 보일 까닭이란 없습니다. 더 튀어 보인다든지 더 빼어나 보여야 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며, 내가 어디를 바라보는가를 나타내면 됩니다. 내 마음을 살포시 건네고, 네 마음을 넌지시 받으면 됩니다.

주고받는 말이지 밀어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나누는 말이지 쏟아붓는 말이 아닙니다. 오가는 말이지 우쭐거리는 말이 아닙니다. 함께하는 말이지 내려보내는 말이 아닙니다.

 ┌ 난 겁쟁이일 뿐이야. 족탈불급이라고
 │
 │→ 난 겁쟁이일 뿐이야. 형편없다고
 │→ 난 겁쟁이일 뿐이야. 못난이라고
 │→ 난 겁쟁이일 뿐이야. 바보라고
 │→ 난 겁쟁이일 뿐이야. 허섭스레기라고
 └ …

내가 살고 네가 사는 말을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너를 높이고 나를 살찌우는 말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는 말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너를 섬기고 나를 받드는 말을 찾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하나 그윽하게 담으면 좋겠습니다. 믿음 하나 고즈넉하게 실으면 좋겠습니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더없이 믿으면서 말마디 하나 붙잡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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