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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마디 한자말 털기 (88) 통하다通

[우리 말에 마음쓰기 840] '여긴 통하지 않았다', '뜨겁게 통한 마음들' 다듬기

등록|2010.01.17 13:31 수정|2010.01.17 13:31
ㄱ. 여긴 통하지 않았다

.. 웬만하면 주소만 갖고 찾아갈 수 있는데, 여긴 통하지 않았다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삼인,2008) 100쪽

보기글을 보면 앞쪽에 '찾아갈'이 나오고, 뒤쪽에 '통하지'가 나옵니다. 두 낱말은 같은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렇지만 앞쪽을 '통할'로 적어 본다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아챌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말하거나 글쓰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해 보는데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 보기글을 쓴 분은 '막힘없이 잘하다'라는 뜻으로 '통하다'를 넣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오래도록 입에 굳고 손에 붙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톡톡 이런 말을 내뱉게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 여긴 통하지 않았다
 │
 │→ 여긴 찾을 수 없었다
 │→ 여긴 안 되었다
 │→ 여긴 꿈도 꿀 수 없었다
 │→ 여긴 너무 어려웠다
 └ …

앞과 뒤를 다른 낱말로 엮고 싶다면, 뒤쪽을 "여긴 달랐다"나 "여긴 안 그랬다"나 "여긴 사뭇 달랐다"나 "여긴 너무 힘들었다"처럼 적어 볼 수 있습니다. '찾을 수 없었음'을 가리키는 낱말을 저마다 제 생각과 느낌을 살리면서 적어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과 느낌을 담는 낱말이 '通하다'였다면, 다른 낱말은 하나도 없이 오로지 '通하다'일 뿐이라면 골치가 아픕니다. 참으로 이런 외마디 한자말이 아니고서는 제 생각과 느낌을 담아낼 수 없다면, 그지없이 까마득합니다. 스스로 알맞춤한 낱말을 찾지 못하고, 스스로 싱그러운 글월을 헤아리지 못하며, 스스로 아름다운 글매무새를 추스르지 못하면, 더없이 슬픕니다.

ㄴ. 뜨겁게 통한 마음들

.. 그야말로 절경 중 절경이다. 뜨겁게 통한 마음들만이 빚어낼 수 있는 광경 ..  《전미정-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위즈덤하우스,2009) 23쪽

"절경(絶景) 중(中) 절경이다"는 "멋진 모습 가운데 멋진 모습이다"라든지 "훌륭하면서 훌륭하다"라든지 "아름다움 가운데 아름다움이다"로 손질해 봅니다. '광경(光景)'은 '모습'으로 다듬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첫 글월은 "그야말로 아름답다"나 "그야말로 훌륭하다"나 "그야말로 멋스럽다"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라는 꾸밈말을 앞에 넣은 만큼, 바로 뒤에서는 수수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갈 때가 잘 어울립니다. 아름다운 모습이란 부풀리거나 덧보탠다고 해서 더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훌륭한 모습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말로 꾸미기 앞서, 있는 그대로 나타내면서 느낌과 뜻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뜨겁게 통한 마음들만이
 │
 │→ 뜨겁게 만난 마음들만이
 │→ 뜨겁게 이어진
 │→ 뜨겁게 맺은
 │→ 뜨겁게 손잡은
 └ …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하고 옆지기이지만, 아기는 틈틈이 잠꼬대를 하고 이리 데굴 저리 데굴 합니다. 열여덟 달을 지나고 있으니 머잖아 쉴새없이 입을 놀리면서 이것도 묻고 저것도 물으면서 알고픈 온누리를 하나하나 받아들일 테지요. 그러나 아직은 어른들과 같은 말을 함께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는 어른 스스로 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생각하고 말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서로 마음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예부터 "마음이 맞는" 동무라느니, "죽이 맞는" 사이라느니 했습니다. 이른바 '通하는' 동무나 사이라고 할 테지요. 한 마디 곱씹고 두 마디 돌아보면, 우리들이 옛날부터 익히 쓰던 말은 '맞다'이지만, 어느 결에 '通하다'라는 말마디가 슬쩍 끼어들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슬쩍 끼어들기였을 텐데, 이제는 대놓고 자리잡기입니다. 그러다가는 덮어놓고 우리 말마디 '맞다'를 쫓아냅니다. 그리고, '맞다'를 비롯해 '이어지다'와 '맺다'와 '사귀다' 같은 낱말이 밀려납니다. '맞잡다'와 '손잡다'는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 뜨겁게 어우러진 마음들만이
 ├ 뜨겁게 하나된 마음들만이
 ├ 뜨겁게 껴안는 마음들만이
 ├ 뜨겁게 부둥켜안은 마음들만이
 └ …

우리 스스로 우리 말마디를 업신여기거나 깔본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두 손으로 우리 글줄을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힌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온몸으로 우리 말삶을 일그러뜨린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우리 말마디만 업신여기거나 깔보고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우리 살가운 이웃 또한 업신여기거나 깔보고 있습니다. 우리 두 손은 우리 글줄만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와 정치와 사회와 교육 얼거리 모두 엉망진창으로 들쑤십니다. 오늘날 참다운 배움터가 어디에 있습니까. 모조리 대학입시 싸움터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온몸으로 우리 말삶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삶을 일그러뜨립니다. 사랑스러운 삶을 일그러뜨립니다. 믿음직한 삶을 일그러뜨립니다. 아름다운 삶을 일그러뜨립니다. 따사로운 삶을 일그러뜨립니다.

슬기롭고 힘차게 가꾸는 삶이나 넋이나 말이 아닙니다. 어리석게 흔들고 있는 삶이요 넋이요 말입니다. 곱고 싱그럽게 일구는 삶이나 넋이나 말이 아닙니다. 얄궂고 짓궂게 허무는 삶이요 넋이요 말입니다.

돈바라기로 치달리면서 우리가 기쁘고 반갑게 붙잡을 삶자락이 무엇인지 돌아보지 못합니다. 힘바라기로 내달리면서 우리가 즐겁고 알차게 다잡을 넋자락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름바라기로 끄달리면서 우리가 신나고 멋스레 맞잡을 말자락이 무엇인지 살펴보지 못합니다. 그예 바보가 되고, 그저 멍텅구리가 되며, 그대로 못난이가 됩니다.

 ┌ 뜨겁게 속삭이는 마음들만이
 ├ 뜨겁게 이야기하는 마음들만이
 ├ 뜨겁게 얽히는 마음들만이
 ├ 뜨겁게 얼크러지는 마음들만이
 └ …

아름다운 말 한 마디는 내 마음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말 한 마디가 우러나옵니다. 징글맞은 말 한 마디는 내 가슴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내 가슴속에서 징글맞은 말 한 마디가 툭툭 튀어나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고자 꿈꾸면서 아름다울 길이란 어디에 있느냐를 살필 때에, 아름다움을 사랑하면서 다부지게 걸어가려고 할 때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가 샘솟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움을 거스르면서 내 밥그릇 단단히 붙잡는 길로 빠져들 때에, 돈그릇 힘그릇 이름그릇만 우악스레 붙잡으려고 할 때에, 징글맞은 말 한 마디가 치솟습니다.

여느 외마디 한자말이든 通하다 같은 낱말이든, 쓰고 싶으면 쓸 일입니다. 이런 낱말을 쓰든 저런 낱말을 쓰든 쓰고자 하는 사람 마음입니다. 한자말을 쓴다고 잘못이 아니요, 한자말을 쓴다고 말썽이 생기지 않습니다. 외마디 한자말을 쓰는 일이나 通하다에 얽매이는 일 때문에 우리 말글이 어그러지지 않습니다. 이런 말투 때문에 내 마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밭과 생각밭과 삶밭을 어떤 눈매로 바라보고 어떤 손길로 쓰다듬느냐에 따라서 아름다워지거나 징글맞아집니다. 처음에는 사랑 한 자락을 담을 노릇이고, 다음으로는 사랑 한 자락을 알맞춤한 자리에 놓을 노릇이며, 마지막으로 내 사랑 한 자락을 곱게 여밀 노릇입니다. 차근차근 쓰다듬고, 하나하나 보듬으며, 한결같이 부둥켜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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