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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순간에 소비되지 않는 음악, 여기에 있다

[음반의 재발견⑬] The Near East Quartet의 'Chaosmos'

등록|2010.01.19 18:44 수정|2010.01.19 18:44

▲ 'The Near East Quartet'을 결성한 재즈 색소폰 연주자 손성제. 그가 이번에 새롭게 도전한 음악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음악 이었다. ⓒ EBS


음악은 언제나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러나 재즈 연주자 에릭 돌피(Eric Dolphy)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밝힌 "연주가 끝나면 음악은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다시 잡으려 해도 결코 잡을 수 없다"라는 명언처럼, 음악은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보는 시각에 따라 음악이란 그토록 가볍고 또한 반대로 그토록 간절한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리가 공기를 통해 사람의 귀로 들려지는 한 변치 않을 사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에릭 돌피가 이런 말을 했던 60년대의 감성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아니, 지금은 음악이 전해지는 통로, 기술 등이 다양해지면서 에릭 돌피의 저 말이 담는 음악의 의미는 재즈에서 즉흥(Improvisation)에 대한 정의 외에도 꽤 다양한 방향으로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누군가는 21세기의 음악이란 소유하는 것이 아닌 끝없이 소비되는 일종의 소비재라 말하는 시대가 오지 않았던가.

그러한 의견에 에릭 돌피의 말을 빌려 조금 비꼬듯이 말하자면 현재 대중들에게 있어 음악이란 "스트리밍 서비스가 끝나면 허공 속에서 사라지며, 핸드폰을 통해 다시 결제하지 않는 순간 즉각 멈춰버리는 소리"일 뿐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The Near East Quartet의 <Chaosmos>

▲ 'The Near East Quartet'의 [Chaosmos] ⓒ GiL/전파사

하지만 알다시피 음악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이 아니다. 특히 그 소리안에 많은 것을 품고 있는 몇몇의 위대한 음악들과 뮤지션의 이름들을 상기하면, 시대를 통해 따라오는 음악에 대한 정의와 의미는 결코 '음악'이라는 일종의 '문화'에 선행할 수 없음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재즈 색소포니스트 손성제가 정수욱(기타), 이순용(베이스), 김동원과 함께 'The Near East Quartet'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신보 <Chaosmos>는, 그러한 소비되지 않는 문화적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내거나 같이 생각하기에 매우 훌륭한 음반으로 존재한다.

물론 알다시피 2009년 <Chaosmos> 이전에 손성제의 음악은 지금과는 달리 상당히 대중적이고도 소비적인 노선을 견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 내한하는 프리재즈 연주자들과 협연을 하거나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재즈의 포스트 모더니즘적 성향에 상당한 관심을 표하기도 했지만, 음반을 통해 나오는 그의 음악적 결과물은 한마디로 상당히 '말랑'한 것들이 많았다. 상당히 앳된 외모의 표지가 인상적인 <Repertoire & Memoir>에서부터 2008년에 발매된 근작인 <Em Seu Proprio Tempo>에 이르기까지 그의 재즈는 그의 외모만큼이나 그렇게나 감성적이고 또한 부드러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독립 레이블에서 발매한 이번 음반을 듣고 있노라면, 이 음반의 연주자가 과거 같은 연주자임을 의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그야말로 완전히 다른 음악을 들려준다. 이것은 비유 따위가 아니며, 실제로 그가 이전에 발표한 음반과 이번 음반의 음악은 그야말로 완전히 판이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일종의 개척을 노래하며, 예전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연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와 에스닉 그리고 하이브리드

이 <Chaosmos>에 실린 음악들은 물론 이견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꽤 단편적으로 정의하자면 크게 두 가지의 재즈장르를 포함한다. 하나는 아방가르드, 또 하나는 에스닉이라 할 수 있겠는데, 실제로 이들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노라면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자가 가져야 할 장르의 조건을 완벽히 충족하고 있다.

과거 돈 체리(Don Cherry)를 위시하여 프리재즈 이후에 대두되었던 에스닉이란 장르가, 다른 세계의 음악이나 악기들이 단순히 차용되는 수준이 아닌 그들의 토속적 문화가 미국의 재즈를 반대로 흡수하여 연주될 때 완성되는 것이라면, 이 <Chaosmos>는 그러한 재즈의 완성에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 아울러 아방가르드적 음악적 표현력과 연주에 있어서도 흠을 찾기 어려우며, 그러한 색깔은 동명 타이틀 연주곡인 'Chaosmos' 외에도 전체적으로 매우 세련되게 도배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에 근거는 앞서 말한 장르적 특징 외에, 기본적으로 이 음반에 깔린 우리의 소리인 '국악'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김동원이 연주하는 우리의 전통타악기들, 그리고 창(唱)은 듣는 순간 이 음반의 지향점은 명확히 들려준다. 아울러 그 뒤를 받치는 일렉의 첨단 소리들과 손성제의 낮게 깔린 색소폰 역시 우리의 국악과 화학적으로 완벽한 합일을 이룬다는 기분이다. 그리고 이 순간 음악은 장르를 넘어 하나가 된다.

그 이면에는 역시 손성제의 음악적 친절함이 묻어나 있는데, 자칫 굉장히 난해할 수 있는 이 소리들을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전개 혹은 유지하며 청자가 천천히 음악에 스며들도록 유도해 주는 것이다. 그 와중에 김동원이 노래하는 창은 저 멀리서 높은 겨울 산을 넘어가는 나그네의 발길마냥 처량하고 아득하게 울리어 오고, 기타리스트 테리에 립달(Terje Rypdal)을 연상하는 정수욱의 기타는 그토록 아련하게 그 옆에서 울려 퍼진다. 특히 'Ou-hu'에서 울리는 일렉 기타와 손성제의 피아노와의 협연은 이 음반이 가지는 아방가르드 재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에도 손색이 없다. 

이러한 면면은 개인적으로 일종의 국내 재즈의 음악적 쾌거라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재작년 '제 6회 한국 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재즈 크로스오버 부문 2관왕을 수상하며 전문가들에게 극찬을 이끌어 냈던, '미연&박재천'의 <Dreams From The Ancestor>보다 한층 더 진일보한 사운드를 들려준다는 느낌마저 든다. 답습이란 편한 길 외에, 길을 만들려 하는 자의 뒷모습은 원래 이렇게 장엄해 보이는가 보다.

사라지지 않는 음악, 그리고 소비되지 않는 음악

하지만 이 음반은 시중에서 대중들에게 손 쉽게 팔리고 있지 않다. 음악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쉽게 소비됨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소량만을 제작하며 공연에서 현장판매를 하거나 특정 사이트에서만 소량으로 판매를 하고 있어, 그 외에 이들의 음악을 소유하는 방법이란 현재로선 쉽지 않다.

물론 이 이후에 이 음반이 정식 발매되고 또 대량으로 소유될 가능성도 물론 있지만, 아마도 결코 가치 없이 소비되지는 않을 음악이 이 안에는 있다. 이것은 음악이 기술의 발달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이유이며, 때로는 자본의 논리와도 선을 그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음악들은 허공 속에서, 혹은 인터넷 익스플로러나 핸드폰을 끄는 순간 사라지지 않는 소리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음악이 위대한 이유임을 이 <Chaosmos>는 증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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