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아파트 갈 생각에 잠이 안 와요"
[용산참사 1주기 ⑤] '순환형 임대주택' 첫 사례, 왕십리 1지구를 가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새 1년. 지난해 말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됐고 지난 9일 장례도 치렀지만, 서울 곳곳에 아직 '용산'이 있다. 3년째 철거사업이 진행 중인 상도동의 눈 덮인 산동네에도, 밀어붙이기식 개발에 항의하며 주민이 자살한 마포구 용강동에도, 우여곡절 끝에 이주협상을 타결해 뿔뿔이 동네를 떠나는 왕십리에도 있다. <오마이뉴스>는 참사 1주기를 맞아 수도권의 대표적인 철거 현장을 찾아보고 재개발정책의 대안도 고민해봤다. [편집자말]
▲ 왕십리 1지구 세입자 이지연씨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왕십리 1지구 세입자 이지연씨가 이삿짐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 김도균
"사람 마음이 정말 간사해요. 막상 임대아파트 입주가 결정되니까 이사하는 오늘까지 그 며칠 동안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어요. 너무 설레어서 잠이 안 왔어요. 그동안 이 집이 너무 추워서 친정집에 맡겨 놓은 아들(6)도 이젠 엄마, 아빠랑 같이 산다고 좋아하구요."
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왕십리 1동, 눈이 가득 쌓인 골목 안쪽에서 한창 이삿짐을 나르던 이지연(34·왕십리 1구역 세입자대책위원회 여성부장)씨는 설레는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지난 2002년 4월 결혼하면서 이곳에 신혼살림을 차렸던 이씨에게 지난 3년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세월이었다. 2007년 8월 왕십리 지역이 뉴타운 사업시행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소박하지만 단란했던 이씨 가족의 삶은 위협 받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조사에 의하면 전통적 서민 주거지역이었던 왕십리 뉴타운 1,2,3지구는 전체 4275가구 가운데 세입자 가구가 3620가구로 전체의 85%나 차지했다. 왕십리동이 속해 있는 성동구에서만 40개 구역이 주택정비 사업지구로 지정되는 등 재개발의 열풍은 서민들의 주거권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 왕십리 1지구 재개발 현장폐허가 된 어느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왕십리 1지구 재개발 현장. ⓒ 김도균
재개발 열풍에 전세가는 천정부지로... "갈 수 있는 데가 없었다"
서울 시내 여러 곳이 뉴타운 지구로 지정되면서 서울 시내의 전세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4000만 원 하던 전셋집이 1억 원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왕십리 뉴타운 지역에 들어설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는다 해도 입주할 때까지 거주할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재개발 지역에 살던 세입자들이 기존의 생활권을 벗어나지 않는 인근지역에서 (재개발) 공사 기간 동안 거주하다가 원래 살던 곳에 다시 정착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서울시 자료에 의하면 뉴타운 지역 세입자의 재정착률은 10% 남짓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자리와 자녀교육 때문에 삶의 근거지인 왕십리 주변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세입자들에게 두 배 이상 오른 전세가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씨는 "전세보증금에다 이주보상비 1000만 원을 합쳐도 서울 시내에서 갈 수 있는 데가 아무데도 없었다"고 말했다. 왕십리동에서 4000만 원에 방 두 개짜리 전셋집에 살던 김아무개씨는 인근 마장동에서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을 내는 단칸방을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올라버린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세입자들 중 일부는 서울을 떠나 의정부나 포천, 구리 등으로 밀려났다.
"용역업체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동네가 전쟁터가 되어갔어요. 주민들이 지나가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없이 산다는 이유로 설움을 받는다는 생각에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이지연씨)
철거 폭력을 견디다 못한 세입자들이 하나 둘 왕십리를 떠났고 빈 건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주를 거부하고 왕십리 1구역에 남은 세입자들이 사는 집 주변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화재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다. 작년 8월에는 고아무개씨 집에서 불이 나서 살림살이를 모두 태우기도 했다. 세입자들이 이곳을 빨리 떠나기를 바라는 세력의 소행으로 추정되었지만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정말 겁이 났어요. 잠시만 집을 비우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불안해서 시장 가기도 망설여졌어요. 밤에 집에 불이 나는 꿈을 몇 번이나 꿨는지 몰라요." (최아무개씨)
불안에 떨던 세입자들이 성동구청을 항의 방문해서 그나마 동네 곳곳에 CCTV가 설치된 후로는 화재가 줄어들었다.
그동안 왕십리 1구역 세입자대책위원회(아래 왕십리 1구역 세대위)는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아래 도정법) 제36조에 따른 주거 대책을 강구할 것을 줄기차게 성동구청에 요구해왔다. 이 조항은 "(재개발) 사업시행자는 재개발로 철거되는 주택의 소유자와 세입자에게 임대주택 등의 시설에 임시로 거주하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을 재개발조합은 의무조항이 아니라고 해석하고, 성동구청에서도 법 규정을 지키지 않은 재개발조합 측에 사업인가를 내줌으로써 사실상 직무유기를 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따랐다.
작년 9월 왕십리 1구역 세대위는 '성동주민회',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등과 공동으로 '성동구 임시주거시설 조례제정운동본부'를 구성했다. 도정법에 규정된 임시주거시설 입주를 가능하게 하려면 성동구의회에서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조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촉구하는 주민들의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이 서명운동에는 5천여 명이 넘는 성동구민들이 참여했다.
그러던 중 작년 11월 정부가 재개발 지역 세입자들에게 '순환형 임대주택'에 입주할 권리를 규정한 도정법 시행령을 마련하면서 왕십리 1구역 세입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시행령에 따르면 신청일 기준으로 해당 정비구역에 2년 이상 거주한 세대주 가운데 월평균 소득이 전년도 도시근로자 평균의 70% 이하인 거주자는 순환용 주택을 우선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한 것.
▲ 이삿짐 나르는 세입자15일 오후 서울 성동구 왕십리 1지구 세입자가 임대아파트 입주를 위해 이삿짐을 나르고 있다. ⓒ 김도균
"가난한 사람 집 뺏는 재개발 방식은 개선돼야"
마침내 작년 12월 23일, 왕십리 임대아파트가 완공되는 2012년 11월말까지 살 수 있는 임대아파트 입주를 보장한 협상이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왕십리 1구역 세대위에 속한 16가구가 서울시 SH공사가 관리하는 성북구 종암동의 임대아파트로 이주할 수 있게 된 것. 재개발 과정에서 세입자들이 다른 전·월셋집을 찾지 않고도 공공임대주택을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한 '순환형 임대주택 제도'가 적용된 첫 사례가 된 것이다.
이은정(43) 왕십리 1구역 세대위원장은 "잘 싸워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산참사 이후 재개발조합과 심지어는 철거용역회사까지도 최악의 선택 대신 최선의 결론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구의원들과 성동구청 역시 태도를 바꿔 재개발조합을 설득하고 화해시키려는 노력을 해주었다"고 평가한 이 위원장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시간의 유예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혜택"이라고 말했다. 또 이 위원장은 "정말 어렵고 힘든 처지의 세입자들은 싸워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2012년 왕십리뉴타운에 들어설 재개발지역 세입자용 임대아파트의 보증금은 7000만 원 선이 될 것이라는 것이 이 위원장의 설명이다. 한참 이삿짐을 나르던 이지연씨가 "위원장님, 입주할 때까지 이제 3년 동안은 죽어라 벌어서 보증금 마련해야 되니까, 이제 다른 투쟁지역 가자는 말은 마세요"라고 농담을 한다. "내가 언제 낮에 연대투쟁 가자고 했어요? 낮에 일하고 밤에 다니면 되죠." 웃으며 말을 받은 이 위원장은 "돈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을 빼앗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재개발 방식은 어떻게든 개선되어야 한다"며 "세입자들을 소외시키지 않고, 사람의 삶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재개발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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