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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6회)

죽은 자도 말한다 <3>

등록|2010.01.22 11:05 수정|2010.01.22 11:05
잠시 후 스물 안팎의 처녀가 대문을 열었다.

"주인 계신가?"
"나으리께선 마님과 몸채에 계십니다. 말씀이 길어질 듯 싶으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다른 곳에 볼 일이 있으니 그럴 필요 없다. 한데, 아씨 방은 어디냐?"

"아씨라니요?"
"아하, 내가 실언했다. 죽은 이 댁 며느리 오래비가 격쟁을 청해 한양에서 내려왔다. 허니, 세상을 떠난 그 분 방으로 안내하거라."

예전엔 풍광 좋은 곳으로 여겼음직한 별당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몇 해 동안 손질하지 않은 탓에 지붕과 벽은 색이 변해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런 데도 집안에는 '용머리에 거북' 모양의 주춧돌과 거북 모양의 맷돌이 장독대 곁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게 왠지 어색해 보였다.

삼월이가 이 집에 온 건 두 해가 조금 지나서였는데 그때도 별당은 이런 모습으로 집안사람들의 출입을 삼갔다고 묻지 않은 말을 털어놓았다.

"아씨가 목을 매단 광은 바로 저곳입니다."

삼월이가 가리킨 곳은 별당에 붙은 헛간이었다. 다섯 평 남짓으로 집안에서 쓰는 허드레 물건이 이것저것 놓여 있었는데, 며느리 윤씨가 목을 매단 대들보는 아래에서 보면 3분의 2쯤 위치에서 길게 뻗어 있었다. 다섯 자(尺) 쯤 높이로 사다리가 없으면 여인네가 끈을 걸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니 줄을 건 자린 미세하나마 두 가닥 흔적이 남아 있었다. 살아있는 자를 강제로 목매달았다면 요동 칠 건 뻔하고 줄을 건 자린 몇 군데 긁힌 흔적을 남긴다. 목의 상흔도 마찬가지다. 아래로 내려오자 송화가 묻는다.

"나으리, 상흔은···."

"둘이다. 하나면 목 매달기전 죽은 것으로 본다만 흔적이 둘이니 목을 걸고도 살아있었다. 죽을 각오로 목을 매달았다면 크게 요동칠 일은 아니다만 사대부가의 아낙이 자진할 생각이면 자신의 방에서 일을 치르지 않더냐."

송화가 '그런데요?' 하고 묻는 눈길을 보내자 정약용은 곧 윤씨의 거처로 향했다. 출입문엔 물고기 형상의 큰 자물쇠가 걸려 있어 삼월이에게 열쇠를 가져오게 한 후 정약용은 턱을 감아쥐었다. 물고기 장식은 도둑을 예방하는 의미가 있다. 물고기가 눈을 뜨고 잔다고 우리네 선현들은 믿었으므로 재물이 넉넉한 집에선 물고기 자물쇠를 채웠다. 도둑을 예방하기 위해 잠을 자지 않은 파수꾼을 물고기라 믿은 탓이다.

이곳 최 참판 댁에서는 세상을 떠난 자의 방에도 물고기 자물쇠를 채웠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물고기 자물쇠가 주는 느낌은 이상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것보다 송화는 집안에 있는 여러 형태의 물건에 흥미를 느꼈다. 맷돌을 비롯해 용머리에 거북 등의 주춧돌, 소슬 대문과 좌우행랑이 여느 집에서나 볼 수 없는 것들이고 그것들이 자리 잡은 곳이 나름대로 뜻이 있어 보였다.

"잠시 사랑채로 드시랍니다."

열쇠를 가지러 간 삼월이가 돌아와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앞서 길을 열더니 사랑채에 이르자 옆으로 물러섰다. 스물 대여섯으로 뵈는 사내가 수인사를 건넸다.

"저는 최석원(崔碩垣)이라 합니다. 혈육이 저 혼자다 보니 무척 적적합니다. 그래, 무슨 일로 나오셨습니까? 소문엔 자진한 내자의 오라비가 재조살 청구했다 들었는데 그런 이유가 무어랍니까? 최씨 일문에 한이 있기로서니 겨우 가라앉은 마음을 충돌시킬 이유가 뭐랍니까? 지금이라도 취소 시켰으면 좋을 듯 합니다만 그건 나의 바람일 뿐이고···. 어떻습니까, 내자의 자진에 의심 갈 만한 흔적이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관문 앞에서 꽹과릴 두들겨 격쟁을 신청했으니 어떻게든 마무리는 지어야겠기에 한양에서 내려왔습니다. 부인께서 자진했을 때의 검시기록과 검안(檢案)의 내용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살피는 게 제 소임입니다."

"그렇군요. 윤가가 격쟁을 청했으니 큰일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별당엔 꼭 들어가 봐야겠습니까? 내자가 죽은 뒤 망자의 물건은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날 이유가 없으니 놓아둘 이유도 없잖습니까. 허나, 그 방을 보러 오셨으니 보셔야겠지요."

최석원은 문갑에서 열쇠를 꺼내 건네며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비록 이승을 떠난 사람이나 한때는 나와 살을 맞댄 내잡니다. 이승에 남은 한이 많으면 깊은 밤 찾아온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 번도 꿈길에 보이질 않으니 미련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다 해도···, 거기 있는 것들은 내 손으로 처리하도록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삼월이가 가져온 청사초롱을 건네받은 송화가 앞장 서 별당으로 들어갔다. 윤씨가 기거했던 이곳은 세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두 방은 미닫이 하나로 이어지고 중간 툇마루를 지나면 뒤쪽에 다른 방이 있었다. 며느리가 부정을 저질렀을 것으로 생각되는 방으로 자그마한 봉창문(封窓門)이 있었다.

각 방엔 특별한 물건이 눈에 띠지 않았다. 세 해나 경과된 데다 부정한 여인으로 소문나 잡다한 물건은 태워버렸고 보니 방에는 이불 한 채와 헌 문갑, 낡은 서안과 호롱불 등잔, 그리고 거의 타버린 황촉의 촛대가 놓여 있었다. 건넌방에는 반쯤 자수를 놓은 거북이와 학의 모양이 드러나 있었고 거울을 비롯해 빗과 비녀 등이 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상한데?'

정약용이 찾는 건 윤씨가 죽기 전 구했다는 하수오(何首烏)였다. 목을 매 죽을 사람이 자양·강장에 필요한 약재를 구한다는 게 납득될 리 없었다. 체력이 떨어지고 기가 허한 여인일수록 남몰래 자양·강장에 힘을 기울인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다고 자진을 생각한 여인이 그런 약재를 구한 건 어떤 이율까? 대충 물건을 살피고 용인 관아에 돌아왔을 때 엉뚱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하루 전에 제중의원 오의원이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아직 현장에 나가 검시기록을 작성치 않았지만 깊은 원한에 의해 살해된 게 분명하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살해 현장은 외부인 출입을 통제시켰으니 지금 가도 늦진 않았네. 최씨 일문은 어떻든가, 이상한 흔적이 있던가?"

정약용은 자리에서 일어나 채근했다.

"송화야, 제중의원부터 가봐야질 않느냐."

나가려다 말고 정약용은 돌아섰다.

"최씨 집안 며느리가 광에서 목을 매단 건 꺼림직하네. 대들보에 목을 매단 흔적이나 목의 상흔을 기록한 검시기록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굳이 목맬 곳을 찾는다면 광이 아니라 윤씨가 머문 뒷방이어야 해. 그런데도 캄캄한 밤에 굳이 광을 찾아가 목 매단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야···, 어찌됐건 조사해보면 그 이유는 드러날 게야. 제중의원에 안내할 항인은 어딨는가?"

관아에서 일을 하는 서리배 하나가 튀어 나왔다. 나이는 마흔 어림으로 체격이 단단해 뵈는 사내였다. 길을 가면서 물었다.

"오의원은 어떤 잔가? 약방을 경영하니 의원일 터이고 그러다보면 이곳에선 방귀께나 뀌고 다녔을 것인데?"

"그렇습지요. 용하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침술에 일가견이 있었습니다만 병자를 한 번 보고 내린 처방이 백발백중이라 신망도 단단했지요. 최 참판 댁 며느리도 오의원 신세를 졌지요. 이런 말을 하긴 뭣합니다만 그 최 참판 댁 며느리와 정분난 게 오의원이란 소문이 한동안 떠돌았어요. 어둑새벽 그 댁에서 나온 걸 본 사람이 여럿 있었으니까요."
"오의원은 어떤 사람인가?"

"평판이 그리 나쁜 건 아닙니다. 떠도는 소문엔 용인으로 오기 전 천안 어디에서 약재상을 운영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관대작들을 상대해 큰돈을 벌었는데 처방을 잘못해 사람이 죽은 탓에 이곳에 빈손으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만···. 확실한 건 모릅니다요."
"가족들은 있는가?"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 혼잡니다."
"혼자라?"

"이런 저런 사고가 일어나 혼기를 놓쳤다고 했습니다. 기방출입이 잦고, 저의 현감님과도 몇 차례 술을 마셨을 겁니다. 붙임성이 워낙 좋고 성격이 호방해 재물 모으는 데 급급하지 않았습니다."
"현감을 모시고 따라다녔다면 자네에게 쓸만한 처방전 하나 좋겠구먼."

"그렇긴 했습니다만 약재가 워낙 비싸 그림의 떡이지요."
"처방전 이름은 뭔가?"
"오석산(五石散)이었습지요."
"오석산이라···. 내 있는 동안 생각나는 게 있으면 주저 말고 말해 주게."
"그러믄입쇼 나으리."

큰 길에서 들어가 잠시 좁은 길을 타고 오르자 환히 불을 밝힌 대문이 나타났다. 웅성대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얘길 나누는 게 분명했다. 일행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좌우로 갈라져 길을 연 채 저희끼리 귓속말을 나누었다. 용인 관아의 서리배 하나가 정약용을 방으로 안내했다. 오의원은 서안 위에 거꾸러져 있었다.

즉시 검시기록이 작성되었다. 송화가 검안하는 동안 정약용은 주검이 놓인 방안 정경을 그려 넣었다. 혼자 몸이다 보니 굳이 시친(屍親)을 찾을 번거로움은 없었다. 주검(屍)을 눕히고 옷가지를 벗긴 후 준비해간 감초즙으로 구석구석을 닦고 타박상 흔적이 있는 곳엔 파의 흰 뿌리를 짓찧어 넓게 펴 바르고 초에 담근 종이를 그 위에 덮었다.

상흔은 곳곳에 나타났으나 그것들이 오의원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곤 뵈지 않았다. 왼쪽 가슴에 사선(斜線)으로 깊이 팬 흔적은 칼로 찌른 게 분명했다. 서리배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 한 것관 달리 정약용은 그걸 사인으로 보지 않았다. 오의원의 몸에 난 자상(刺傷)은 죽은 후에 찌른 백색(白色)이었다.

'원한 때문인가?'

시신을 용인 관아로 옮기게 하고 방안을 뒤적였다. 특이하게 중국에서 건너온 향초(香燭)가 문갑에서 여러 게 발견됐다. 기린과 거북, 학과 소나무 같은 십장생(十長生) 문양을 표면에 새겨 넣은 그것들은 꽤 값이 나갈 것으로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사향을 넣은 향낭(香囊)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반지(環), 나비 문양의 심상치 않은 물건도 있었다. 물목을 적고 그것들을 꾸려  관아로 가져와 오 현감과 자리를 같이했다.

"오의원에게서 나온 것들은 범상치 않은 물건이네. 송화를 천안으로 보내 오의원이 그곳에서 어떤 일에 종사했는질 알아오게 했네. 관속과 서리배를 삼화루(三華樓)에 보내 근자에 오의원 행적이 어떠했는지도 조사시켰네. 한 가지 오현감에게 묻고 싶은 건 자네가 그 자와 만난 이유가 뭔가?"

"개인적인 일이네. 청탁 없는 술자리니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지방 관아의 관장으로 관내 유지와 만나는 건 당연한 일이오. 의원인 바에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정약용이 빙그레 미소 머금는 걸 보며 오경하는 무릎을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자신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내 살인사건에 대한 검안을 할 때 누구보다 의심이 갔던 게 오의원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정황이 깨끗했고 최 참판 댁 며느리 윤씨가 목을 매달 때 그는 삼화루에서 마신 술에 곯아떨어졌었다. 아무리 긁고 털어봐야 먼지 한톨 묻어나지 않자 몇 번의 술자리로 실낱같은 증거를 찾다가 이젠 접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술이란 게 그래. 아무리 없는 놈도 그걸 마시면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오거든. 해서 안 될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게 술이지. 그래서 오의원과 어울렸네. 그 자가 부지중에 무슨 말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네. 죽기 얼마 전 그런 말을 하더구만. 자신이 빈한할 때엔 주위엔 아무도 없더니 재물이 생기니 모든 사람이 의심스럽다는 게야. 어느 쪽을 봐도 믿음이 가지 않으나 믿는 건 황촉불에 너울거리는 제 그림자라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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