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트>(서하진 지음)겉그림 ⓒ 문학동네
"모든 사람들, 서른일곱이 되기까지 알고 지낸 그 모든 사람들은 내가 남편과 아이가 있는 나라로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다."
말하자니 갑갑하고 침묵하자니 더 답답하기만 한 '나'는 초청장의 유효기한인 마지막 며칠을 그렇게 보내고 있다. 결국은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저만치 밀쳐놓고서.
<요트>(문학동네 펴냄, 2006)는 남편과 아내, 아이로 이루어진 그 흔한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이 요동치는 떨리는 갈등들을 담고 있다. 이 소설집의 이름이기도 한 첫 이야기의 제목 역시 '요트'이다. 새집을 얻게 된 아내의 꿈과 요트를 사고픈 남편의 희망과 아직은 어느 것도 자리 잡히지 않은 아이의 미래가 뒤섞인 '요트'를 시작으로 모두 여섯 가지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 <요트>. 책 속 여기 저기서 불쑥불쑥 터져나오는 가족 구성원 각자의 꿈과 현실은 끈끈해야 할 가족애 사이를 굳이 비집고 들어와서는 정작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제각기 헤맨다.
가족과 남편, 가족과 아내, 가족과 아들, 가족과 딸, 여하튼 가족. 서하진 소설집 <요트>는 망망대해 푸른 하늘과 드넓은 바다를 마음껏 품에 안고픈 가족 각자의 꿈들이 서로 부딪치며 선뜻 자리를 잡지 못한다. 그중에서 제일 흔들리며 자리를 잡지 못하는 이는 여자 혹은 아내 아니면 엄마이다.
두 번째 이야기는 '비망록(備忘錄), 비망록(悲忘錄)'.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멀쩡하게 잘만 살던 한 남자가 우연히 눈에 밟힌 한 여자를 따라, 평생 함께 한 아내와 이제 막 성인이 된 아들을 두고 훌쩍 떠난다.
우수에 찬 눈을 가진,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혼자 남은 한 여인이 남자가 아내를 떠난 유일한 이유였다. 남자와 그 여자 사이엔 아이도 생겼다. 아내는 되돌릴 수 없는 병을 안고 아들을 남긴 채 '홀로' 죽는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 해 주는 단서가 되는 아버지가 남긴 비망록을 아들이 읽어가는 틈 사이로 슬프고도 당황스런 비밀들이 현실과 뒤섞여 다닌다.
'농담'에서는 이름이 있어도 이름의 가치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제 꿈을 오래도록 접고 살아온 한 아내가 남편과 실랑이를 벌인다. "희정씨, 민정씨, 아니 희연씨" 등으로 아무렇게나 불리는 늘 똑같은 일들을 벗어나 다시 공부도 하고 새 삶을 살고픈 아내의 꿈은 남편의 뚱한 반응 속에서 갈 길을 잃는다. 그리고 '꿈'은 아들을 영원히 떠나보내고 거의 정신을 놓다시피 살아가는 엄마와 자기 등록금을 내주고 자원입대했던 오빠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채 '아들 잃은'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껴안고 사는 딸이 등장하여 남자의 부재와 여자의 상실에 대해 말한다.
'퍼즐'에선 웬만큼 사는 집안의 아들이며 별 일 없이 직장 잘 다니던 남편이 꿈을 실현하겠노라고 갑자기 사표를 던지면서 갑작스레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 아내가 등장한다. 아내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옛 남자친구에게 사기를 당하여 큰돈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은 채 부부의 바뀐 일상을 펼쳐간다. 이루고픈 꿈과 살아야 할 현실이 부딪치는 상황 속에서 아내의 속앓이는 남편을 '부재중'으로 만든다. 이야기는 퍼즐맞추기가 되버린다.
"너는 모르겠지만 너는 너를 가두고 있어. 가벼운 이야기들이었지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늘 그런 느낌이 들었어. 너를 가두는 게 뭔지 너는 몰라. 나도 알지 못하지. 그렇지만 느껴져. 너는, 그걸 인정해야 해. 언제나 생각을 한다고? 그게 어쩌면 네 문제일지도 몰라."(252쪽)
"이제 하루가 지나고 내게는 다시 이틀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이 다하고 나면 나는 어디에 있게 될 것인지. 이 땅을 영영 떠난다면, 바다와 하늘과 가없는 너른 들판을 바라보면서 허위허위 살아온 내 서른일곱 해를 잊을 수 있을까. 내 남루한 날들을 나는 정말 버릴 수 있을까. 나를 가두는 것,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255쪽)
'시간이 흘러도'는 아내의 고민이며 엄마의 고민이기도 한 어려운 결정을 놓고 갈등하는 또 한 여자의 애타는 마음이 담겨 있다. 자기 꿈, 생각, 의지 모든 것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가둬두는 건 정말 자신일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헤매고만 있다. 돈이 되기는커녕 힘만 들었어도 잘 견뎌낸 공부방 운영도 이제는 안녕이라는 듯 모든 걸 다 놓고 "나는 이제 지쳤어"라고 남편이 말했을 때도 아내는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야 아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남편이 정말 모든 걸 다 놓고 초청이민 기회를 기회로 여기며 훌쩍 먼저 떠나버렸을 때 아내는 그제서야 자기 마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내도 엄마도 아닌 한 여자의 위치에서 시인이기도 한 '나'는 비로소 '나'를 바라본다.
<요트>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꿈과 현실들이 어긋나는 다양한 상황들을 담고 있다. 크게 보면 남자의 꿈과 아내의 현실이 서로 어긋나고 또 부딪치기도 하는 이야기들이 <요트>를 채우고 있다. 갈등이 생기기 전에는 선뜻 알아채기 어려웠던, '여자'를 감싼 고리를 풀어내려는 '나'의 요동치는 움직임들이 <요트>에선 여러 이야기로 그려져 있다. 요트 구입에 몰두하는 '남자' 옆에선 '여자'의 현실이 쉬어야 할 '요트'가 숨어 있다. 여자의 '요트'는 선뜻 나타나지도 않고 나타난다 한들 쉽게 잡히지도 않는다.
<요트>는 남자의 이름이 꿈을 찾아 헤매고 여자의 현실이 가족을 어렵사리 감싸 안고 있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정작 요트가 필요한 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일 것 같다. 가족 모두를 태울 요트는 지금 <요트> 어딘가에서 여전히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서평은 제 블로그(blog.paran.com/mindlemin)에도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