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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모이 주러 나간 루디씨가 총에 맞았습니다

[현지르포⑤ 필리핀 빈민촌 '다마얀'] 주민조직 대표의 비극적인 죽음

등록|2010.01.25 15:53 수정|2010.01.26 13:58
처음 다마얀에 들어갈 때,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빈민촌 생활을 통해 담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낙다마얀(Nagdamayan : 다마얀 주민조직) 대표 '루디' 씨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그 목표는 성공 아닌 성공을 거두고야 만다.

그는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자본주의 탐욕의 끝은 어디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2010년 1월 15일 밤,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총에 맞아 세상과 작별하게 됐다.

다마얀 이야기를 풀어낸 것으로 오마이뉴스 대학생 기자상을 받았다고 연락을 하자마자 메트로 마닐라로 달려와 술잔을 함께 기울이던 루디씨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처음 만났을 때 가족들이 못내 걸려 필리핀 사회를 바꿔내는 혁명에 더 열정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음을 자책하는 그의 따뜻한 눈물이 아직도 눈에 밟히는데, 나는 결국 그를 쓸쓸한 주검으로 다시 만나고야 말았다.

그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 살아 생전 루디씨의 모습. 그는 57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 고두환




누구보다도 치열했던 루디씨의 삶

필리핀에서 가장 못 사는 지역 중 하나인 '네그로스 옥시덴탈'이 고향인 루디씨.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 이상의 희망을 품을 수 없던 루디씨는 자식들만큼은 확실히 공부 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평범한 시골사람에서 도시빈민이 되길 자처한다. 제대로 살 공간조차 없고, 매일매일 무시당하기 일쑤인 도시빈민이 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일자리를 구하기 쉽다는 것, 어쨌든 일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생활 역시 오래가진 않았다. 시골보다야 낫다지만, 여러 가족들을 보살피기에 도시빈민의 일당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었다. 독한 맘을 먹고 그는 해외이주노동의 길을 나선다. 사우디로 일본으로, 자동차 공장 기술자로 일한 그는 자식들을 대학공부까지 시키고 가족들을 잘 돌볼 수 있었다. 1970년대 광부와 간호사로 떠나던 한국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키면 될 것이라고 말하던 루디씨. 이런 그의 삶의 궤적은 50여년 가까운 식민지 이후 토지개혁에 실패하면서 기층 민중이 어디에서도 적을 두지 못하고 부유하는 모습을 그대로 닮아있다.

이런 루디씨는 왜 다마얀의 주민조직을 만들고, 그들을 대변하기 시작했을까?

"필리핀에서 일을 할 때,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활동을 했었어요. 독재(1965년~1986년까지 집권한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 전 대통령을 일컬음)도 타도하고 싶었고,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면 아내와 아이들이 주린 배를 잡고 덩그라니 앉아 있더라구요. 그런 가족들을 난 외면할 수 없었어요."

그 때의 죄의식 아닌 죄의식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장례식장에서 만난 큰 아들 봉씨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아버지는 많이 배우지 못했고, 해외 이주노동 일을 할 때도 아주 낮은 자리에서 일하며 고생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본인도 힘드셨을 텐데, 항상 가족들에겐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 걱정하지 말라'고 언제 웃으며 말하시던 그런 분입니다. 그래서 주민조직 일을 하신다고 할 때도 가족들은 아버지를 언제나 지지했었습니다."

닭 모이 주러 나간 루디, 총에 맞다

▲ 루디씨 장례식장을 떠날 줄 모르는 다마얀 사람들. ⓒ 고두환


2010년 1월 15일 밤, 닭에게 모이를 주러 가겠다며 나선 루디씨의 잔상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온 동네를 뒤흔든 총소리가 울려퍼졌다.

"총을 맞고 숨을 거두기 전까지 내게 말을 한 마디도 못했어요. 너무 늦은 시간, 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모두가 그가 눈을 감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죠…."

그의 아내는 장례식에 찾아간 나를 붙잡고 유언조차 할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을 회고했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촉촉히 젖어 있었다.

이 비극의 시작은 다마얀 주변 지역을 둘러싼 땅분쟁에서부터 시작된다. 리잘-따이따이 시(다마얀을 관할하는 시)에서 공유지인지 사유지인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지역에 집을 짓고 살아가던 도시빈민들과 이 지역을 자신의 땅이라 주장하는 지주 '에스티바네즈' 간 충돌이 잦았다. 지주는 윽박 지르기도 하고, 협박을 하기도 했으나 시는 주민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인 편이었다. 또 소유권 문제가 명확하지 않았기에 지주는 함부로 행동하진 못했었다.

하지만 이 지역 상황은 지주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엉뚱하게 전개됐다. 다마얀 홍수피해 주민조직(Damanyan Floodway Homeowners Association) 대표 벨리아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주가 장총으로 무장한 사설 경비를 고용하여 땅 분쟁 지역에 풀어놓더라고요. 60여 가구 주민들이 집을 짓고 살던 그 지역에 와서 경비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루디씨는 경비들과 자주 언쟁을 하기 시작했어요. 때때로 경비들은 총으로 루디씨를 위협하곤 했죠. 그럴 수록 루디씨는 이 땅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해당 지역에 키우는 닭 모이를 주러 나갔던 루디씨는 사설 경비가 쏜 총에 맞았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위축시킵니다. 루디씨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자, 그 곳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듯 그 곳으로부터 나왔고 지주에 대해선 우리 가족들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겁을 먹어버린 거죠."

루디씨의 큰 아들 봉씨는 그렇게 씁쓸하게 말을 맺었다.

자본주의의 탐욕 앞에 억울한 건 빈민들뿐

▲ 루디씨 앞에서 조문하는 사람들. ⓒ 고두환

정황상, 이번 살인 사건은 누가 봐도 지주가 관계돼 있을 법하지만 그 지주는 경찰의 조사조차 받지 않고 있다.

분쟁 중인 지역이 분명히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며 "내 땅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조치 중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잘라 말한 지주의 항변. 하지만 그가 고용한 사설 경비회사는 법적으로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다.

살인에 가담한 사설 경비 중 2명은 감옥에 있고, 2명은 도망갔으나 현재 감옥에 있는 경비들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를 죽인 경비들을 보고 싶고, 지주를 고소해 이 일을 사회 전체에 알려서 또다른 비극적인 죽음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너무 위험해요.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해서 성공한 적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경비들은 분명 개인의 사유지 보호를 하는 도중 그 권리보호를 위한 정당방위라 말할 거고, 지주는 그들의 행동과 자신은 관계없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냥 죽은 것이 되겠지요."

지금 두바이에서 해외이주노동을 하는 루디씨의 또 다른 아들들은 회사에서 허락해 주지 않아 비참하게 죽은 아버지의 장례식에조차 오지 못했다. 동네에는 지주가 다음 선거에 나오기 위해 그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루디씨를 죽였다느니, 다음 선거에서 지주의 영향력이 무서워 시장과 경찰이 지주를 함부로 조사하지 못한다느니 흉흉한 소문들이 돌고 있다.

분쟁중인 지역은 언제나 힘 있거나 돈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면 취하게 되고, 그 후 개인의 사유재산은 사람의 목숨보다 우선된다. 우린 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취하며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 정의는 과연 루디씨를 위해 있을까? ⓒ 고두환


메트로 마닐라 개발공사의 철거 계획이 일부 발표된 날, 어디쯤에서 만난 루디씨는 내게 이런 말을 건넸었다.

"힘 없고, 돈 없다고 무시하지 마라. 그들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도 사람이다."

내 어깨를 잡아끌며 호탕하게 웃던 루디씨, 정의는 과연 그의 편에 있을까.

다마얀' 마을은 어떤 곳?
다마얀(Damayan)은 필리핀 최대 호수인 라구나 호수 근처에 4500여 가구가 모여사는 마을이다. 다마얀은 호수 및 도시와 가까운 탓에 직업을 구하기 쉽고 먹을 것이 풍족했던 곳이었다. 그러던 다마얀은 지난 십수년간 가뭄과 홍수를 번갈아가면서 겪었고 개발과 환경오염의 폐해를 몸소 겪으면서 도시빈민지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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