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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유와 다이옥신을 함께 들이켰네

[나가사키에서 온 편지③] 일본 최대 식품공해 사건 '카네미유 사건'

등록|2010.01.28 20:14 수정|2019.06.13 10:31

▲ 카네미유증 피해자의 구체를 요구하는 나가사키 대집회(1월 24일) 현장에 전시된 피해자들의 질환 관련 사진 자료. ⓒ 전은옥




콩기름, 참기름, 올리브유, 포도씨유, 해바라기유, 야자유, 카놀라유….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르는 음식 중 기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음식은 얼마나 될까? 한국인이 즐겨먹는 비빔밥, 김밥, 녹색 나물류에는 대체로 참기름이 들어가야 제 맛이다. 튀김, 달걀 프라이, 부침개를 비롯하여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이나 소시지, 고로케, 돈가스 등을 만들 때도 기름은 필요하다. 그리고 요리하기 귀찮은 싱글들도 간단히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으려면 기름을 사용해야 한다.


카레나 자장을 만들 때도 야채를 볶는 과정에서 기름이 필요하고 건강을 위해 샐러드를 먹을 때도 소스에 기름이 들어간다. 한국인은 최근 식생활의 급격한 서구화가 진행되고 있으나 타 문화권에 비하면 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채소와 된장을 즐겨 먹는다. 하지만 굳이 볶음이나 튀김 요리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식생활에서 기름은 날마다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나와 내 가족이 날마다 먹어온 식용유 때문에, 손발이 마비되고 손톱이 갈라지고 피부에 괴이한 두드러기가 발생하고, 구토와 복통, 빈혈에 이어 심지어는 눈, 코, 입과 얼굴, 심장과 가슴, 자궁과 신장 계통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심각한 질병이 내 몸을 잠식해 들어간다면?



식용유 안에 다이옥신이...




 

▲ 카네미 식용유 피해자의 손톱. 피해자들 사이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였다. ⓒ




1968년 10월, 나가사키와 후쿠오카 등 서일본 지역 일대에서 전대미문의 식품공해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카네미유 증(カネミ油症) 사건'. 후쿠오카현 키타큐슈에 소재한 카네미 창고 주식회사가 제조, 판매한 식용유 '카네미 라이스 오일'(쌀겨기름)을 먹은 사람들이 종기, 복통, 구토, 하반신 통증, 피로감 등에 시달렸으며, 급성 간 장해로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사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동일 식용유를 섭취한 임산부들에게서 이른바 '쿠로이 아카짱(피부가 매우 검은 아기)'들이 태어났다.





사건의 원인은 카네미 창고가 쌀겨 기름에서 발생하는 특유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탈취공정에서 PCB, PCDF 등의 다이옥신류(카네카 사 제조) 물질을 열 매체로서 사용했고, 이 다이옥신이 식용유 안에 섞여 들어간 것이다. PCB는 염소와 벤젠의 화합물로서, 화학적으로 안정되고 절연성이 뛰어나 절연유, 열매체, 가소제 따위로 널리 쓰였으나 강한 독성과 오염 때문에 생산이 금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에게는 다이옥신이라는 낱말이 더 익숙한데, 다이옥신은 독성이 엄청나게 강한 유기 화합물로서 일반인에게도 암을 유발하고 기형아 출산의 가능성이 있는 물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현지에서 사용한 고엽제에도 이 물질이 들어가 있었고, 고엽제는 베트남 현지 주민과 참전 군인 및 그 자녀 세대의 건강 피해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어 왔다.



사건 발생 당초 보건소에 신고접수한 피해자가 약 1만4000명이었다. 피해자들은 인류가 먹어서는 안 될 이 엄청난 물질을 아무 것도 모른채 날마다 튀김이나 볶음 요리 등에 사용해 가족과 함께 먹었던 것이다. 사건 직후에는 많은 피해자들의 얼굴과 전신에 피부질환이 나타났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사건이 보도되면서 '카네미유 증=피부증상'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카네미 식용유를 먹은 사람들의 고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모두들 시간이 경과하면 피해도 줄어들고 점차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다.



예상은 빗나갔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피해자들의 피부질환은 점차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강피해가 발생했다. 피부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내과, 정신과 등 피해자들의 전신을 다종다양한 고위험군 질병이 습격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병 때문에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없거나 일상생활에 심대한 초래가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미나마타병 연구자로서도 유명한 구마모토 대학의 하라다 마사즈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카네미 쌀 기름을 먹은 피해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질병은 상상을 초월한다. 피부계 질환뿐 아니라, 갑상선·폐·전립선·위·대장·난소 종양과 유방암·폐암·자궁암, 자궁근종·자궁 내막증·난소 물혹과 월경불순·유산, 전립선 비대와 무정자증, 천식과 폐렴, 간기능 장해, 담낭염과 담석, 뇌경색, 신부전증, 협심증, 당뇨, 현기증, 이명, 빈혈, 다혈증, 고혈압, 저혈압, 사지와 관절·허리의 통증, 골절과 뼈의 변형, 탈모, 치아 이상, 녹내장, 팔다리 마비, 우울증과 두통, 안면 신경마비와 다발신경염, 신경쇠약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온갖 질병이 전부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하라다 교수는 "질병의 백화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이 표현은 지금은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특히, 많은 카네미유 피해자들이 한 사람의 몸 속에 한 두가지의 증상이 아니라, 갖가지 질병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육체적, 정신적 건강 피해의 현상은 1세대에 그치지 않고, 그 자녀 세대인 2~3세대에게서도 상당수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진행형인 카네미유증 피해자의 고통




 

▲ 카네미유 피해자로부터 태어난 아기들 중에는 '쿠로이 아카짱'이라 불리는 유난히 피부가 검은 아기들이 많았다. 유치원이나 학교에 들어가면 급우들로부터의 이지메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




지난 24일, 나가사키시 원폭자료관 홀에서 만난  슈쿠와 토시코(宿輪敏子, 48) 카네미유 증 고토시 모임 사무국장도 그러한 아픔을 갖고 있었다. 이날 원폭자료관에서는 카네미유증 피해자 구제를 위한 법률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42년이란 세월이 흐른 사건이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치료법도 미궁속이고 피해자 구제를 위한 지원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 약 40인을 비롯하여 나가사키, 후쿠오카, 도쿄 등 각지에서 모여든 관계자와 시민운동가, 연구자와 일반 시민, 국회의원 등 200명 가량이 참석한 가슴 뜨거운 현장이었다. 주최측의 말에 따르면 "카네미유 관련 집회로서는 이렇게 큰 집회는 이십 수년 만"이라고 한다.



슈쿠와씨는 화려하진 않았으나 우아했으며 청초한 미인이었다. 1968년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녀는 부종, 발열, 두통 및 가만히 있어도 비탈길을 장시간 오르고 있는 듯한 전신피로감에 괴로워 했다. 가족 전부가 같은 증상을 앓았다고 한다. 어른들은 곧 나을 거라며 어린 슈쿠와씨를 위로했지만 증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성인이 된 후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여전한 병마와의 싸움 때문에 6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슈쿠와씨는 자녀에게만큼은 병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자신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오랜 세월 카네미유 증과 다이옥신 피해자의 인권을 위한 싸움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이 안고 있는 아픔에 비해 매우 강인하고 당찬 모습이었으나,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엄마, 나 오래 살 수 있을까?"라는 말을 아이의 입에서 들어야 했던 엄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날 집회에는 작년 일본의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이뤄낸 총선으로 나가사키현 2구에 출마해 당선된 후쿠다 에리코(福田衣里子) 중의원(29)도 참석했다. 후쿠다 의원은 출생시 병원에서 투여받은 혈액제제 크리스마신(Christmassin)에 의해 C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후, 병원행정 및 약해(藥害) 피해와 맞서 싸워온 인물이다. 그녀는 약해 피해자와 식품 공해 피해자가 겪는 아픔에는 공통점이 있다며,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80년생이기 때문에 카네미유 사건 이후 태생이다. 하지만 나도 병으로 인한 차별과 괴롭힘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나는 잘못된 약물 투여로 인한 피해자다. 전신이 가렵고 두통과 열, 수많은 고통이 있었다. 누워 있는 것만으로 20대의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처음에는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 하는 분노로서 살아왔다. 그러나 약해 피해자도 카네미유 증 피해자도 결국 개인적인 질병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카네미유 증 피해자 분들의 아픔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41년여 동안 강제되어 온 여러분의 싸움이 이제는 끝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고 싶다."



사건 발생 2년 후, 카네미 식용유 피해자들은 오염 식용유를 제조한 카네미 창고와 PCB제조의 메카였던 카네카, 그리고 식품안전에 태만했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재판을 제기하였다. 1987년까지 지속된 재판을 통하여 회사 측이 손해배상 의무를 지게 되었으나, 대기업이 아닌 소규모 회사에 배상금을 충분히 지급할 자금력은 없었고, 원고(1290명, 전체 피해자 중 일부에 불과)에 대한 일부 배상금 지급과 의료비 일부 지원은 있었으나 피해자 수와 피해 규모에 비하면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 카네미 식용유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한 집회 홍보 전단. 일요일인 24일 열린 나가사키 집회에는 전국에서 약 200여 명의 참석자가 운집했다. ⓒ 전은옥




그마저도 재판이 승소에서 사실상의 패소 혹은 강제적인 '화해'처리화 되어, 첫번째 재판에서는 국가와 기업측의 책임을 인정해 가불금을 집행했던 것을 최고 재판소에서 뒤집어 피해자에게 국가로부터 받은 가불금을 반환하라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10년만에 간신히 해결되었으나, 아픈 이들의 고난이 얼마나 컸을까를 짐작하게 한다.



수많은 피해자가 많게는 며칠에 한 번, 보통은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은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야 할 만큼, 병원에 입원하고 통원 치료를 하는 것이 아예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행정이나 기업이 충분히 의료비와 생활 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픈 몸으로도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세월의 흐름만큼 그 사이 세상을 떠난 이도 있었다.



국가에서는 68년 당시부터 '전국 식용유 질병 연구반'을 규슈대학에 설치해 보조금을 내고, 진단과 치료에 관한 연구를 실시했으나, 당사자인 피해자에 대해서는 의료비 지급이나 건강관리수당의 지급 등의 구제지원은 하지 않았다. 카네미유 증 피해자에 대한 후생성의 주장은 "국가에는 책임이 없다. 식중독 사건이기 때문에 원인 기업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며, "피해자의 병증도 경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간신히 사건 발생 40년 만인 2008년, 국가에 의해 카네미유증으로 '인정받은' 생존 환자를 대상으로 최초 건강실태조사를 실시했으나 여기에도 문제는 남았다.



카네미 유증으로 '인정'받은 환자는 피해자 신고 약 1만4000명 중 1927명(전국)에 불과했다. 1할에 해당하는 수치다. 나가사키 현에서는, 고토시(五島市)를 중심으로 피해자가 다발했으나 지금까지 '인정 피해자'의 수는 779명에 지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독성물질이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식용유를 믿고 구입하여, 날마다 식탁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요리를 해서 먹었고,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식탁에서 같은 식용유를 먹고 같은 질병에 시달려온 가족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법적으로 '인정'받고,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은 '인정받지 못하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이는 행정이 만들어낸 인정기준 제도 자체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를 위협하는 인간, 그리고 재난



일본 역사상 최대의 식품공해 사건이자, 기업범죄와 국가책임 유기, 그리고 인권 유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카네미유 증 사건'. 기업이 처음부터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죽일 의도가 없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유독 물질을 제조하고 그것을 판매하며, 사람이 먹는 음식을 제조 공정하는 과정에서 유독물질을 사용하였고, 공정 과정에서 식품에 유독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한 안전관리를 하지 않은 점 등 기업이 일으키는 수많은 문제와 더불어, 사건 발생 후 신속하게 대처하여 빠른 시일내에 이 식용유의 위험성을 공표하여 피해자 발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빠르게 대처하지 않은 국가의 잘못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피해자를 낳았다.



실제로 사건이 발생한 10월 이전인 동년 2월에 이미 동회사가 제조한 쌀겨기름을 사용해 만든 동물사료를 먹고 닭이 대량 폐사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추청지 190~210만 마리였다. 사람들은 사람이 먹는 식용유는 괜찮을까 불안해 했으나 정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카네미 창고의 식용유 전체를 검사하거나 회수하거나, 시민들에게 섭취를 주의, 금지시키지도 않았다. 결국 서 일본을 강타한 미증유의 다이옥신 식용유 사건은 두 기업과 정부의 공동 작품이었던 셈이다.



일본은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식품공해 사건, 환경 공해 사건이 반복적으로 수차례 발생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필자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미나마타병을 대표적인 환경공해병으로 배웠던 1990년대 초, 기자는 이미 미나마타 병은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40년 전의 일이니까 이제는 괜찮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 거듭 확인하게 되는 환경공해 사건, 식품공해 사건, 약품 공해 사건의 진행과정과 피해자들의 상황을 직면하면서 매우 놀랐다.



1950년대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 해안에서 잡힌 수은중독 오염물고기를 먹고 수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미나마타병에 있어서도, 독성물질을 폐기한 기업의 범죄와 함께 행정의 직무유기 역시 피해자 발생 규모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원인이었다. 사건 발생 후, 건강피해 발생의 원인이 수은중독 물고기에 있었음을 파악한 행정부는 "인근 바다에 있는 물고기 전부가 수은에 중독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라며, 시민에게 더이상 인근해역에서 잡히는 물고기를 섭취하지 말 것을 강력한 홍보와 함께 행정지도로서 시행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주의하라는 '권고'만을 내렸다. 당시 적절하고 강력한 대처가 있었다면 피해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구온난화, 핵무기 등 세계에는 인류 자체를 멸망시키고도 남을 메가톤급의 전인류적 문제가 인류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환경호르몬이나 유전자 조작, 농약, 그리고 다양한 식품공해 사건 등도 단순히 중국발 멜라닌 파동에 그치지 않고, 어느 나라에서나 이렇게 사람과 동물, 그리고 자연의 생명을 노리고 있다.



기업의 범죄 혹은 실수로 인해 발생한 사고와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덮어주고 방기하는 기업과 국가의 공조 체제는 지금 한국사회에도, 지구상 어느 곳에라도 존재하고 있다. 시민의 참여와 감시만이 이러한 재앙과 불의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반대로 시민의 감시와 관심이 멀어지는 순간, 비슷한 종류의 재난이 또다른 시간, 또 다른 장소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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