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대림자동차 해고자 농성장 "밥맛이 끝내줘요"

얼어붙은 노동자들의 마음까지 녹이는 유정기씨 '음식 솜씨' 화제

등록|2010.01.29 10:29 수정|2010.01.29 10:29
"맛이 끝내줍니다."

창원공단 대림자동차 정문 앞. 정리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철회'를 외치며 집회·농성을 벌이고 있지만, 이들이 가끔씩 웃는 때가 있다. 아침·저녁 식사시간이 그렇다. 그때만 되면 이들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먹으면서 "진짜 맛있다 그자"라는 말을 연발한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대림자동차지회 조합원 유정기(48)씨가 28일 저녁 대림자동차 정문 앞에서 '정리해고 철회 촉구 문화제'가 끝난 뒤 참석자들에게 떡국을 건네주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윤성효

28일 저녁 8시경. 100여 명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굴이 들어간 떡국을 먹고 있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문화제'를 연 뒤 저녁식사를 한 것이다. 떡국을 담았던 큰 통은 금세 바닥이 났다. 떡국을 퍼주는 사람은 유정기(48)씨.

떡국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맛이 죽입니다"며 한마디씩 건네는 말에 유씨는 간혹 웃음을 보였다. 유정기씨는 해고자와 집회 참가자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일명 '요리사'다.

대림자동차는 지난해 10~12월 전체 사원 665명 중 절반에 가까운 293명을 구조조정하기로 하고 명예퇴직(193명)과 무급휴직(10명), 정리해고(47명)를 단행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대림자동차지회는 지난해 10월부터 회사 정문 앞에서 컨테이너 농성을 하고 있으며, 12월부터 거의 매일 저녁 '문화제'를 열고 있다.

해고자들은 요즘 아침 7시에 모여 '출근투쟁'을 벌이고, 오후 5시에는 '퇴근투쟁', 저녁 7시에는 '문화제'를 연다. 금속노조 경남지부 소속 다른 사업장들은 돌아가면서 이들과 연대하고 있다. 문화제에는 해고자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나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까지 함께한다.

유정기씨는 이들의 아침과 저녁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해고자들은 점심식사는 대림자동차 식당에서 해결하고 있다. 유씨의 음식 솜씨는 지역 노동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있다. "밥이 맛있다는데 집회 갔다가 밥 한번 먹어보자"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곳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매일 150~200명에 이른다.

컨테이너 농성장 옆에 '부엌'을 차려 놓았다. 부엌에는 큰 밥솥이며 도마, 그릇 등 온갖 주방기구들이 있었다. 노조 지회는 두세 명씩 조를 편성해 유씨의 부엌일을 도와주고 있다. 그래도 음식은 모두 유씨가 만든다.

그렇다고 유씨는 요리사 자격증을 가진 건 아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은 음식이 아니라 오토바이를 만들었다. 군대에 있을 때 요리를 담당한 게 인연이다. 이후 친구나 가족들과 낚시나 등산을 갔을 때 그는 요리실력을 발휘해 왔다.

▲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대림자동차지회 조합원 유정기씨는 매일 아침 출근집회와 저녁 문화제를 연 뒤 참가자들에게 밥이나 떡국을 해서 제공하고 있다. ⓒ 윤성효


군대에서 익힌 요리 솜씨 맘껏 발휘... "맛이 죽이네요"

유정기씨는 "이 많은 사람이 밥을 사 먹을 수는 없잖아요. 직접 해서 먹기로 하고, 어떻게 하다 보니 제가 담당을 하게 되었네요"라며 "음식 맛이라는 게 여러 사람의 입에 다 맞추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 맛이 없더라도 다들 맛있다며 잘 먹어주니 고맙네요"라고 말했다.

노조 지회는 그동안 마련해 놓았던 '투쟁기금'으로 쌀이며 부식을 마련했고, 금속노조 경남지부에서도 물품을 챙겨주고 있다. 최근에는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진 뒤 어느 사찰에서 쌀(20kg) 4포대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유정기씨는 "메뉴는 자꾸 바꿔요. 한 가지를 계속 내면 질리잖아요. 아침은 주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된장국을 하고, 저녁은 생선조림이나 육고기 위주로 하죠"라며 "요즘 날씨가 추우니까 국물이 있으면 좋잖아요"라고 말했다.

유씨가 만든 음식 맛을 본 사람들은 '감탄'한다. "외주 떼어 나가도 집 한 채는 사겠다"거나 "회사에 다시 들어가면 식당에서 일하면 되겠다", "집에서 먹는 밥보다 더 맛있다", "식당 차리면 대박 나겠다" 등등.

이경수 지회장은 "얼마 전 유정기 조합원의 딸이 와서 말하는데 '집에서도 가끔 음식을 하는데 엄마가 해놓은 밥보다 더 맛있다'고 하대요"라고 소개했다.

▲ 28일 저녁 추운 날씨 속에 창원 대림자동차 정문 앞에서 열린 문화제에 참석했던 노동자들이 유정기씨가 끓여 준 떡국을 나눠 먹고 있다. ⓒ 윤성효


대림자동차 해고사태가 해결될지 여부에 관심이 높다. 최근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사후조정'으로 교섭을 권고했다. 이에 노조 지회와 회사는 다음 주까지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시 교섭을 벌이게 된다.

이경수 지회장은 "회사에서 안이 마련되는 대로 만나기로 했다"면서 "유정기씨가 지은 밥이 잘 넘어가듯이, 이번 사태도 잘 해결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해고자들은 실업수당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모닥불을 쬐던 한 노동자는 "그래도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고 식당에서 마음 편안하게 먹는 밥이 더 맛있겠죠"라고 말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