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대타협' 성취, '마르다의 집'을 꿈꾼다
[희망릴레이①] 박영숙을 만나다
박영숙, 그는 왜 '간절'한가?
박영숙. 그는 지난 12일 '2010 희망을 위한 시민사회 원로-야5당 대표 간담회'를 앞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의도까지 오전 7시30분에 맞추어 가려면 그가 사는 일산에서는 두 시간이나 걸려 새벽 4시30분에는 일어나야만 한다. '이렇게 중요한 모임에 혹시라도 늦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그는 시계를 두 개나 맞추어 놓고도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개인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은 그는 이날도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야만 했는데, 문득 그 모임의 중요성 때문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간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뜻하지 않게 12일의 모임을 앞두고 밤잠을 설친 것은. 그는 12일 모임 전까지 '너무' 답답했다. 이미 지난해 10월 <희망과대안>이 오랜 준비 끝에 발족을 했고, 또 보수단체 소속 '할아버지'들이 이에 '위협'을 느끼고 한꺼번에 몰려나와 '훼방'을 놓았지만, 그가 보기에 정치권이든, 아니 어떤 면에서는 시민사회단체까지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이 엄중한 시기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정말 답답했을 거예요."
평안도 사투리가 약간 맴돌고 있는 단정한 어투로 그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날의 모임에 대해 "야5당과 시민사회가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 그 자체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 만큼 만에 하나 잘 되지 않을 경우, 그 뒤를 따르게 될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미 우리는 경험했지 않는가? 지난 1987년 찬란했던 그 6월의 함성을 뒤로 한 채, DJ와 YS의 분열로 인한 12월 대선의 패배와 그 뒤를 '태풍'처럼 휩쓸었던 국민들의 허망함과 불신의 그 '스산함'을.
"유리그릇처럼 다루어야 해요."
그는 지난 12일 모임 구성원들의 지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야5당의 연합정치 시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고 했다. 서로의 지향이 다른데 자칫하면 오히려 갈등과 교착 상태만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취해 내야만 하는 큰 뜻을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야5당에 주문했다. 연합정치야말로 그동안 '분열'과 '반목'을 거듭해왔던 야5당이 정치적 대타협, 말하자면 정치적 대협약을 만들어내는 것인 만큼, 그 속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아 일을 그르친다면 국민들에게 절대로 '감동'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
"지금까지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닌가 봐요."
그는 지난 12일 모임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 혹독한 감기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내년이면 80세가 되는 그는 아직도 새벽잠을 설치면서 아니면 밤늦게까지 모임에 쫒아 다녀야만 하는 혹독하고도 절망적인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몸이 고달파서 물러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오늘도 그는 어쩔 수 없이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박영숙의 아버지는 일본 자동차회사에서 대체에너지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갓 구워낸 빵에 버터를 발라 녹인 후 빨간 딸기잼을 발라 손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기독교신자가 아니었음에도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보낸 아버지는 근대화된 신사였다. 재봉틀이 나오자마자 누구보다도 먼저 사들고 와서는 손수 재단하고, 박음질을 해 아내와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던 사람. 그의 집에서는 당시 관습과는 달리 밥을 풀 때도 아들 먼저가 아니라 태어난 나이순이었다고 한다. 그가 우리 사회의 여성문제를 일찍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집안분위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집안분위기는 당시 한국사회와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 아홉이었던 194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복한 가정생활은 끝이 나고 만다. 31살에 홀몸이 된 어머니는 6남매(박영숙은 둘째였다)를 키우기 위해 만주를 넘나들며 보따리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제안으로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할아버지는 꽤 큰 자산가로 양조장을 하면서 만주 유일의 누룩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그의 어머니는 안살림을 총 관장했다. 공장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의 식사수발까지 하는 것이었으니, 그 규모는 안살림이라 하기에는 너무 굉장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저장음식 중 하나인 꿩고기만 하더라도 트럭으로 몇 대를 들여와 일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털 뽑고 뼈를 다져서 김장하듯 여러 개의 독에 저장하는 수준이었으니,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손님 시중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 때문이었을까? 해방 후 귀향을 해 평양 정의여중을 다니던 열다섯 박영숙은 살림을 하느라 다른 삶은 꿈도 꾸지 못하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친구들에게 선언하고 만다. 그러나 해방 후 평양에서는 홀로 된 어머니의 힘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너무 막막했다. 결국 어머니는 1947년 당시 남에서 16사단장으로 있던 박영숙의 작은아버지를 찾아 광주로 월남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작은아버지 덕택에 어머니는 광주에서 제과점을 열었다. 그리고 박영숙도 전남여중에 편입을 했다.
1951년 그는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6.25전쟁 와중이라 마음 놓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피난지 부산의 학교에서 그는 학과수업 시간이외에는 전쟁고아와 피난민들을 돕는 자원 활동에 온 몸을 다 바쳐 전념했다.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는 이 활동을 그만 둘 수 없었다. 대학YWCA 회원이 되어, 학교를 반년 쉬기까지 하면서 지역공동체활동에 나섰다. 그리고 졸업하면서 학교에 남아달라는 요청까지 들었지만 YWCA에서 만난 박에스더의 요청으로 1955년부터 YWCA 실무자로 활동하게 된다.
정신적 멘토 안병무, 그리고 마르다의 집
박영숙이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게 된 것은 1976년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이후부터이다. 함석헌, 안병무, 문익환, 이우정, 윤보선, 김대중 등이 연루된 이 사건으로 그의 남편 안병무를 비롯한 11인이 구속되면서 박영숙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와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등과 함께 '3.1사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시위활동에 나서게 된다.
그가 평생의 멘토인 안병무와 결혼한 것은 1967년 12월 29일이었다. 당시 독신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독일유학에서 돌아와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장시간의 암 수술을 마치고 난 어머니 선천댁의 평생 단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당시 이희호의 뒤를 이어 YWCA 총무로 활동하던 그에게 청혼을 한다. 이미 그는 1950년대 초 부산에서 안병무를 <야성>이란 잡지에 실린 글을 통해 알고 있었고, 당시에는 YWCA 활동을 통해 강연자로 참여한 안병무를 직접 접하고 있던 상태였다.
안병무는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교수벽이 철저했던 그가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일러주었는지 박영숙이 지금도 어떤 판단을 하고 결정해야 하는 경우 망설이지 않는 것은 안병무의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란다. 박영숙은 소신을 생활화하는 삶을 충실하게 산 안병무를 존경한다.
결혼 후 그와 안병무가 살았던 수유리 집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이래 1990년대 초반 우면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재야인사들에게 완전 개방되어 있었다. 그 당시 도청 때문에 암호를 사용했는데 그의 집을 '마르다의 집'이라고 불렀다. 마르다는 기독교 성서속 인물로, 영성에 탁월했던 그의 동생 마리아와는 달리 돌봄과 헌신에 탁월했던 여성의 이름이다.
재야인사들의 아지트였던 '마르다의 집'에서는 구속자 가족모임 뿐만 아니라 해직교수 모임, 외국방문자접대모임도 하고 고은시인 결혼식까지 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으며 신년모임, 4.19모임, 구속자석방축하모임 등으로 그의 마르다의 집에서 밥을 먹은 사람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박영숙, 그가 아는 이명박
박영숙은 이명박 대통령을 일을 통해 직접 접해본 경험이 있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조순시장 시절에 이어 그는 2002년부터 04년까지 녹색서울시민위원회에서 시장과 더불어 공동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그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는 걱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가 본 이명박 대통령은 무조건 밀어부치는 식의 행정과 철면피한 편 가르기를 마다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모한 추진력을 거침없이 발휘하는 상식에서 벗어난 예측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시장시절 당시 서울시의회 의석비율이 거의 100% 가깝게 한나라당이 차지하던 행운이 뒷받침되기도 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무슨 일이든 발상만 하고 나면 곧바로 추진해 버리곤 했는데 문제는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토건적 발상이었다는 데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의 발상에 토를 다는 공무원이나 인사들은 다른 견해나 의견을 제시하는 즉시 그와 함께 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적극적인 토론과 숙의는 시간만 낭비하는 일로 효율성만 떨어뜨리는 '성가신' 일인 것이다. 그 만큼 그의 사전에는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당선되어 자행하는 완벽한 편가르기 행태가 우리사회의 분열을 부추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을 보라.
박영숙이 기억하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통령 내외가 200여명의 여성계 대표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을 때 일이다. 지정된 세 명의 발언자 중 한분이 앞으로 이런 행사에는 진보진영의 여성계 대표들도 초청되기를 바란다고 하자 그의 옆에 있던 여성부장관에게 초청한 것을 확인하고 하는 말이 '그분들 양심적이지요, 저를 찍지 않았는데 어떻게 옵니까?'라는 것이었다. 그의 편가르기 벽은 이만큼 중증이었다. 그는 반쪽만의 대통령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을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대통령에게 제동을 가할 수 있는 힘은 투표권 행사를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고 믿는 박영숙이 지난 12일의 모임에서 비롯된 야5당의 연합정치에 기대와 희망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영숙을 만나다
인터뷰 후 그는 사무실로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묻는 말에 따라 그의 삶의 과정을 이야기한 그는 자주 기억의 퍼즐들을 놓쳐버리곤 했다. '미안하다'고 쑥스러워하면서 그가 곧바로 보내준 책, <또하나의문화>에서 펴낸 그의 Herstory <박영숙을 만나다>를 읽었다. 평생을 '마르다'처럼 살아온 그의 삶의 결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1980년대 광주의 아픔을 겪으면서 '이념과잉의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386세대로서 '말씀'보다는 몸소 '실천'하는 것을 삶의 전범으로 삼아왔던 그의 한 평생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던 것이다.
잔뜩 어질러져 있는 방안을 보며 386세대는 우선 한숨부터 내쉬고, 그리고는 '이걸 어떻게 치워야 할까?' 머리로 '고민'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우선 치우고 본다. 자신의 삶 앞에 널려 있는 여러 일들을 우선 몸으로 치우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 세상을 온 몸으로 밀고 나간다. 이 급박한 순간에 어디 생각할 '겨를'이라도 있느냐는 듯이. 그런 그가 존경스럽다. 이제 나도 '머리'로 고민은 그만하고, 그처럼 치열하게 '현장속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아니, 밀고가고 싶다.
그가 1987년 평민당의 부총재로 정치판에 몸을 담아 13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도 그것은 그의 삶 앞에 '그냥' 놓인 것이었다.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부회장으로 있던 그에게 정치권으로부터 정당참여 제의가 왔다. 주변사람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그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길을 '그냥'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온 신명을 다 바쳐 '정치활동'을 수행했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또 시민사회 출신 인사로서 자신을 떠나보낸 그곳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1993년 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미련 없이 정치판을 떠났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그는 남편 안병무의 적극적인 격려 속에 환갑이 넘은 나이로 영국 케임브리지로 1년 반 동안의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국제환경정책을 연구하고 돌아온 그는 다시 그의 '시민사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온 몸으로 그의 삶을, 아니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 14일 그는 <희망과대안>의 원로중진모임에 직접 만든 쿠키를 한 상자 싸왔다. 그리고 강조했다. "우리가 이루어내야 하는 전인미답의 길인 '정치적 대타협'을 성취해 내기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더 각 집단이 자기의 입장과 이익 그리고 기득권을 일정부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국민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갈 수는 없습니다. 시민사회의 참여가 이것을 담보해 내는 교두보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시민사회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적극적 정당정치 개입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각자 다른 처지와 이익관계로 큰 틀 짜기가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시민사회는 중재자로서, 그리고 해결사로서의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도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2010 지방선거에서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빈다. 아니, 함께 할 것이다. 2010 새로운 '희망'을 싹 틔울 6월2일 지방선거 후 <희망과대안>은 박영숙, 그의 일산 집에서 '마르다의 집'을 다시 함께 열 것이다. 2010년의 '희망'을 꿈꾸며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Herstory <박영숙을 만나다>의 일독을 권한다.
박영숙. 그는 지난 12일 '2010 희망을 위한 시민사회 원로-야5당 대표 간담회'를 앞두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의도까지 오전 7시30분에 맞추어 가려면 그가 사는 일산에서는 두 시간이나 걸려 새벽 4시30분에는 일어나야만 한다. '이렇게 중요한 모임에 혹시라도 늦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그는 시계를 두 개나 맞추어 놓고도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개인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은 그는 이날도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야만 했는데, 문득 그 모임의 중요성 때문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박영숙이 걸어온 길 |
1932년 평양 출생. 만주 이주. 1945년 길림 동영소학교 졸업. 해방 후 귀향. 1947년 월남. 광주 전남여고 졸업. 이화대 영문과 졸업. 1967년 YWCA연합회 총무. 서른일곱에 마흔일곱의 안병무와 결혼. 1970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사무처장. 198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위원장. 1985년 아시아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위원장. 1985년 KBS-TV시청료거부 범국민운동본부 여성연합회 회장. 1986년 한국여성단체연합 부회장 겸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최루탄추방위원회 공동대표.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1988년 평민당 총재권한대행. 13대 국회의원.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 한국위원회 공동대표. 1992년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소장. 199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객원연구원(국제환경정책연구). 1995년 녹색서울시민위원회 위원장. 1998년 사랑의친구들총재. 1999년 여성환경연대 으뜸지기.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2002년 대통령자문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2006년 저출산·고령화연석회의 공동의장. 2009년(재)살림이 이사장 |
"국민들은 정말 답답했을 거예요."
평안도 사투리가 약간 맴돌고 있는 단정한 어투로 그는 조곤조곤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날의 모임에 대해 "야5당과 시민사회가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 그 자체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들에게 큰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 만큼 만에 하나 잘 되지 않을 경우, 그 뒤를 따르게 될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미 우리는 경험했지 않는가? 지난 1987년 찬란했던 그 6월의 함성을 뒤로 한 채, DJ와 YS의 분열로 인한 12월 대선의 패배와 그 뒤를 '태풍'처럼 휩쓸었던 국민들의 허망함과 불신의 그 '스산함'을.
"유리그릇처럼 다루어야 해요."
그는 지난 12일 모임 구성원들의 지향이 다 다르기 때문에 야5당의 연합정치 시도에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한다고 했다. 서로의 지향이 다른데 자칫하면 오히려 갈등과 교착 상태만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취해 내야만 하는 큰 뜻을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야5당에 주문했다. 연합정치야말로 그동안 '분열'과 '반목'을 거듭해왔던 야5당이 정치적 대타협, 말하자면 정치적 대협약을 만들어내는 것인 만큼, 그 속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아 일을 그르친다면 국민들에게 절대로 '감동'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
▲ 박영숙 ⓒ 희망과대안
"지금까지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닌가 봐요."
그는 지난 12일 모임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 혹독한 감기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내년이면 80세가 되는 그는 아직도 새벽잠을 설치면서 아니면 밤늦게까지 모임에 쫒아 다녀야만 하는 혹독하고도 절망적인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몸이 고달파서 물러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오늘도 그는 어쩔 수 없이 현장에 서 있는 것이다.
박영숙의 아버지는 일본 자동차회사에서 대체에너지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갓 구워낸 빵에 버터를 발라 녹인 후 빨간 딸기잼을 발라 손수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기독교신자가 아니었음에도 아이들을 주일학교에 보낸 아버지는 근대화된 신사였다. 재봉틀이 나오자마자 누구보다도 먼저 사들고 와서는 손수 재단하고, 박음질을 해 아내와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 입히던 사람. 그의 집에서는 당시 관습과는 달리 밥을 풀 때도 아들 먼저가 아니라 태어난 나이순이었다고 한다. 그가 우리 사회의 여성문제를 일찍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집안분위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집안분위기는 당시 한국사회와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 아홉이었던 194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유복한 가정생활은 끝이 나고 만다. 31살에 홀몸이 된 어머니는 6남매(박영숙은 둘째였다)를 키우기 위해 만주를 넘나들며 보따리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제안으로 만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할아버지는 꽤 큰 자산가로 양조장을 하면서 만주 유일의 누룩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그의 어머니는 안살림을 총 관장했다. 공장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의 식사수발까지 하는 것이었으니, 그 규모는 안살림이라 하기에는 너무 굉장했다. 겨울을 나기 위한 저장음식 중 하나인 꿩고기만 하더라도 트럭으로 몇 대를 들여와 일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털 뽑고 뼈를 다져서 김장하듯 여러 개의 독에 저장하는 수준이었으니, 어머니는 새벽부터 밤까지 손님 시중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어머니 때문이었을까? 해방 후 귀향을 해 평양 정의여중을 다니던 열다섯 박영숙은 살림을 하느라 다른 삶은 꿈도 꾸지 못하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친구들에게 선언하고 만다. 그러나 해방 후 평양에서는 홀로 된 어머니의 힘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너무 막막했다. 결국 어머니는 1947년 당시 남에서 16사단장으로 있던 박영숙의 작은아버지를 찾아 광주로 월남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작은아버지 덕택에 어머니는 광주에서 제과점을 열었다. 그리고 박영숙도 전남여중에 편입을 했다.
1951년 그는 이화여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6.25전쟁 와중이라 마음 놓고 공부에만 열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피난지 부산의 학교에서 그는 학과수업 시간이외에는 전쟁고아와 피난민들을 돕는 자원 활동에 온 몸을 다 바쳐 전념했다.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는 이 활동을 그만 둘 수 없었다. 대학YWCA 회원이 되어, 학교를 반년 쉬기까지 하면서 지역공동체활동에 나섰다. 그리고 졸업하면서 학교에 남아달라는 요청까지 들었지만 YWCA에서 만난 박에스더의 요청으로 1955년부터 YWCA 실무자로 활동하게 된다.
정신적 멘토 안병무, 그리고 마르다의 집
박영숙이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몸을 담게 된 것은 1976년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3.1민주구국선언' 사건 이후부터이다. 함석헌, 안병무, 문익환, 이우정, 윤보선, 김대중 등이 연루된 이 사건으로 그의 남편 안병무를 비롯한 11인이 구속되면서 박영숙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와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 등과 함께 '3.1사건 구속자가족협의회'를 구성하고 다양한 시위활동에 나서게 된다.
그가 평생의 멘토인 안병무와 결혼한 것은 1967년 12월 29일이었다. 당시 독신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독일유학에서 돌아와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장시간의 암 수술을 마치고 난 어머니 선천댁의 평생 단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당시 이희호의 뒤를 이어 YWCA 총무로 활동하던 그에게 청혼을 한다. 이미 그는 1950년대 초 부산에서 안병무를 <야성>이란 잡지에 실린 글을 통해 알고 있었고, 당시에는 YWCA 활동을 통해 강연자로 참여한 안병무를 직접 접하고 있던 상태였다.
안병무는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사람이었다. 교수벽이 철저했던 그가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해서 일러주었는지 박영숙이 지금도 어떤 판단을 하고 결정해야 하는 경우 망설이지 않는 것은 안병무의 말이 떠오르기 때문이란다. 박영숙은 소신을 생활화하는 삶을 충실하게 산 안병무를 존경한다.
결혼 후 그와 안병무가 살았던 수유리 집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이래 1990년대 초반 우면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재야인사들에게 완전 개방되어 있었다. 그 당시 도청 때문에 암호를 사용했는데 그의 집을 '마르다의 집'이라고 불렀다. 마르다는 기독교 성서속 인물로, 영성에 탁월했던 그의 동생 마리아와는 달리 돌봄과 헌신에 탁월했던 여성의 이름이다.
재야인사들의 아지트였던 '마르다의 집'에서는 구속자 가족모임 뿐만 아니라 해직교수 모임, 외국방문자접대모임도 하고 고은시인 결혼식까지 하는 등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으며 신년모임, 4.19모임, 구속자석방축하모임 등으로 그의 마르다의 집에서 밥을 먹은 사람들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박영숙, 그가 아는 이명박
박영숙은 이명박 대통령을 일을 통해 직접 접해본 경험이 있다. 1995년부터 97년까지 조순시장 시절에 이어 그는 2002년부터 04년까지 녹색서울시민위원회에서 시장과 더불어 공동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그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는 걱정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가 본 이명박 대통령은 무조건 밀어부치는 식의 행정과 철면피한 편 가르기를 마다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모한 추진력을 거침없이 발휘하는 상식에서 벗어난 예측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시장시절 당시 서울시의회 의석비율이 거의 100% 가깝게 한나라당이 차지하던 행운이 뒷받침되기도 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무슨 일이든 발상만 하고 나면 곧바로 추진해 버리곤 했는데 문제는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 토건적 발상이었다는 데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그의 발상에 토를 다는 공무원이나 인사들은 다른 견해나 의견을 제시하는 즉시 그와 함께 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적극적인 토론과 숙의는 시간만 낭비하는 일로 효율성만 떨어뜨리는 '성가신' 일인 것이다. 그 만큼 그의 사전에는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당선되어 자행하는 완벽한 편가르기 행태가 우리사회의 분열을 부추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을 보라.
박영숙이 기억하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쓴웃음을 짓게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통령 내외가 200여명의 여성계 대표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을 때 일이다. 지정된 세 명의 발언자 중 한분이 앞으로 이런 행사에는 진보진영의 여성계 대표들도 초청되기를 바란다고 하자 그의 옆에 있던 여성부장관에게 초청한 것을 확인하고 하는 말이 '그분들 양심적이지요, 저를 찍지 않았는데 어떻게 옵니까?'라는 것이었다. 그의 편가르기 벽은 이만큼 중증이었다. 그는 반쪽만의 대통령임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을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대통령에게 제동을 가할 수 있는 힘은 투표권 행사를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다고 믿는 박영숙이 지난 12일의 모임에서 비롯된 야5당의 연합정치에 기대와 희망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영숙을 만나다
인터뷰 후 그는 사무실로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묻는 말에 따라 그의 삶의 과정을 이야기한 그는 자주 기억의 퍼즐들을 놓쳐버리곤 했다. '미안하다'고 쑥스러워하면서 그가 곧바로 보내준 책, <또하나의문화>에서 펴낸 그의 Herstory <박영숙을 만나다>를 읽었다. 평생을 '마르다'처럼 살아온 그의 삶의 결들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1980년대 광주의 아픔을 겪으면서 '이념과잉의 시대'를 살아야만 했던 386세대로서 '말씀'보다는 몸소 '실천'하는 것을 삶의 전범으로 삼아왔던 그의 한 평생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던 것이다.
잔뜩 어질러져 있는 방안을 보며 386세대는 우선 한숨부터 내쉬고, 그리고는 '이걸 어떻게 치워야 할까?' 머리로 '고민'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우선 치우고 본다. 자신의 삶 앞에 널려 있는 여러 일들을 우선 몸으로 치우고 본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 세상을 온 몸으로 밀고 나간다. 이 급박한 순간에 어디 생각할 '겨를'이라도 있느냐는 듯이. 그런 그가 존경스럽다. 이제 나도 '머리'로 고민은 그만하고, 그처럼 치열하게 '현장속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아니, 밀고가고 싶다.
그가 1987년 평민당의 부총재로 정치판에 몸을 담아 13대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도 그것은 그의 삶 앞에 '그냥' 놓인 것이었다.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부회장으로 있던 그에게 정치권으로부터 정당참여 제의가 왔다. 주변사람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그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길을 '그냥'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온 신명을 다 바쳐 '정치활동'을 수행했다. 여성 정치인으로서, 또 시민사회 출신 인사로서 자신을 떠나보낸 그곳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1993년 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미련 없이 정치판을 떠났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다. 그리고 그는 남편 안병무의 적극적인 격려 속에 환갑이 넘은 나이로 영국 케임브리지로 1년 반 동안의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국제환경정책을 연구하고 돌아온 그는 다시 그의 '시민사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다시 온 몸으로 그의 삶을, 아니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 14일 그는 <희망과대안>의 원로중진모임에 직접 만든 쿠키를 한 상자 싸왔다. 그리고 강조했다. "우리가 이루어내야 하는 전인미답의 길인 '정치적 대타협'을 성취해 내기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더 각 집단이 자기의 입장과 이익 그리고 기득권을 일정부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국민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갈 수는 없습니다. 시민사회의 참여가 이것을 담보해 내는 교두보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시민사회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적극적 정당정치 개입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각자 다른 처지와 이익관계로 큰 틀 짜기가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시민사회는 중재자로서, 그리고 해결사로서의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사회도 시험대에 오른 것입니다."
2010 지방선거에서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빈다. 아니, 함께 할 것이다. 2010 새로운 '희망'을 싹 틔울 6월2일 지방선거 후 <희망과대안>은 박영숙, 그의 일산 집에서 '마르다의 집'을 다시 함께 열 것이다. 2010년의 '희망'을 꿈꾸며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Herstory <박영숙을 만나다>의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이인문 기자는 '희망과 대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회원팀장입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