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로 당신에게 피로가 생겨나지 않기를"
[서평] <위대한 침묵><워낭소리>의 의형제 <느림보 마음>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를 이제야 봤습니다. 사람과 소의 '인우지교(人牛之交)'를 다룬 영화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우습게도 이 영화를 보면, 가뜩이나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터에 한우 쇠고기도 못 먹을 것 같아 망설여졌습니다. 키우지는 않지만 개를 좋아해서 개고기는 죽어도 못 먹는 지라 쇠고기도 그런 여파(?)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뷔페 식당에서는 양고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저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왜 안 먹느냐고 묻기에 "내가 양띠라서 안 먹는다"라는 궁색한 답변을 했습니다. 사실은 낯설어서 그런 것이지만, 대관령 양떼목장에서 순하고 조용한 양들을 만난 적이 있기도 해서 그들과 한참 어울리다 보면 여전히 그럴 것 같습니다.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길, '침묵'
그러다 최근 계기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상영관이 뜸해 일부러 멀리 찾아가 본 영화 <위대한 침묵>과 관련된 신문 칼럼을 본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칼럼은 <워낭소리>도 언급했습니다(서울신문, 2010. 1. 21일자 '문화마당' 참고). 그 칼럼의 필자는 <위대한 침묵>에서 침묵의 존재 당위성을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없음의 존재'인 인간이 '있음의 존재(神)'와 소통할" 길로 설명했습니다. <워낭소리>를 통해서는 '느림'의 가치를 찾았습니다. "'있음의 존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느림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에게도 세 시간 가까운, 대사가 거의 없는 침묵의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더랬습니다. 자급자족의 노동을 하고 공동 종교예절을 지켜나가면서, 나머지 시간은 신과 대화하고 묵상하고 고뇌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종말이 와도 저 곳에는 오지 않았으면, 아니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침묵과 절제와 느림의 삶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에 종말이 와도 허둥대지 않을 것이고, 종말이 딱히 겁날 대상이 아닐 것 같기 때문입니다.
왠지 저라도 손님으로 그 곳 구석진 방 하나 얻어 한참을 머물다가 그런 와중에, 스피드 시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물적 서비스와 지적인 정보를 왕창 놓치더라도 그리 억울할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모은 돈과 절약해 놓은 시간을 통해 얻고자 하는 안식을 이곳의 수도사들은 굳이 돈을 모으고 시간을 절약하지 않더라도 바로 자신들이 선 자리에서 무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참을 에둘러 가서도 결국은 잘 찾아내지 못하는 평온을 그들은 침묵과 느림으로써 쉽게 찾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도시인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정적(침묵), 느림(뒤처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무소유 이런 것들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노트북을 두들기는 저 또한 그렇습니다. 펜으로 써내려가는 미덕을 많이 상실한 것도 그런 모습의 하나이겠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침묵> 중에는 한 수도사가 필기체로 천천히 펜글씨를 써내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음이 없는 글쓰기 말입니다. 부산의 강은교 시인은 시작(詩作)할 때, '컴퓨터로 인해 잃어버린 말의 긴장도를 시험하기 위해' 1차적으로 연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다시 울렸으면 하는 '워낭소리'
또 하나의 계기는 안동을 여행한 것입니다. 안동댐 근처에 위치한 '안동민속박물관' 관내를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동료들과 둘러보았는데, 그곳에 실제 크기의 초가집 모형이 있었고 그 모퉁이에 워낭이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 하나가 그걸 가리키며 '워낭'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사실은 이전에 전세버스의 짝꿍이었던 그 친구가 버스 안에서 영화 <워낭소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저는 위의 그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았고요.
친구는 초가집에 대한 추억도 전해 주었습니다. 1년에 한번 마을사람들끼리 품앗이하며 서로의 집 지붕 위에 짚더미를 쌓아올려 겨울준비를 했더랬지요. 그 위로 비가 내려도 속에 빈 공간이 많은 초가지붕은 빗소리를 아련한 크기로 줄여 주었더랍니다. 잠을 잘 잘 수 있었고요. 그러던 것이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양철지붕으로 바뀌었는데, 비만 오면 양철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그렇게 시끄러울 수 없었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워낭소리> DVD를 빌려 보았습니다. 참 못 생긴 늙은 소와 부지런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등바등 싸우면서 정을 나누면서 사는 이야기였습니다. 뇌리에 가장 남는 것은 다리가 불편한 소가 끄는 달구지의 '느린 속도'였습니다. 마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비웃듯 반항이라도 하듯 느리게 더디게 갔습니다. 사실은 우리네 옛 본모습이지만요.
홀쭉한 몸으로 할아버지가 탄 달구지를 소는 매일매일 끌었습니다. 논으로 밭으로 심지어 읍내로까지 행차도 하는데 그 속도로 보아서 하루에 몇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 같습니다. '못된' 주인을 만나 평생 일만 하다 가는 '일소'이지만 그 얼굴 표정에 싫은 표정 하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쉬는 시간 꼴을 베다 소에게 먹이면서 한없이 소를 바라다봅니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할머니보다 더 가까운 동반자였습니다.
영화 초반부터 이제 40살 된 무명씨(無名氏) 소는 노병(老病)으로 1년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소에 대한 사랑은 소가 먹으면 죽을까봐 논밭에 일체의 농약을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논밭에 농약을 뿌리면 자연 근처 풀에게까지 농약이 퍼질 것이고 그걸 먹는 소에게도 영향이 갈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농사일은 더디고, 기계를 일체 사용하지 않으니 심은 것을 거둘 때도 끝날 기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보기에도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그렇게 소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느리게 살았지만 그 느림으로도 9남매를 키워 도회지로 보냈습니다. 이런 게 기적이지 싶습니다.
한난과 매병 바라보기
서론이 길었네요. <위대한 침묵>은 '침묵'을, <워낭소리>는 '느림'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는데 의형제지간인 이 둘을 함께 담은 책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가 지금 스승처럼 대하고 있는 <느림보 마음>이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이 책의 산문 한 편을 읽으며 가라앉히곤 합니다. 아직 훈련이 안 돼 글쓴이의 글 표현과 감성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말기도 하지만, 천방지축 날뛰는 '마음 가랑잎들' 위에 묵직한 바위 얹어놓는 듯한 효과는 분명히 얻습니다. 올 한해 책을 선물할 일이 있으면 이 책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책 속의 침묵과 느림과 안정이 퍼지길 바라면서요.
'시원하고 푸른 한 바가지 우물물 같은 휴식' 편을 때때로 묵상하듯 읽어보십시오. "마음이 쉬는 것이 참된 지혜"라 하면서 "거실이 한쪽에 소파를 두듯이" 삶에 휴식을 두라 합니다. "(마당뿐 아니라) 나의 마음에도 꽃밭을 가꾸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내 삶의 리듬을 내가 유지할 필요가 있"다 합니다. 일부러 짬을 내 걱정하고, 정중하게 거절을 못 하는 소심쟁이들에게 단비 같은 말들입니다. 다른 글에 나오는 "뒷맛이 개운한 한가함"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멋진지요.
제 가슴을 치는 글 한 편이 또 있습니다. '움직이고 흘러가는 수레와 배와 물고기' 편에, "나는 나의 일로 인해 당신에게 피로가 생겨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내 본의엔 좋은 뜻이었다 하더라도 다른 이에게 생채기가 된다면 도로 거둘 일이지요. 그래서 "나는 빈 그릇에 담긴 물이었으면 합니다. 물이 빈 그릇에 담기더라도 빈 그릇을 상처내지 않는 것처럼" 되기를 소망해야 되겠지요.
안동을 여행하면서 도산서원도 들렀습니다. 도산서원의 안방, 그러니까 퇴계 이황 선생이 기거하던 방의 이름이 '완락재(玩樂齋)'입니다.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락) 감상하여도(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하다'라는 주자의 말에서 따왔다 합니다. 경전이나 고전이 그러하겠고,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 자연풍경이 그러하겠는데, 침묵의 세계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생 접해도 다 앎이 없을 깊은 내용이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전 발걸음 때에는 이곳 도산서당의 마루 '암서헌(巖栖軒)'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여행하다 보면 침묵이 소음을 제압한 곳을 만나곤 합니다. 도심의 한밤중은 외진 곳이라 하더라도 괴기한 소음이 천형처럼 허공을 떠다니지만, 그런 곳은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주인이 되는 곳입니다. 상처 입어 피가 난 영혼에 각피가 생기는 곳입니다.
<느림보 마음>은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느린 마음' '느린 열애' '느린 닿음' '느린 걸음', 그러니까 시인 문태준은 '느림보'입니다. 한 해의 (새) 마음을 얻고자 '한난(寒蘭)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모습이 그렇고, 산란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매병과 연못을 만나러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시인이 쓰는 산문은 시어(詩語)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좀처럼 안 쓰는 어휘들-'오종종하게' '자글자글해' '고봉밥' '햇배' 등-과, 표현들-'잡초가 한 무릎씩 쑥쑥 올라오는' '하늘의 주민인 새' '손이 너무 늦은 매병' 등-이 즐비합니다.
저는 지금 책의 두 파트를 아껴두었습니다. 자주 툴툴거리는 마음에 기름칠을 하기 위해 아껴두었습니다. 그런 만용(?)으로 책 소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을 때에는 전체 내용 중 눈이 가는 글 편만 읽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구입하고 나서는 차례차례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스한 훈계 내려놓으시는 스승 모시듯이 매일 지니고 다니려 합니다. '너무 빠른 세상에 던지는 느린 생각'이라는 광고 문안처럼 저도 느리게 살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그렇게 나의 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 안 끼치도록 살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아니 아니 기약할 일이지요.
어느 뷔페 식당에서는 양고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저는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가 왜 안 먹느냐고 묻기에 "내가 양띠라서 안 먹는다"라는 궁색한 답변을 했습니다. 사실은 낯설어서 그런 것이지만, 대관령 양떼목장에서 순하고 조용한 양들을 만난 적이 있기도 해서 그들과 한참 어울리다 보면 여전히 그럴 것 같습니다.
▲ 십자고상.경북 왜관읍에 있는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 박태신
신과 인간이 소통하는 길, '침묵'
그러다 최근 계기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상영관이 뜸해 일부러 멀리 찾아가 본 영화 <위대한 침묵>과 관련된 신문 칼럼을 본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 칼럼은 <워낭소리>도 언급했습니다(서울신문, 2010. 1. 21일자 '문화마당' 참고). 그 칼럼의 필자는 <위대한 침묵>에서 침묵의 존재 당위성을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없음의 존재'인 인간이 '있음의 존재(神)'와 소통할" 길로 설명했습니다. <워낭소리>를 통해서는 '느림'의 가치를 찾았습니다. "'있음의 존재'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느림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에게도 세 시간 가까운, 대사가 거의 없는 침묵의 영화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더랬습니다. 자급자족의 노동을 하고 공동 종교예절을 지켜나가면서, 나머지 시간은 신과 대화하고 묵상하고 고뇌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감명 깊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에 종말이 와도 저 곳에는 오지 않았으면, 아니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침묵과 절제와 느림의 삶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에 종말이 와도 허둥대지 않을 것이고, 종말이 딱히 겁날 대상이 아닐 것 같기 때문입니다.
왠지 저라도 손님으로 그 곳 구석진 방 하나 얻어 한참을 머물다가 그런 와중에, 스피드 시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물적 서비스와 지적인 정보를 왕창 놓치더라도 그리 억울할 것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해 모은 돈과 절약해 놓은 시간을 통해 얻고자 하는 안식을 이곳의 수도사들은 굳이 돈을 모으고 시간을 절약하지 않더라도 바로 자신들이 선 자리에서 무상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참을 에둘러 가서도 결국은 잘 찾아내지 못하는 평온을 그들은 침묵과 느림으로써 쉽게 찾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도시인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정적(침묵), 느림(뒤처짐), 아무것도 하지 않기, 무소유 이런 것들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노트북을 두들기는 저 또한 그렇습니다. 펜으로 써내려가는 미덕을 많이 상실한 것도 그런 모습의 하나이겠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침묵> 중에는 한 수도사가 필기체로 천천히 펜글씨를 써내려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음이 없는 글쓰기 말입니다. 부산의 강은교 시인은 시작(詩作)할 때, '컴퓨터로 인해 잃어버린 말의 긴장도를 시험하기 위해' 1차적으로 연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 워낭‘안동민속박물관’ 내에 있는 워낭 전시물.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이어 단 방울. ⓒ 박태신
다시 울렸으면 하는 '워낭소리'
또 하나의 계기는 안동을 여행한 것입니다. 안동댐 근처에 위치한 '안동민속박물관' 관내를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동료들과 둘러보았는데, 그곳에 실제 크기의 초가집 모형이 있었고 그 모퉁이에 워낭이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친구 하나가 그걸 가리키며 '워낭'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사실은 이전에 전세버스의 짝꿍이었던 그 친구가 버스 안에서 영화 <워낭소리>를 보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저는 위의 그 어이없는 변명을 늘어놓았고요.
친구는 초가집에 대한 추억도 전해 주었습니다. 1년에 한번 마을사람들끼리 품앗이하며 서로의 집 지붕 위에 짚더미를 쌓아올려 겨울준비를 했더랬지요. 그 위로 비가 내려도 속에 빈 공간이 많은 초가지붕은 빗소리를 아련한 크기로 줄여 주었더랍니다. 잠을 잘 잘 수 있었고요. 그러던 것이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양철지붕으로 바뀌었는데, 비만 오면 양철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그렇게 시끄러울 수 없었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워낭소리> DVD를 빌려 보았습니다. 참 못 생긴 늙은 소와 부지런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등바등 싸우면서 정을 나누면서 사는 이야기였습니다. 뇌리에 가장 남는 것은 다리가 불편한 소가 끄는 달구지의 '느린 속도'였습니다. 마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비웃듯 반항이라도 하듯 느리게 더디게 갔습니다. 사실은 우리네 옛 본모습이지만요.
홀쭉한 몸으로 할아버지가 탄 달구지를 소는 매일매일 끌었습니다. 논으로 밭으로 심지어 읍내로까지 행차도 하는데 그 속도로 보아서 하루에 몇 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 같습니다. '못된' 주인을 만나 평생 일만 하다 가는 '일소'이지만 그 얼굴 표정에 싫은 표정 하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쉬는 시간 꼴을 베다 소에게 먹이면서 한없이 소를 바라다봅니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할머니보다 더 가까운 동반자였습니다.
영화 초반부터 이제 40살 된 무명씨(無名氏) 소는 노병(老病)으로 1년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소에 대한 사랑은 소가 먹으면 죽을까봐 논밭에 일체의 농약을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논밭에 농약을 뿌리면 자연 근처 풀에게까지 농약이 퍼질 것이고 그걸 먹는 소에게도 영향이 갈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농사일은 더디고, 기계를 일체 사용하지 않으니 심은 것을 거둘 때도 끝날 기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보기에도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그렇게 소와 할아버지, 할머니는 느리게 살았지만 그 느림으로도 9남매를 키워 도회지로 보냈습니다. 이런 게 기적이지 싶습니다.
▲ <느림보 마음> 표지.‘너무 빠른 세상에 던지는 문태준 시인의 느린 생각’이라는 문구와 앙증맞은 달팽이가 있다. ⓒ 마음의숲
서론이 길었네요. <위대한 침묵>은 '침묵'을, <워낭소리>는 '느림'의 메시지를 전해주었는데 의형제지간인 이 둘을 함께 담은 책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가 지금 스승처럼 대하고 있는 <느림보 마음>이라는 책이 그것입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이 책의 산문 한 편을 읽으며 가라앉히곤 합니다. 아직 훈련이 안 돼 글쓴이의 글 표현과 감성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말기도 하지만, 천방지축 날뛰는 '마음 가랑잎들' 위에 묵직한 바위 얹어놓는 듯한 효과는 분명히 얻습니다. 올 한해 책을 선물할 일이 있으면 이 책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책 속의 침묵과 느림과 안정이 퍼지길 바라면서요.
'시원하고 푸른 한 바가지 우물물 같은 휴식' 편을 때때로 묵상하듯 읽어보십시오. "마음이 쉬는 것이 참된 지혜"라 하면서 "거실이 한쪽에 소파를 두듯이" 삶에 휴식을 두라 합니다. "(마당뿐 아니라) 나의 마음에도 꽃밭을 가꾸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렇게 "내 삶의 리듬을 내가 유지할 필요가 있"다 합니다. 일부러 짬을 내 걱정하고, 정중하게 거절을 못 하는 소심쟁이들에게 단비 같은 말들입니다. 다른 글에 나오는 "뒷맛이 개운한 한가함"이라는 표현은 얼마나 멋진지요.
제 가슴을 치는 글 한 편이 또 있습니다. '움직이고 흘러가는 수레와 배와 물고기' 편에, "나는 나의 일로 인해 당신에게 피로가 생겨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내 본의엔 좋은 뜻이었다 하더라도 다른 이에게 생채기가 된다면 도로 거둘 일이지요. 그래서 "나는 빈 그릇에 담긴 물이었으면 합니다. 물이 빈 그릇에 담기더라도 빈 그릇을 상처내지 않는 것처럼" 되기를 소망해야 되겠지요.
▲ ‘완락재’안동 도산서원 내 도산서당의 방. 최근에 가본 도산서당은 말끔하게 보수되어 있었다. ⓒ 박태신
안동을 여행하면서 도산서원도 들렀습니다. 도산서원의 안방, 그러니까 퇴계 이황 선생이 기거하던 방의 이름이 '완락재(玩樂齋)'입니다.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락) 감상하여도(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하다'라는 주자의 말에서 따왔다 합니다. 경전이나 고전이 그러하겠고, 끊임없이 변하는 창밖 자연풍경이 그러하겠는데, 침묵의 세계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생 접해도 다 앎이 없을 깊은 내용이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전 발걸음 때에는 이곳 도산서당의 마루 '암서헌(巖栖軒)'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가끔 여행하다 보면 침묵이 소음을 제압한 곳을 만나곤 합니다. 도심의 한밤중은 외진 곳이라 하더라도 괴기한 소음이 천형처럼 허공을 떠다니지만, 그런 곳은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주인이 되는 곳입니다. 상처 입어 피가 난 영혼에 각피가 생기는 곳입니다.
<느림보 마음>은 네 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느린 마음' '느린 열애' '느린 닿음' '느린 걸음', 그러니까 시인 문태준은 '느림보'입니다. 한 해의 (새) 마음을 얻고자 '한난(寒蘭)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모습이 그렇고, 산란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매병과 연못을 만나러 다시 돌아가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시인이 쓰는 산문은 시어(詩語)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좀처럼 안 쓰는 어휘들-'오종종하게' '자글자글해' '고봉밥' '햇배' 등-과, 표현들-'잡초가 한 무릎씩 쑥쑥 올라오는' '하늘의 주민인 새' '손이 너무 늦은 매병' 등-이 즐비합니다.
▲ “오종종하게 앉은” 그루터기들.‘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 박태신
저는 지금 책의 두 파트를 아껴두었습니다. 자주 툴툴거리는 마음에 기름칠을 하기 위해 아껴두었습니다. 그런 만용(?)으로 책 소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렸을 때에는 전체 내용 중 눈이 가는 글 편만 읽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구입하고 나서는 차례차례 읽고 있습니다. 그렇게 따스한 훈계 내려놓으시는 스승 모시듯이 매일 지니고 다니려 합니다. '너무 빠른 세상에 던지는 느린 생각'이라는 광고 문안처럼 저도 느리게 살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그렇게 나의 일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 안 끼치도록 살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아니 아니 기약할 일이지요.
덧붙이는 글
<느림보 마음> / 문태준 / 마음의숲 / 2009-07-06 /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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