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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R이 추억의 물건이라고요?"

50대 중년의 아줌마도 펌프 위에서 뛰어봤다

등록|2010.02.03 12:00 수정|2010.02.03 12:00
1월 말 주말에 KBS오락프로그램인 <남자의 자격>을 보았다. '아날로그를 추억한다'는 것이 반갑기도 했다. 이경규씨와 거의 동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왕년에~ 왕년에~' 하는 소리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면서 보았다. 그날 혼자서 텔레비전을 봤기에 망정이지 혹시 아이들이 그 시간에 있었으면 이경규씨처럼 아이들에게 설명하고 싶어서 입을 움직거리다가 아이들에게 지청구를 맞았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다음날 어느 포털사이트 인터넷뉴스에 출연진들이 마냥 '왕년에~'만 외쳤다고 비판 글이 올라온 것을 보았다. 우리 어렸을 때 어른들의 '옛날에~ 옛날에~' 하는 옛날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던 시절도 있어서 그 '옛날' 소리나 그 '왕년' 소리나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옛날(왕년)의 물건에 눈을 반짝이며 보았다. 다만 '옛날이야기'에서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의 의견보다 보편적 가치가 내재된 이야기가 주 소재라면 '왕년에'는 이야기 당사자가 자기 이야기로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듣는 이에게 강요하는 것이 다르기는 하다.

해서 듣는 사람들이 '지겨워, 그만해, 그래서 어쩌라구' 하는 말을 뱉게도 한다. 추억은 함께 공유될 때만이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듣는 사람들은 고역이 되고 '왕년에'를 외치는 상대의 말에 추임새를 넣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행히(?) 그날 혼자 보면서 맘껏 추억의 물건에 몰입을 해 보았다.

석유풍로라고도 했던, 조리기구는 당시 아궁이 속 연탄불과 함께 부엌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지금 가스렌지 정도의 품격(?)이 있었다. 풍로는 사람들에게 '심지를 갈아주는' 직업을 갖게도 했다. 언젠가 불을 끈다고 심지를 돌려 내렸는데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어서 심지를 향해 훅하고 입김을 불었더니 불이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길이 위로 솟구치면서 천정 가까이까지 올라 하마터면 불낼 뻔 했던 적도 있다.

아무튼 혼자서 TV를 보며 연신 입 꼬리를 올리고 보는데 갑자기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얼토당토않은 기계가 추억의 물건이라고 떡하니 마당을 차지하고 화면으로 들어온다. 뭐 그것도 추억의 물건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어쨌든 십여 년 전에 유행하던 오락기계이니 그것도 나름 추억의 물건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시대별 추억의 물건을 나열하는 프로그램도 아닌데 조금 생뚱맞았다. 차라리 팽이 들고 들판으로 나가지.

어느새 추억의 기계가 된 DDR, 당시 대단한 돌풍

어쨌든 추억의 물건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그 펌프기계가 우리 집에 있다는 거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아날로그라고 하지만 내게는 디지털로 보이는, 지금은 애물단지처럼 장롱위에 얹혀 있는 펌프기계를 살 때가 생각났다.

DDR이라고도 하는 펌프는 약 십여 년 전쯤 우리 아이들 중학교 시절에 한창 유행하던 아이들의 운동기구였다. DDR과 펌프는 약간 다른 형태이기는 해도 쌍둥이 같은 기계다. 즉 같은 종류의 오락기계다. 문제는 그 운동기구가 오락실에 더 적합하게 만들어져서 아이들을 번질나게 오락실로 불러 들였다. 오락실 앞을 지나칠 때면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아이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내는 괴성이 마구 뒤엉켜서 개구리들이 논바닥에서 한꺼번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대단한 돌풍이었던 그 기계 위에서 뛰는 일에 특히 둘째 딸이  열광을 했다.

당시 중학교를 다니고 있던 둘째 딸은 참 열심히 놀았다. 학원을 가지 않았던 아이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오후 아이들 할머니께서 집에 오셨다가 가시게 돼서 지하철역까지 모셔다 드리기 위해 함께 나갔다.

펌프한 동안 뛰게 했던 펌프오락기, 다음 주인을 찾고 있는 중이다. ⓒ 박금옥


"아무개는 아직 학교에 있니?" "공부 열심히 하지?" "네 잘하고 있어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역 안에는 상가가 형성돼 있다. 그 한 쪽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오락실도 있었다. 오락실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는 분명 DDR이란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기계 위에서 스텝을 밟으며 뛰는 아이들 뒤로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엉켜서 오락실 안은 부연 먼지와 함께 꽤나 부산해 보였다.

오락실 안 문은 열려 있었다. 순간 묶은 머리가 위로 살짝살짝 솟구치는 모양이 많이 낯이 익다.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딸이다. 아마도 학교에서 사생대회 한다고 지하철을 타고 갔다 온 모양인데 끝나고 오면서 친구들하고 들른 것 같다. 딸은 그 위에서 정말 열중하며 재미있게 뛰고 있었다. 혹시 할머니가 보실까봐 얼른 오락실 앞을 지나쳤다. 노인의 노파심에 혀를 찰 일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나서 오락실 앞에 가 아직도 뛰고 있는 아이와 눈을 맞추니 뛰는 것을 멈추지 않고 배시시 웃는다. 제 차례를 마치고 기계에서 내려온 딸의 머리카락은 땀범벅이 되어 있다. "엄마, 조금만 더 놀고 갈게요." 그러고는 친구들과 섞여 버린다. 그만큼 DDR기계는 다른 오락기계와는 다른, 그나마 건전한 놀이기구에 속해 있었다.

"엄마, 우리도 펌프기계 사자." 이건 또 뭔 소리인가. 두 딸이 나를 공략하기 위해 나섰다. 펌프의 좋은 점과 그 좋은 점이 엄마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를 했다. 자기들은 오락실에 가지 않아서 좋고, 엄마도 운동할 수 있어서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고, 더구나 가정용 펌프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게 장판처럼 갰다 폈다 할 수도 있고, 가격도 우리가 살 수 있게 저렴하고, 더더구나 우리 집은 아파트 1층이니 마음 놓고 뛸 수도 있지 않겠냐는 거다. 가격대비 본전은 뽑을 것 같은 물건으로 보였다. 그렇게 아이들 성화에 샀다.

컴퓨터에 연결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거실에 펌프를 펼쳤다. 그때부터 한동안 아이들 코치에 따라 그 위에서 아이들과 함께 뛰었었다. 노래에 따라 스텝의 단계가 쉬운 것에서부터 난이도가 높은 것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어떤 노래도 소화를 하며 몇 번만 뛰어도 금방 최고 난이도까지도 섭렵이 되는데 나는 가장 쉬운 단계에서도 발이 꼬여 헤매기 일쑤였다. 컴퓨터에서 지시하는 화살표 순서대로 노래에 맞추어 열심히 밟아 댔지만 전혀 운동을 하는 느낌이 들지 않고 오히려 스텝이 꼬이니 스트레스만 받았다.

그렇게 몇 달 우리 집 거실에서 귀빈 대접을 받았던 펌프는 어느 날 슬그머니 거실 구석에서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가 드디어는 장롱 위로 올라가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버렸다. 아이들도 제 친구들과 함께 뛰는 맛에 그 위에 올랐다는 것을 깨닫고 집에서 하는 것에 흥미를 잃기도 했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펌프라는 기계 자체에서 관심을 거두어 버렸다. 그렇게 펌프라는 오락은 내게는 여전히 디지털인, 아이들에게는 아날로그인 놀이로 추억 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비록 우리에게는 추억의 물건이 되었지만, 아직은 오락실에 그 잔재를 남기고 있는 펌프를 다른 사람에게 대물림 하려고 주위를 물색해 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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