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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뉴스, '엄기영 사퇴 알맹이' 빠졌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는 쏙 빼놓은 KBS <뉴스9>... SBS와는 달라

등록|2010.02.09 09:56 수정|2010.02.09 09:56
다시 한 번 '열공했다'.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 신경민 기자의 보신각 타종 중계를 비판하는 클로징 멘트가 떠올랐다. 8일 밤, 엄기영 MBC 사장의 전격 사퇴 소식을 전하는 각 방송사 뉴스를 비교해보니 정말 그랬다.

현장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말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 8일 오전 엄기영 MBC 사장이 기자들에게 사퇴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엄기영 사장이 침통한 얼굴로 직접 사퇴 의사를 밝히는 뉴스 화면. 그 '화면의 사실'에서 '현장의 진실'과 가장 가까운 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를 위해 우선 각 방송사가 편집하기 전 '원본'을 돌려보자. <오마이뉴스> 동영상을 근거로 계산하니 42초 분량이다.

"방송문화진흥회, 오늘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저는 문화방송 사장 사퇴하겠습니다. 할 얘기는 많지만, 할 얘기는 많지만, 오늘은 여기서 접겠습니다."

사퇴하겠다고 하기 전까지가 '알맹이'다. 그들이 사장 노릇을 하려고 하니까, 방문진이 뭐 하는 곳인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란 말에는 허수아비 노릇을 못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니 사퇴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이는 엄 사장이 사내 인트라넷에 올린 고별사를 통해 재확인할 수 있다. 엄 사장은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책임 경영의 원칙은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인사권을 공공연히 유린당한 사장이 책임경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방문진 부분 '잘라 낸' MBC의 고뇌, 엄 사장 말 대부분 전한 SBS

▲ 8일 저녁 SBS <8시 뉴스> ⓒ SBS 보도화면


따라서 사퇴 이유가 담겨 있는 "도대체 무얼 하라는 건지…"가 핵심이다. 엄 사장의 사퇴를 밝히는 '현장의 진실'을 전하고자 한다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화면의 사실'이다. 그럼 방송 3사는 이 말을 어떻게 전달했는가. '당사자'라 할 수 있는 MBC <뉴스데스크>부터 살펴보자.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도대체 무얼 하라는 건지 … 저는 문화방송 사장 사퇴하겠습니다."

그 앞 부분 "방송문화진흥회, 오늘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는"을 '날렸다'. 자사 문제를 대하는 MBC 보도국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SBS <8시 뉴스>는 "엄기영 사장은 방문진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는 리포트와 함께 이렇게 보도했다.

"도대체 무얼 하라는 건지… 저는 문화방송 사장 사퇴하겠습니다."

엄 사장 말을 거의 모두 전한 셈이다. 그렇다면 KBS <뉴스9>가 선택한 '화면의 사실'은 어떠했을까. MBC·SBS 보도와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것도 이 대목에서다. 유독 "도대체 무얼 하라는 건지…"란 말을 싹둑 잘라냈다.

"저는 문화방송 사장 사퇴하겠습니다. 할 얘기는 많지만, 할 얘기는 많지만, 오늘은 여기서 접겠습니다."

현장의 진실에 가장 가까운 화면의 진실을 죽인 KBS

▲ 8일 오후 엄기영 사장이 후배들에게 MBC를 부탁한다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 독설닷컴


참으로 이상한 보도 아닌가. 고작 나중에 얘기하겠다는 '사족'을 살리려고, "도대체 무얼 하라는 건지…"란 말을 죽이는 선택을 했다. 방송뉴스 한 꼭지는 보통 1분 30초 내외, 시간에 쫓겨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편집상의 오류나 실수? 그렇게 보이지도 않는다.

이날 KBS와 SBS는 엄 사장 사퇴 소식을 각각 1분37초 보도했다. MBC는 1분46초로 가장 긴 시간을 내보냈다. 그 중에서 엄 사장의 말은 MBC가 16초 동안 전했고, KBS는 13초, SBS는 9초만 내보냈다. 방송뉴스에서 '4초'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을 허비하며 '알맹이'는 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현장의 진실'을 제대로 전하지 않으려는 '누군가'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기자의 자기검열인가, '윗선'의 코드 맞추기인가. KBS는 '도대체 무얼 하라고' 있는 방송인가. 바로 공영방송 아닌가.

엄기영 사장은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양보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그 소식을 전하는 '화면의 사실'에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양보하면 허수아비가 된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MBC가 지금 처한 위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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