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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는 우등생을 만들어 주나

웬수 같은 자식, 마녀 같은 엄마

등록|2010.02.11 17:27 수정|2010.02.11 17:27
한국 부모의 자식 걱정은 공부에 집중되어 있다. 공부 못하는 자식을 둔 부모는 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부모를 보며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한다. 아이가 공부만 잘해주면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 같다. 하지만 공부 잘하는 아이의 부모라고 해서 항상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혹시나 좀더 잘할 수 있는 것을 부모가 교육방법을 잘못 택해서 지금 수준밖에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영재 교육 한다는 사설 기관도 찾아다녀 보고 여러모로 아이의 능력을 더 키우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어차피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한국 부모의 걱정 근심은 '우리 아이가 좀더 공부 잘하기'라는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 외고에 있었을 때다. 옆자리 앉은 교사의 반에 인천에서 유학 온 아이가 있었다. 수업시간에 보면 공부에 의욕도 별로 없고 그저 그랬지만, 애가 인간성이 좋고 예의 바르며 착실해 보였다. 공부는 별로이나 착실한 아이 정도로 생각했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아이와 담임이 면담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옆에서 가만히 보자니 담임은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담임 얘기로는 참 아까운 애란다. 중학교 때는 인천에서 전교 수위권이었는데 외고에 와서 적응을 못해 성적이 곤두박질쳤고, 2학년이 된 지금은 본인도 거의 포기 상태라고 한다. 중학교 때 담임교사뿐만 아니라 수업 담당 교사들의 관심과 격려를 한몸에 받아 가면서 승승장구하던 아이가 외고에 와서는 반에서 30등이라는 충격적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담임교사나 수업 담당 교사들의 관심과 격려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도 평범한 아이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잘하는 아이들만 모였으니 30등이라 그래봐야 실제 성적 차이는 그다지 심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전체 교사의 관심과 기대를 받으면서 생활하다가 하루아침에 관심 밖의 아이로 전락해버린 상황을 극복하기에는 힘에 버거웠던 모양이다.

아이는 점차적으로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어 갔고, 그렇게 1년이란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덧 공부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 대신에 다른 방면(노래나 소설이나 악기나 연극이나 기타 등등)에 몰두하기라도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공부만 알고 살던 아이가 공부를 손에 놓고 나니 할 일도 별로 없고 다른 것들에 대한 의욕도 상실했던 것 같다. 그러니 생활에 역동성이나 활기도 사라지고, 아이는 그저 착실해 보이기는 하나 무기력한 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 차라리 외고에 오지 않고 인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갔더라면, 전 교직원의 관심을 받으며 '일류 대학'에 충분히 갔을 아이였는데 말이다. 

잘하는 애들끼리 모아 놓으면 더욱 실력이 향상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고등학교 입시를 부활시키고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그리고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잘하는 아이들만 모아 놓은 학교에 턱걸이로라도 들여보내려고 학원에다 과외에다 온통 난리를 친다.

물론 잘하는 아이들끼리 모아 놓으면 더욱 경쟁심이 강해져서 실력이 향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일부 아이에게만 한정된 추정(항상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에 불과하다. 반수 이상의 아이들은 오히려 교사들이 주는 관심과 배려의 대상에서 멀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교사의 긍정적 관심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기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오히려 많은 학생이 손해를 본다는 얘기다.

어디를 가든 학급 담임은 반에서 일, 이, 삼등 하는 애들에게 (공부에 관한 한)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반에서 상위권을 형성하는 몇 명을 빼놓은 나머지 다수는 담임교사와 수업 교사의 관심과 기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있다는 얘기다. 어찌어찌해서 성적 좋은 아이들만 모여 있는 명문고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최상위권 바깥으로 밀려난 대다수의 아이들은 교사의 관심과 기대라는 강력한 수단을 통해 자기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상대적으로 박탈당하고 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3년 동안 교사나 부모 그리고 자신에 의해 주어질 수 있는 긍정의 효과(관심과 기대)를 빼앗겨 버리기 때문에 오히려 실력 향상에서 손해를 볼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외고 안 보내고 일반학교 가서 반에서 일등하면서 교사들의 관심과 격려를 독차지하며 공부하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그게 외고 가서 반 10등 이후로 밀려나 교사의 무관심 속에 공부하는 것보다 학습효과라는 측면에서 보면 훨씬 더 유리한 선택일 것이다.

물론 '명문고' 다니는 자식을 두었다는 부모의 뿌듯함과 우월감은 맛볼 수 없겠지만 그것이 대학을 보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명문고'만 들어가면 아이의 실력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의 잠재적 가능성이 제대로 발휘 안 되는 상황에 빠질 확률이 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문고'는 '명문대' 입학 성적이 높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문고'를 열망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라.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잘하는 애들만 모아 왔으니 많이 들어가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중에는 일반고에 있었더라면 '일류 대학' 갈 학생이었는데 '명문고'에 와서 열등감에 빠지는 바람에 밀려버린 다수가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전에도 그랬다. K고가 S고보다 명문이었다. 즉 지극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K고 꼴등이 S고 1등보다 공부 잘했다는 소리다. 그런데 막상 3년이 지난 뒤 대학 시험을 치러보면 K고 꼴등은 떨어졌는데 S고 1등은 붙는다. 입학 때 순서대로 K고가 모두 독차지하고 남은 것을 S고가 차지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K고가 S고보다 많이 차지하긴 하지만, 입학 때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K고는 오히려 장사 실적(?)이 매년 시원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K고 하위권으로 갈 바에는 S고 상위권으로 가는 게 훨씬 현명한 선택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인간의 능력은 관심과 기대라는 긍정적 지지를 먹고 자란다. 공부 못하는 아이든 공부 잘하는 아이든 지속적으로 그 능력을 키워주는 데 있어서 주된 동력은 긍정적 격려와 관심의 양이다. 물론 잘하지도 못하는 것을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잘한다는 것이 반드시 절대적 기준에 따른 판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칭찬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못하는 아이지만 상대적으로 잘 하는 부분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언급하면서 긍정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야말로 무기력하게 잠자고 있는 아이의 능력을 일깨우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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