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폭력, 침묵 깨고 논쟁 시작하다
버마사랑작가모임, 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출판
▲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사무실에서 지난 5일 오후 7시에 열린 버마 시선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집' 출판기념회. ⓒ 최방식
"물결 일지 않는/ 재스민 향기가 넘치는/ 흠 없는 바다/ 사랑을 운반하는 것 외에/ 상륙하거나 급수한 적이 전혀 없는/ 무지개 보트/ 그 항구엔/ 미움도/ 전쟁도/ 한 때 획득하려 했던 진실도 없네/ 더 이상 진실에 대한/ 논쟁조차 없네."
-뚜카메이 라힝의 시 '항구' 중에서
"난 학생들의 지리책 속에서 읽고 있다/ ...난 무대 위의 벨벳 커튼과 액션 뒤에서 일어난 것들을 읽고 있다/ 나는 읽고 있다/ 아주 많이 읽고 있다/ 난 이런 일들을 말하려 애써왔지만/ 날 제발 용서해다오/ 어느 침묵하는 영혼처럼 다른 이들이/ 듣거나 알도록 하는데 무기력할 뿐이니."
-킨 아웅 에이의 시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중에서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이하 버마모임)이 독재정권에 신음하는 버마의 아픔을 노래한 시집 하나를 내놨다. 시비평가인 마웅 타 노에가 2008년 영어로 펴낸 '버마시선집'(Burmese Verse a Selection)을 버마모임의 임동확 회장(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이 우리말로 옮긴 것. 마웅 스완 이(필명, 본명 우 윈 뻬)가 영역한 작품 몇 개를 추가했다.
"진실은 없고, 제발 용서해다오"
▲ 국내 처음으로 출간된 버마 저항시 선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 최방식
출판기념회는 지난 5일 오후 7시 부천에 있는 민족민주동맹한국지부(NLD코리아, 아웅 마잉 스웨 의장) 사무실에서 NLD(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정치조직)코리아와 버마모임 회원, 그리고 내빈 등 3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조촐하게 열렸다.
모임에서 버마모임 회장이자 옮긴이인 임동확 시인은 "시의 번역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자괴감을 표현한 뒤, "하지만 양국, 그리고 작가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몸짓이라도 보여줘야겠기에 시작했다"며 "조금 낯설지만 문자나 부호 뒤에 숨겨진 버마인의 '말하는 침묵, 침묵하는 말'에 귀 기울여 달라"고 말했다.
임 시인은 이어 시 하나를 낭송했다. 고인이 된 '마웅 처 네' 시인의 '물고기'라는 작품인데, 그는 낭송에 앞서 "엄청난 반전의 시"라며 번역 중 받았을 진한 감동을 표현했다. 사실 '엄청난'이라는 단어는 작가(나같은 언론인에게도 마찬가지)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이니까.
"내 인생 전부/ 난 결코 한 마리 물고기도 잡아본 적 없다/ 그런데 보라구/ 내가 한 마리 잡았을 때/ 그건 거대한 우주 그 자체다/ 그 걸 끌어올리면서/ 내 낚싯대는/ 무지개처럼 휘어지고/ 이번에 내가/ 낚이고 만다."
문자 뒤 숨긴 '말하는 침묵'
▲ 버마 저항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출판기념회 참석자들. ⓒ 최방식
시집은 14명 시인의 작품 네다섯 개씩을 모은 것이다. 따킨 꼬더 마잉(Thakhin Kodaw Hmaing), 저지(Zowgyi), 민 뚜운(Min Thuwun), 다공 따야(Dagon Taya), 띤 모(Tin Moe), 마웅 스완 이(Maung Swan Yiy), 찌 아웅(Kyiy Aung), 꼬 레이(Ko Lay), 마웅 띤 카잉(Maung Thin Khaing), 조 삐인마나(Zaw Pyinmana), 마웅 처 네(Maung Chaw Nwe), 아웅 체임(Aung Cheimt), 뚜카메이 라힝(Thukhamein Hlaing), 킨 아웅 에이(Khin Aung Aye) 등이 그 주인공.
식민지 해방 공간에서 미얀마 민족문학을 이끌었던 시인들이며 몇 분은 이미 작고했다. 남은 대부분의 시인들도 고령이며 문단의 원로들이라고 한다. 킨 아웅 에이가 1956년생으로 가장 어린 정도. 이들은 식민지 압제, 그 뒤 이어진 군부독재에 신음하는 버마인들의 아픔을 작품에 표현했다.
먼저 식민지에서 해방,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문명의 이기와 파괴를 묘사한 따킨 꼬더 마잉(1876~1964)의 '오지의 결혼식'은 깊고 깊은 정글 속까지 파고든 개발과 환경·문화유산 파괴, 그리고 이어지는 아픔과 상처를 이렇게 표현했다.
"내 나라 오지에 지금껏 남아 있는 결혼식은/ 좋은 전통의 하나로 결코 사라지지 않는데요/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가 내게 외양간을 주었죠/... 아직 나의 오랜 거점이었던 거기 오지에 있었을 때/ 키 아저씨가 빚진 수백 짜트를 갚으란 요구에, 난 말했지/...잘생기고 포동포동하며 생기에 넘친 쌍둥이 수소들을/ 사원건설업자에게 넘겨버릴 테니/ ...그걸로 충분치 않거든.../ 마을 동쪽에 있는 농토를 팔아버리세요."
이어 독재정권의 폭정에 신음하던 후배 시인들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국이 압제자 손에 넘어가 아픔을 몸소 겪어야 했는데, 다시 어둠 속에 갇힌 사랑하는 조국을 보며 온 몸으로 흐느껴 운다. 말 한마디 글자 한 줄 잘못 썼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세상에서도 그들은 펜을 놓지 않았던 것.
"어둠의 베일이 걷히고, 너흰..."
▲ 시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 옮긴이 ⓒ 최방식
-다공 따야의 '불꺼진 밤' 중에서
"차창 곁에서/ 춤추면서, 왔다 갔다 하는/ 조지 인형은/...조지는 요술지팡이를 틀림없이 갖고 있긴 해/ 하지만... 스프링이 작동되어 왔다갔다 할뿐/ 춤출 때조차도, 거기에/ 꼭두각시 끈이 달려/ 차 밖을 벗어날 순 없지/ 아직도 부귀와 행운을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에 영광된 자리에 벌서며/ 거기에 매달려 춤춰야만 하는/ 그 팔자는 그 주인 팔자이기도 하지."
-띤 모의 '조지인형' 중에서
마침내 시인들은 분노를 폭발한다. 가슴 속 깊이 간직했왔던 호통이자 소소한 반역이다. 이른바 '말없는 침묵'보다 더 무서운 '침묵의 언어'들을 뿜어낸다. '탄쉐' 정권이 그토록 무서워한다는 '이심전심'을 노리며. '8888민중항쟁', '샤프란혁명'을 향해...
"산산이 부서진 벽돌들을/ 힘껏 잡아당겼을 때 그 속에서/ 아아 석상하나 튀어 나왔네/ 누구나 그걸 보면 순종케 하는/ ...어떤 독재자가 무엇 때문에 한 인간을/ 돌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을 범하는가?/ 그리고 얌전히 손바닥을 들어올린 채/ 무릎 꿇어 경배하게 하는가?/ 언제 그 자는 그의 자유를 얻을 것인가?"
-마웅 스완 이의 '역사학자의 한마디' 중에서
"난 홀로 갈망하네/ 12월이여, 하지만 위대한 네 하늘은/ ...칼로 난도질하고/ 창으로 찌르고/ 총질을 해대건만/ 12월이여, 너의 날들은 아직 푸르네/... 저리 가벼려다오!/ 12월이여, 그리고/ 네 위대한 하늘과 함께/ 네 모든 것과 함께 사라져다오/ 난 바로 내 그리움을 견디고 있을 테니!"
-꼬 레이의 '하얀 그리움' 중에서
덧붙이는 글
인터넷저널에도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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