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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갚아야 할 외상은 없는가?

기축년 세밑 단상

등록|2010.02.12 08:51 수정|2010.02.12 08:51
설을 앞두고 부모님이 걱정했던 일중의 하나가 밀린 외상을 갚는 일이었다. 한푼 두푼 쌓인 외상은 적지 않은 빚이었다. 그러나 그 빚을 두고 설을 맞이하는 법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잡화를 파는 점방의 외상도 가지가지였다. 아버지의 술값, 석유기름 한 되, 빨래 비누 몇 장, 검정 고무줄 몇 가닥 그리고 우리가 가져다 쓴 공책 몇 권, 또 우리가 먹은 유과, 비과에 '아메다마'라고 불렸던 눈깔사탕까지.

복잡할 것 없는 시절이었으니 하찮은 물건들의 가격을 공책에 적지 않아도 어머니는 갚아야할 돈을 정확하게 꿰었고, 아버지는 미안한 듯 막걸리며 소주 몇 잔 값을 보탰다.

점방 집 아들이 받으러 오기 전에 갚아야 한다고 어머니는 천환짜리 지전을 몇 장을 접어주면서 나를 보냈다. 돈을 갚으러 가는 길은 얼마나 신나던 일이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아파도 울지 않았다. 두 팔을 헬리콥터 날개 돌리듯 팔랑이며 달렸던 그 날의 일을 나는 꿈결인양 기억한다.

 그리고 설을 앞두고 부모님이 하신 일은 신세진 마을 분들에게 돼지고기 한 칼, 작은집 할아버지에게는 쇠고기 한 칼,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고등어 한 손이라도 나누었다고 기억한다.

상대적인 박탈감이 덜하던 시절이었지만 그 때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렇게 어려운 이웃에게 쌀 한 됫박을 나누는 너그러움을 실천했다.
 "이 집에는 이것 없제?"
묻어둔 무 몇 개를 들고 온 이웃, 먼저 떡을 했다며 맛보라고 아이 손에 보내 온 이웃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정겹다.

설날이 오기 전 설빔의 기억도 아련하다. 무명 바지만 입다가 '다우다'라고 했던 옷을 입고, 운동화를 얻어 신을 수 있는 기회도 그때였다. 부모님이 목포에서 사오신 옷이며 신발을 미리 방에서 입어보고 신어보며 좋아했던 모습은 지금도 사진처럼 기억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명절을 앞두고 나에게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야한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한해를 보내면서 나에게 허물이 없는지 반성하라는 말씀이었다고 본다.  담배는커녕 술 한 잔 잡수지 않음에도 마루 한쪽에 꼭 술병과 김치뿐인 술상일지라도 차려놓으라고 하셨던 것은 내 집에 오는 객들에 대한 배려였지 않았나 싶다.

삼촌들에게는 "세토는 망토여야 한다."면서 조금은 아는 듯 모르는 듯 손해보고 눈감아주는 것이 미리 내년 액땜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윷놀이나 민화투 판에서 악착스럽게 이기려하기보다는 져주는 모습을 보였던 삼촌들을 이해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군대 간 형들이나 삼촌들이 휴가를 나오면 동네 한 바퀴를 돌아 인사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면 할머니는 귀대하는 날을 물어 밥이라도 한 끼니 먹여 보내는 인정도 남아있었다.

귀대하는 형이나 삼촌을 동네 어귀까지 배웅하면서 꼬깃꼬깃한 백 원짜리 두어 장을 손에 쥐어주던 어른들의 모습도 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고향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상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해졌다. 하찮은 것이라도 나눌 이웃은 사라진 지 오래고 심지어는 이웃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산다. 휴가를 나온 아들은 작은아버지나 고모집에 겨우 들를 뿐이다.

용서할 이웃도 없고, 아량을 베풀 이웃도 상실한 지 오래다. 내 것, 내가 먹고 사는 도시, 이웃이 무엇을 먹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카드 한 장이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환승하는 시대. 명품이라는 단어가 외상보다 더 흔하게 쓰이는 시대. 빛깔 좋은 부드러운 과자들은 산처럼 쌓여있고 의복은 유명 회사 거라야만 한다고 입는 시대. 가까운 거리에 사는 동생도 일부러 약속하지 않는 한 우연히 만날 확률은 몇 십만 분의 일이 되어버린 시대. 자가용이 신발처럼 보급되고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외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시대. 그리고 이기지 않으면 죽는다고 가르치는 시대. 남녀 간에 쉽게 만나 쉽게 이별해도 흉이 되지 않는 시대.

경인년을 시작하는 설이 목전에 있다. 정치와 경제에서 잠시 벗어나 옛날을 생각한다. 내가 갚아야할 빚은 없는가? 내가 찾아봐야할 사람은 없는가? 그리고 지금 나는 과연 행복한가?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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