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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그막에 고국에서 맞는 첫 설이라 설렙니다"

경기도 파주 문산읍에 자리 잡은 사할린 교포들의 첫 명절

등록|2010.02.14 21:14 수정|2010.02.14 21:54
연어의 회귀 본능은 때로 경탄을 넘어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몸 속 어딘가에 아로새겨진 유전자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길은 때로 위험을 요구하고 목숨까지 담보로 해야 한다. 좁은 길·높은 길·막힌 길·돌아가는 길·천적이 기다리는 길. 몸을 막을 수는 있어도, 회귀의지 자체를 가로막을 수는 없다.

연어만큼 무모하진 않지만 인간의 뼈마디, 가슴 언저리에 새겨진 그것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오히려 한편으론 동식물의 그것보다 더 깊은 트라우마로 삶을 울려대기도 한다. 자신은 막상 가본 일도 없고, 유년기의 기억마저도 없는 선대의 고향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그렇다.

▲ 고국에서 첫 번째 설날을 맞게 된 사랄린 교포 2세들. ⓒ 나영준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나의 뿌리가 뻗은 곳을 찾아 노년을 정리하고 마지막 지친 몸을 눕히고 싶은 이들. 이러한 사연들은 인류 역사 곳곳에 또 다른 민족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한국에도 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그런 역사가 생겨났고 사할린 재외동포들이 그중 한 예다.

일제강점기 1939년에서 1943년까지 일본은 남사할린 탄광개발에 이른바 '국가체제총동원'이란 미명 아래 1만6000명 이상의 조선인 노무자를 이주시켰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후 사할린에 버려진 한인 동포들은 약 4만4000명으로 추산됐다. 일본인 부인과 결혼한 일부 한인들이 돌아왔을 뿐, 거의 모든 동포들은 그곳이 옛 소련 영토로 바뀌면서 고국에 돌아올 길이 막혀버렸다. 그 뒤 이들은 사할린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야 했고, 긴 시간이 지나 삶의 마지막 순간에야 고국을 밟을 수 있었다.

사할린 동포 2세대, 고국에서 보내는 첫 명절 "가슴이 설렌다"

"사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행복합니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의 한 영구임대 아파트. 작년 12월 3일, 48세대 98명의 사할린 동포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의 수는 3000여 명. 파주에 온 건 이들이 처음이다. 막 분양을 마친 20여 평의 아파트는 여러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말쑥하다.

▲ 고국으로 돌아온 사할린 교포들. ⓒ 경기도 적십자사


명절을 앞두고 사할린한인협회 회장인 권경석(69)씨의 집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다소 들떠 있다. 고국에서 맞는 첫 명절의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들이다. 대개 60대 후반인 이들은 이른바 2세대다. 희끗한 노년이지만 아버지들이 밟지 못한 고국 땅을 찾아 온 이들이다.

"러시아로 바뀌면서 국적 없이 1960~70년까지 살았지요. 다른 도시에 가자고 해도 여행허가증이 없어 가지 못하고 심지어 자녀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던 사람도 있어요."

모스크바의 대외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일했다는 권 회장을 비롯해 현지 여행사를 운영했던 이춘웅(68) 부회장 등 사할린 동포들은 나름대로 그곳에서 뿌리를 내린 이들이 많다. 또한 자녀들도 러시아에서 생활기반을 잡고 각자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이별을 한 셈. 그런 이유로 부부 간에도 의견이 달라 주저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고 입을 모은다.

"부모님들의 고향이니까요. 입버릇처럼 늘 고향, 고향 하시던 생전의 모습들이 결국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거죠."

고국에서 첫 겨울나기는 어땠을까? 이 부회장은 따뜻한 한국 날씨를 감안해 그곳에서 입던 두꺼운 겨울옷들을 모두 버리고 왔는데, 왠지 추운 날씨가 따라왔던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따뜻하게 맞아주는 고국이 있어 춥지만은 않았다고 전한다.

공항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이들. 가전기구와 생활물품, 음식물 등을 전해주던 적십자 등 여러 후원단체들. 깨끗하게 청소를 해주던 봉사단원들. 상상 이외로 따뜻하게 감싸주던 그들 모두 소중한 감사함이고, 잊을 수 없는 온기들이란다.

"상상도 못했습니다. 낯설고 쑥스러울 정도로 잘 해주셔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손발 멀쩡한 우리들이 이렇게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죠. 이번 설을 위한 떡도 전해 주셨죠.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남은 삶, 어떤 식으로든 고국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 반대하던 아내도 지금은 고국 귀향을 기뻐한다는 권경석 회장. ⓒ 나영준


앞으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이다. 70세 전후의 적지 않은 나이지만, 아직 건강하기에 일을 하고 싶은 욕구들이 크다고 한다. 하지만 기초수급생활 대상자들이기에 정규직을 얻을 수는 없는 상황. 건물 경비나 청소 등의 현실적인 일을 생각하기도 한단다.

"일도 일이지만 고국에 봉사를 해야 되겠죠. 보잘것없지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실력을 써 주셨으면 합니다. 고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욕구도 큽니다. 예를 들어 한국회사가 러시아에서 사업을 진행한다고 하면 통역이나 안내·자문 등을 해 드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각자가 러시아에서 일하던 분야와 경험이 있고, 각 지역마다 연고가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이춘웅 부회장은 농사전문가로서 러시아의 대규모 집단농장을 관리했던 경험을 살려서 식량 문제에 대비해 고국과 러시아에 진출한 기업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하고, 인무학 전 모스크바대 교수 역시 한국의 이효석·황순원·김동인의 문학작품을 러시아어로 번역했고 다른 한국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이처럼 하고 싶은 일들을 묻자 모두 목소리가 높아진다. 러시아에 있는 자녀들과 인터넷으로 화상통화를 즐길 만큼 첨단기기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들이 많기에, 하고 싶은 일도 욕구도 매우 높다.

"러시아에서 채소 장사를 하는 이들은 모두 한국인입니다. 쌓인 눈을 파내고 얼어 있는 땅을 깨 모종을 심고 식물을 키워내는 일은 부지런한 한국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며 놀라워합니다."

그렇게 힘들고 지난한 세월을 이기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 사할린 동포들에게 이번 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사할린한인협회 총무 함정자씨는 지금의 보금자리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고국에서 처음 맞는 설이 너무나 설렙니다. 갈 곳은 많지만(웃음), 고국에 돌아와 맞는 이번 설만큼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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