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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노을공주'를 보면 '사랑의 소망'이 이뤄진다"

[길을 걷다 만난 풍경 1] 채석강에서 만난 '노을공주'

등록|2010.02.14 13:08 수정|2010.02.15 15:26

▲ 한 달 보름여 전만 해도 해넘이 행사와 함께 새해인사를 건네며 떠들썩했던 격포 앞바다 전경. ⓒ 박주현



무작정 봄이 오는 소리를 찾아 나섰다. 핍진한 삶에 갇히거나 진부해지기 싫어서다. 그런데 산이 좋을까, 바다가 좋을까? 아무래도 산은 너무 조용해 켜켜한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할 것 같아 바다를 향했다. 파도에 물씬 쓸려오는 싱그러운 봄 내음도 함께 맡기 위해서다. 고속도로를 피해 한적한 주말 국도를 택했다.

전주에서 23번과 30번 국도를 번갈아 달리니 1시간도 채 안 돼 새만금 방조제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길다란 둑은 시퍼런 바다 한 가운데에서 표류하는 듯했다. 두 동강난 부안앞 바다는 거대한 인공 섬을 억지로 잉태한 듯, 방향을 좀처럼 종잡지 못한 채 갈팡댔다.      

새만금 방조제 시작 부분에 위치한 전시관을 막 벗어나자 시야에 들어오는 반가운 이정표 하나.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채석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한 달 보름여 전만 해도 새해인사를 건네며 떠들썩했던 해돋이와 해넘이 장소 아니던가. 그런데 설 연휴를 앞둔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롭다. 불과 1년 전과는 다르게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김제와 정읍, 부안 등 어느 방향에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채석강은 서울에서 약 280km 거리. 고속도로를 따라 대전과 논산을 지나 익산, 김제를 거쳐 호남고속도로에 버금가는 4차선 국도를 따라 달리면 3시간 30분가량 소요되는 거리다. 내겐 언제 다녀와도 또 가보고 싶던 곳이다. 나지막한 동산이 바다를 향해 펼쳐 놓은 1km 남짓한 습곡(해수욕장)하며 억겁을 거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에 눌린 단층들이 신비롭기만 하다.

억겁을 켜켜이 쌓은 단층들, 수 만권 책 쌓은 것처럼 '신비'

▲ 억겁을 거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에 눌린 단층들이 신비롭기만 하다. ⓒ 박주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301-1외' 주소지에 소재한 채석강은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된 면적 12만 7372㎡.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있는 이곳은 옛 수군의 근거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하의 격포진(格浦鎭)이 있었다.

지금도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과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바닷물에 침식돼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게다가 주변의 백사장, 맑은 물과 어울려 풍치가 더할 나위 없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당의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여름철에는 해수욕을 즐기기 좋고 빼어난 경관 때문에 사진 촬영이나 영화 촬영도 자주 이루어진다. 채석강에서 해수욕장 건너 백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붉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이 있다.

▲ 채석강 단층에 얼어 붙은 고드름도 겹겹이 무늬가 다르다. ⓒ 박주현



추운 겨울이 가시지 않은 절벽엔 고드름의 색과 모양이 다르고 머리엔 저마다 푸른 송림을 이고 있었다. 반면 바닥의 미끈한 암반 위엔 따가운 햇살이 만든 소금가루가 석영처럼 반짝거렸다. 밀물 때면 절벽 아래까지 물이 차고 썰물 때면 작은 해식동굴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 곳 두터운 적벽은 풍파에 씻기고 부서지면서 세로형 줄무늬를 만들었다.

부안군 문화관광 해설사에 따르면 "채석강은 원래 '살깨미'라고 불리었는데, 파도와 흐르는 물에 씻겨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은 것처럼 신비로운 절벽과 바다가 이루는 절경이 마치 중국 시성 이백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가 강물에 뜬 달 그림자를 잡으려다 물에 뛰어들었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노을공주를 본 사람들은 사랑의 소망이 이루어진다?"

▲ 사람인가? 봤더니 돌 조각...근데 누구? ⓒ 박주현



채석강 오른쪽에는 격포해수욕장이 연결되어 있다. 백사장이 500m 정도로 아주 작은 해수욕장이지만 조수간만의 차가 적고 물이 아주 맑은 것이 특징이다. 해수욕장을 끼고 도는 해안선은 오히려 해수욕장보다 한적하고 낙조를 바라보기에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채석강을 빠져 나오면 바로 격포항. 격포진이 있던 옛 수군의 근거지이다.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이후 새 등대와 방파제가 생기고 여객선이 보강됐다. 200명 이상 승선할 수 있는 250t급 여객선이 위도, 식도, 상왕등도, 거륜도 등을 수시로 오간다.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채석강과 적벽강은 이름에 얽힌 사연부터 찬란한 수사들로 가득하고 실제로 두 곳의 경관은 그 많은 수사들의 꾸밈에 전혀 부끄럽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거대한 암석들의 결, 거기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수한 시간들이 쌓여 있다. 그래서 늘 채석강과 적벽강의 수 만권 책들과 마주하면 오랜 시간을 읽은 듯한 뿌듯함이 가득하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겨울과 봄 사이의 채석강에서 켜켜한 시간을 털어낸 뿌듯함보다도 더 반가운 그녀(?)를 만났다. 채석강을 오른편으로 조선 8경 중 하나였던, 낙조를 볼 수 있는 '해맞이 채화대' 앞에서 바다를 향해 외로이 홀로 앉아 선 그녀의 이름은 바로 '노을공주'였다.


▲ "이곳에서 노을공주를 본 사람들은 사랑의 소망이 이루어진다.” ⓒ 박주현



"노을공주는 격포 앞바다의 석양빛이 진홍빛으로 물드는 날이면 은빛 비늘을 자랑하며 지는 해를 따라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곤 한다. 이곳에서 노을공주를 본 사람들은 사랑의 소망이 이루어진다."


▲ 아직 코끝이 시큰한 날씨인데도 연인들이 노을공주 앞바다에서 서성이고 있다. ⓒ 박주현



'노을공주' 라는 제목과 함께 새겨진 푯말 내용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사랑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지금도 많은 연인들이 이곳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억겁의 시간을 증거 하는 바위의 결, '노을공주'의 신비한 주술에 취한 듯 아직 코끝이 시큰한 날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오랜 시간의 무늬 앞에 서면 단애를 이룬 바위처럼 침묵이... 

▲ 아~ 노을공주가 이렇게... ⓒ 박주현



▲ 노을공주 앞에는 어느새 석양이... ⓒ 박주현



그래서인지 '노을공주' 주변의 바위들은 선이 분명해 보였다. 석양이 질 무렵 채석강 주변은 주홍 빛 와층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누워 있는 바위층 위에 또 바위층이 눕고 그렇게 수천만 번이 다시 반복이다. 그 쌓인 높이가 까마득히 높아 단애(斷崖)를 이루고 있다.

채석강의 나이를 최대 40억 살, 최저 6억 살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성층이 퇴적암이기 때문에 약 7000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란 게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 이른 아침, 채석강에서 바라본 격포해수욕장 전경. ⓒ 박주현



그러나 너무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운명 또한 편치 않듯, 채석강도 마찬가지. 너무 아름다워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이곳 마을 사람들은 말한다. 한 못된 관찰사가 이 곳에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부안 동진에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고 있을 무렵 특히 심했다고 한다.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골자는 이렇다.  

"못된 전라도 관찰사 부자는 부안을 자주 찾았고, 오면 수려한 경관을 보기 위해 채석강에 들렀다. 그들이 올 때마다 산해진미를 차려내야 하고, 기생을 붙여 침소를 마련해야 했다. 주민들에겐 곤욕이었다. 참다못한 격포 주민들이 '이놈의 채석강 때문에 우리가 죽어난다'며 채석강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단애 몇 군데를 부숴 버렸다."

그렇게 채석강의 가장 이름난 단애들 몇은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채석강의 암석층은 늘 붉은 빛을 띤다. 지금은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접근 금지' 표시를 해놓고 있다. 채석강과 적벽강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의 흔적이 쌓여 있다. 또 바다에 목숨을 맡긴 뱃사람들의 간절한 바람도 묻혀 있다.

▲ 단애를 이룬 바위 틈에선 봄을 가득 담은 파도만이 포말로 부서지며 침묵을 깨곤 한다. ⓒ 박주현



파도에 씻겨나간 단애는 또한 유독 심하게 몰아치고 복잡하게 엉키는 조류의 직접적인 흔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오래된 시간의 무늬 앞에 서면 단애를 이룬 바위들처럼 금세 침묵이 내려앉는다. 봄을 가득 담은 파도만이 포말로 부서지며 침묵을 깨곤 한다.

"쏴아아~, 철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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