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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오지 않는 철길 위를 산책하다

기차 대신 자전거 타고 찾아간 교외선 일영역

등록|2010.02.17 18:04 수정|2010.02.17 21:54

▲ 국도를 달리다가 이런 정감어린 건널목이 보이면 이어진 동네를 꼭 들리게 됩니다. ⓒ 김종성



교외선 기차라는 말은 이젠 사라져 버려 애틋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고, 연인과의 다정했던 어느 주말 나들이의 그리움을 모락모락 피워 오르게도 합니다. 같은 기차지만 경춘선이나 중앙선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교외라는 낱말에서 벌써 도시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떠나는 듯한 여행의 감흥이 제대로 들지요.

일영역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간이역으로 서울역과 신촌을 거쳐 벽제, 송추를 지나 의정부까지 오가던 교외선 기차역 중의 하나입니다. 저도 이십대의 젊은 시절에 사랑하는 연인과 이 교외선 기차를 타고 일영역이나 장흥역, 송추역에 내려 유원지와 물가에서 손을 꼭 잡고 데이트를 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나네요.

기차역이니 당연히 기차를 타고 찾아가면 좋겠지만 교외선의 다른 기차역들처럼 일영역도 간간히 지나가는 화물열차외에 더 이상 기차가 서거나 다니지 않기에, 애마 자전거를 타고 사랑했던 사람과의 풋풋한 추억같은 간이역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 수도권 전철 3호선 지축역에서 내려 교외선 간이역 일영역을 향해 국도와 마을을 오가며 달려 갑니다. ⓒ 김종성


▲ 간이역 가는길에 만난 공릉천에는 한겨울에도 오리와 백로들이 노닐고 있네요. ⓒ 김종성


옆길로 새는 의외의 즐거움이 있는 간이역 가는 길

수도권 전철 3호선을 타고 지축역에서 내려 일영역을 향해 가는 371번 국도를 달립니다. 차들만 쌩쌩 오가는 차가운 국도를 조금 달리다보면 겨울 철새 오리들과 백로가 함께 노니는 눈쌓인 공릉천을 만나게 됩니다. 국도보다 속도는 현저히 느리지만 하천길을 따라 휘돌아 달려 가 보니 노고산 자락의 겨울 풍경도 좋고 작은 소읍같은 마을들을 여행하는 의외의 즐거움이 있네요.

하천길이나 국도변에서 인근 동네로 통하는 작은 초입길을 많이 만나는데 괜히 끌리는 동네가 있다면 잠시 옆길로 새보기도 합니다. 동네 입구에 왠 튼실하게 생긴 닭들이 돌아다니거나, 빨강 무늬의 길다란 막대가 서 있는 정감어린 기차 건널목이 있는 동네가 그런 곳이지요.

어떤 동네는 길가에 '천생연분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다 세워져 있어서 어떤 마을일까 궁금함에 못이겨 찾아가 보기도 했답니다. 차를 타고 도로를 휙 지나쳤다면 못 보았을 동네인데 자전거 여행은 이렇게 소소한 풍경을 놓치지 않고 삼천포로 빠지는 맛이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 서울에서 서민들을 괴롭히던 야만적인 악습은 이 동네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 김종성



▲ 대부분의 주민들이 쫓겨날 동네의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승들은 저같은 외지인에게도 환영의 큰웃음을 짓고 있네요. ⓒ 김종성


간이역의 운명처럼 재개발로 사라지고 있는 동네

서울 은평구 은평 뉴타운이 가까운 일영역 부근의 마을에도 재개발이 진행 중인지 길가에 띄엄띄엄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토박이 주민들을 내쫗는 불행 도시 양주?' '우리는 고향에서 계속 살고 싶다' 등의 다양한 문구가 써진 현수막들이 도로변에 차례로 나타납니다. 재개발은 서울에서도 수많은 서민들을 그렇게 괴롭히고 쫓아내더니 그 못된 악습은 허술한 법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 경기도 양주시에도 그대도 재현되고 있습니다.

요즘 TV와 신문에서 서민들의 낮은 투표율의 원인을 분석하는 방송과 기사들을 보았는데, 저는 이 십수년이 넘게 반복되고 있는 재개발 와중의 악습도 아주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기억에 현재뿐만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에도 경기부양이라는 미명하에 재개발 지역의 서민들을 대책없이 내쫗고 비싼 아파트만 짓는 사업은 방치되고 권장되었지요. 그런 일을 보거나 직접 겪은 다수의 세입자 서민들과 그 아이들은 당연히 자기편에 열심히 투표해 보았자 헛짓이라는 정치 혐오감만 삶속에서 경험적으로 뼛속깊이 체득하게 된 것입니다.

몇 년 전 지금의 은평 뉴타운이 된 서울 구파발 주변의 동네에 자전거 타고 찾아가기도 했었습니다. 세입자가 대부분인 동네 주민들이 살던 집이 철거되면 이제 어디로 가야하나 걱정하던 모습과 천진난만하게 골목에서 뛰놀던 어린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재개발 지역 주민들의 공통되는 요구였던 이주택지 좀 지어달라는 아우성을 모른척 하던 다수당이자 여당이었던 열린 우리당을 무척 원망하기도 했었지요([사진] 서울특별시 '올드 타운' 기행, [사진] 뉴타운? 우린 '한양주택'이 좋소)

88올림픽 이래로 계속되는 재개발에서 벌어지는 이런 야만적인 악습을 그만 멈추고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 서민들을 위한 저렴한 임대주택을 늘리는 등 주거안정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지 않고 오로지 내쫗고 철거하고 비싼 아파트들만 짓게 놔둔다면, 선거때 투표해 봐야 '그놈이 그놈' 이라는 동네 할아버지의 경험어린 격언(?)은 서민들 사이에 계속 유효할것입니다.

▲ 일영역 앞의 큰 마당에는 북적이던 시절을 회상하게 하듯 슬레이트 지붕을 한 이채로운 야외 대합실이 남아 있답니다. ⓒ 김종성



▲ 간이역을 홀로 지키는 나이 지긋한 역장님이 사진도 찍어주셨는데 눈쌓인 호젓한 철길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네요. ⓒ 김종성


집들과 골목길 속에 둥지를 튼 교외선 간이역

일영역이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지만 다른 교외선 기차역들처럼 일영역을 알리는 표지판은 따로 없습니다.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주민분에게 물어보니 간이역을 찾는 저 같은 사람이 종종 오는지 잘 알려주시네요. 역 바로 앞에 삼상초등학교가 있어서 찾기가 쉽습니다. 교외선 기차역들은 저마다 어쩌면 그리 동네 가옥들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 끝에 조용히도 둥지를 틀고 있는 건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네요.

M.T 온 젊은 청춘들로 시끄러웠을것 같은 역 앞 마당의 넓은 야외 대합실을 지나 일영역 역사 대합실에 들어갑니다. 슬레이트 지붕을 한 이런 이채로운 야외 대합실은 다른 교외선 기차역인 송추역에서도 보았었는데 교외선 기차역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운치였습니다.

대합실안의 기차 노선판에는 추억의 통일호 시간표와 운임이 아직도 써 있고 그 위로 2004년 운행을 중지했다는 안내 종이가 붙어 있네요. 대합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괘종시계도 그때부터 시간이 멈추었겠지요.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는다지만 대합실은 물론 개찰구도 있고 간이역 건물도 멀쩡하여 잘보니 백발이 성성한 직원분이 홀로 역을 지키고 계시네요. 교외선 기차역 중 일영역만이 유일하게 역무원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보면 서정적인 분위기가 나고 가까이에 다가가 보면 쓸쓸하기도 한 간이역 일영역을 혼자 지키는 나이 지긋한 역장님, 그리고 열려있는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 철길 옆에 서서 더이상 오지 않는다는 기차를 기다리는 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에 출현한 것 같았습니다.

일영역을 지키는 또 다른 것이 주변에 있었는데 '교외선 식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가게입니다. 한때 번성했던 시절을 증언이라도 하듯 그때의 다른 가게들은 다 사라졌지만 교외선 식당만은 용케도 남아 있네요. 공릉천가의 작은 야외 수영장과 함께 인근에 유원지들도 아직 있구요.

▲ 닭들이 무슨 동네 경비견 마냥 어느 집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네요. ⓒ 김종성


저멀리 동네 주민인 듯한 분이 다음역인 장흥역 방면의 철길 위로 혼자서 하염없이 걷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 모습이 조금 처연하기도 했지만 왠지 분위기 있어 보여 저도 애마를 잠시 묶어두고 철길 위를 걸어봅니다.

양팔을 벌려 한쪽 철로에만 외다리로 서보기도 하고, 철로 사이에 푹신하게 쌓인 눈을 쿠션인듯 밟아보기도 합니다. 기차도 오지 않는 철길을 걷는 것은 더군다나 쓸쓸할 것 같았는데 직접 걸어보니 운치도 있고 사색에 빠지기도 좋은 산책길이네요.

한때 유원지에 놀러온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간이역엔 더이상 기차가 서지 않고 간이역을 품은 주변 동네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겠지만, 철길만은 그 시절의 추억과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겠다는 듯 변함없는 모습으로 굿굿하게 펼쳐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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