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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가 아니랍니다"

의무경찰 복무한 아들의 메모장에서 발견한 격동의 현장

등록|2010.02.19 17:19 수정|2010.02.19 17:19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반듯하게 줄서는 것이며 반동자세도 서툴렀지만 가족과 헤어짐을 참고 견뎌내며, 논산훈련소까지 함께 온 입영가족들 앞에서 힘차게 불렀던 '진짜 사나이'. 그 군가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는데 아들 녀석이 의무경찰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을 했다.

2008년 3월 입대한 아들은 대한민국 격동의 현장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들은 복무기간 중에 쓴 메모에서 국민으로, 대학생으로, 의무경찰로서 느꼈던 것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담았다.

광화문 막은 명박산성, 의경도 놀랐다

▲ 미국산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 촉구 및 국민무시 이명박 정권 심판 100만 촛불대행진이 2008년 6월 10일 저녁 서울 세종로네거리, 태평로, 청계광장을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가득 채운 가운데 세종로네거리 청와대 방향이 경찰이 설치한 컨테이너 바리케이드로 막혀 있다. ⓒ 권우성


'6월, 수목이 푸른 빛을 더해가고 매미가 울어대는 여름의 문턱 앞에서 우리 방범 순찰대는 일주일 동안 광주를 떠나 서울에 가있었다. 버스 안에 매트리스와 각종 숙영 때 필요한 짐을 싣고 서울로 올라갈 때는 마치 여행가는 것처럼 들뜬 기분도 있었다. 도착해서 종암경찰서에 숙영 짐을 풀고 서울 곳곳을 돌아다닐 때까지만 해도 매 근무가 새롭고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효자동, 미군기지, 광화문 등 어지간한 서울 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규모와 충돌 강도가 커져만 갔고, 우리도 긴장감과 초초함이 더해졌다. 마침내 7박 8일, 첫 서울 숙영의 마지막 날, 하이라이트는 광화문 근무였다.

6.10 전국 촛불시위. 아침 일찍 도착했을 때 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광화문 충무공 동상 뒤로 몇 백대를 방불케 하는 견고한 차벽과 그 앞에 마치 만리장성처럼 높아 보이는 거대 컨테이너 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꼭 요새 같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곧 오늘 밤에 어마어마한 충돌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밤이 되고 수십만 촛불이 광화문 거리를 메우고 건물이 떠나가도록 시민들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그러나 몇몇 돌발행동을 제외하고는 평화시위로 진행되었으며 차벽 뒤에서 모기와 배고픔, 잠과 싸우는 우리 대원들에게 시민들은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각종 간식들, 담배를 차벽 너머로 던져주었다.

비록 벽을 앞에 두고 갈라져 있지만 마음은 하나이기에 배고프고 피곤해도 촛불이 꺼지는 아침까지 우리 대원들도 긴장감 속에서 시민들을 조용히 응원했다. 광주로 내려오는 길, 지친 몸이지만 마음은 지난 밤 촛불처럼 따뜻했다.'
- 2008년 6월 아들의 메모

하지만 '화물연대 파업' 현장과 '용산참사' 현장 출동에서는 긴장도 했단다. 또 힘들 때는 의경의 본분으로 돌아가 과격한 시위자는 적(?)으로 보이기도 했단다.

'서울 지원 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시작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날부터 약 9일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우리는 기아공장, 삼성공장, 광주 내 파업시위가 일어나는 모든 곳으로 출동했다. 평화스런 촛불시위와 달리 화물연대 시위는 직접 몸으로 부딪쳤다. 물건을 나르는 화물차를 막기 위해 도로로 뛰어드는 시위대를 저지하기도 하고, 공장 정문 앞에 앉아 농성하는 시위대를 해산시키기도 하고, 갑자기 방어선을 돌파해 들어오는 시위대와 힘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매번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항상 긴장했고, 신경도 예민했었다.'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국민으로서 당연한 의무인 국방의 의무를 아들은 수행하면서 그 의무가 정권을 유지하는 데 동원될 때는 한탄스럽고 갈등도 많았던 것 같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서울에서의 심정을 아들은 이렇게 적었다.

정권의 개라고요? 저도 거기 있고 싶었어요

▲ 2009년 5월 24일 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앞에서 촛불을 든 한 추모객이 서울광장을 원천봉쇄한 경찰들앞에 서 있다. ⓒ 권우성


'바로 그날 밤 덕수궁 고 노 대통령 분향소에서 근무를 섰다. 사람들이 모두 욕했다. 이 대통령의 개라고. 국민이 무섭지 않느냐고... 난 개가 아니랍니다. 그리고 나도 국민이고 충분히 슬프답니다.

그 다음 날 근무는 경복궁.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있었다. 어마어마한 인파에 대처하기위해 철통경비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런 엄숙한 분위기에서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미 없이 그저 사람들이 근처에 얼씬 못하게 할 뿐. 정말 의미 없는 근무였다. 나도 같이 그 인파 속에서 그 분을 보내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지금의 내가, 지금의 시대가 싫을 뿐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몇 줄 짧은 글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했지만 우리가 신세를 졌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고 하셨는데 그분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 큽니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하셨지만 우리가 기꺼이 나눠드려야 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오늘은 좀 슬퍼해야겠습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심장이 뛸 때마다 잊지 않겠습니다. 미안해하지 말라 하셨는데, 오늘 좀 미안해야겠습니다. 지켜드리지 못했으니까.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스스로를 원망하면서 남은 큰 짐은 우리가 운명으로 안고 반드시 이뤄 나가겠습니다. 운명이라 하셨는데 이 운명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작은 비석을 하나 세워달라고 하셨는데 가슴 속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큰 비석 하나를 세우겠습니다.'

또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에서는 불안했던 마음도 숨기지 않았다.

'평택공장 점령사태는 정말 위험했다. 공장 위에서 경찰과 회사 관계자들을 노려보는 시위대들은 차량을 만드는 너트를 새총으로 날려대면서 우리를 위협했고, 공장안에 연기와 불을 피우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몰아갔다. 접근할 수 없는 경찰은 특공대를 이용, 매번 공장옥상에 최루가스를 뿌리고 회사관계자들은 계속 경고방송을 하였다.

의경과 경찰들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모든 것을 차단하였고, 시위대들을 지원하러 온 여러 노조와 시민단체의 출입을 막았다. 그들과의 충돌은 빈번했고, 물대포와 전의경의 방패로 민주노총 몇 백 명이 찾아왔을 때도 공장 밖으로 강하게 밀어냈다. 나는 고속도로에서 공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와 공장 근처에서 민주노총 노조원들을 밀어내고 감시하는 근무를 주로 섰다. 이렇게 큰 장소에서 큰 부상을 염려해두고 근무했던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의무경찰로 근무하면서 교통정리, 방범순찰, 행사장 질서유지 등 보람도 있었지만 시민들의 놀림거리가 될 때는 속상했던 기억도 적었다.

'청와대로 진입하지 못한 시위대가 종로와 을지로, 충무로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는 지원을 나갔고, 가는 길에서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진압복과 방패, 헬멧을 쓰고 내리자마자 바로 저 멀리 보이는 시위대와 붙었다. 밀리고 밀치고, 욕하고, 돌 던지고, 촛불로 위협하고 멀리서 지켜보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내가 직접 부딪치고 욕(개 짖는 소리하고 있네, 온갖 쌍욕들, 경찰도 구호를 외쳐라. 경찰도 청와대 가자. 너네 언제 짭새에서 경찰될래? 너네들이 지금 잘하고 있는 줄 알아, 멍청한 것들...)도 많이 들었다.'

시민 막아서는 의경, 그들도 고민 많아요

그리고 뉴스에도 보도됐던 황당한 사건의 현장에도 있었다.

'관내에 있는 한나라당 당사를 경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구 도청까지 행진해가는 시위대에서 초등학생들이 물총을 들고 나와 우리 대원들을 겨누었다. 우리는 아이들이라 방심했으나 물총에선 나온 건 다름 아닌 먹물이었다. 온 몸에 먹물 세례를 받고 나서 난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의경이 무슨 죄가 있어 온 국민이 미워하고 이런 어린 아이들까지 우릴 놀리는 걸까.
놀란 마음은 곧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다. 무엇을 하고 있고, 우리가 하는 일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6월부터 시작된 이 혼란은 여름 내내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어놓았다.'

며칠 전 경찰서에서 찾아온 전역증에는 의무경찰 '수경'이 아닌 대한민국 육군 병장이라고 되어 있었다. 국방의무를 마치면서 아들 녀석은 메모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군복무 때 '적'이란 존재는 흔히 북한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국토와 안녕을 위협하는 자들이며 이들에겐 쉽게 적대감이 들고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생각은 충성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의경은 질서를 위협하는 자가 '적'이다. 그러나 그 적은 전에는 우리가 지켜왔던 시민이며 즉 아군이다. 그들의 이해관계로 질서를 위협하면 그게 우리 입장에선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시민들이 정부와는 반대 입장으로 우리에게 맞설 때는 그게 과연 적인가 싶다. 경찰을 비롯한 의경은 정부의 소속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시민들이 반대하고 그들이 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닌데도 그들을 무조건 막아야 할 때는 회의감이 들기도 하고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대다수는 이겨내고 근무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의경을 와서 많은 고민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군복무는 남자의 인생에서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이며 그만한 재산이 없다.'

군복무 내내 시위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가슴 졸였지만 의젓한 진짜사나이가 된 아들 녀석의 제대를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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