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오마이갓뉴스'가 아니란다
[내가 쓰는 10주년 기념사③] 10살 소년이 멋진 청년 되는 날까지 파이팅!
시계를 보니 딱 28시간 남았다. <오마이뉴스>에 '오'도 알기 전인 내게 '창간 10주년 기념사'라는 원고를 마무리 지어야 하는 시간이 말이다. 또 다른 마감에 허덕이고 있는 직장인에게 이렇게 촉박한 시간을 주며 기사 청탁을 하는데도, '찍' 소리 않고 "하하" 웃으며 "알겠다"고, 전화통화라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는 걸 보면, 나 어지간히도 <오마이뉴스>를 사랑하고 있는가보다.
그러나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가 과연 정상적으로 원고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기록으로 보는 오마이뉴스 10년>으로 오마이뉴스가 '콩콩' 발자국 찍어놓은 길을 따라가 보았다. 차례차례 보고 있으려니, 나는 과연 <오마이뉴스>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와 나, 그 사랑의 시작
내가 <오마이뉴스>를 알게 된 것은 2007년이 시작되고 있던 즈음이었다. 우연히 PD수첩 <시사저널 사태>를 보며 분노하게 되었을 때, 그때였다. 당시 어느 복지단체에서 발행하는 잡지기자였던 나는 시사저널과 관련된 사람들이 쓴 <기자로 산다는 것>을 출간되자마자 사 읽고는 나름 꽤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주로 이런 고민이었다. 나는 정의가 끝끝내 승리할 것을 믿으며, 돈보다 진실이 더 귀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안다. 하지만 승리하기 전까지 정의는 왜 허겁지겁 돈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걸까. 마치 막장 드라마들처럼 정의는 16부 후반까지 계속 억울하다가, 종영되기 10분 전에서야 겨우 기쁨을 만끽하는 것. 난 항상 그게 불만이었다.
그때 본 기사가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서명숙 기자님이 직접 쓴 글이었다. 물론 전에도 <오마이뉴스> 기사를 수차례 봤지만, 유심히 보게 된 것은 그때였던 것 같다.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사람이 편집국장을 했던 매체라니, 이후에도 서명숙이라는 이름은 제주올레로, 또 그곳에서 끊임없이 늙지 않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으로, 계속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루에 열두 번? 뻔질나게 드나드네
본격적으로 <오마이뉴스>를 제 집 드나들듯 한 것은 재작년 뜨거웠던 촛불집회 때부터이다. 나는 당시 퇴근을 하면 곧장 룸메이트와 함께 광화문으로 달려가곤 했다. 초저녁잠이 매우 많은 내가 다음날 출근 부담을 안고서도 그곳을 향한 이유는 그냥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더니 애가 이상해졌다며 자나 깨나 큰딸 걱정인 'TK' 출신 울 엄마는 "조용히 집에서 촛불 켜놓고 혼자 집회하라"며 매일같이 전화를 해댔다. 서울로 오기 전 'TK'에 있을 때도 역시 이랬던 게 분명한 나는, 내가 아무리 콩알만 하게 작아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한 명'의 국민으로 보태질 의무를 놓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날 기회, 쌈짓돈으로 산 김밥을 전경들에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가슴 뜨거운 장면을 직접 볼 기회 역시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오마이뉴스>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내가 직접 목격한 장면을 가장 현실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나 물대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내 사진이 실려 있진 않을까, 나름 기대하며 찾아보는 것도 사실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열살 사춘기 소년이여, 더 잘 자라다오
매일같이 들락거리면서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내가 기자로 이곳에 동참할 시간을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턱대고 아프리카 여행 기획안을 편집부로 보냈던 것이나, 내 기사에도 원고료가 나온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나 알았던 사실, 뭐 이런 것은 내가 아직까지도 <오마이뉴스>를 알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는 <오마이뉴스>는 신선하다. 그리고 영향력도 엄청나다. 아프리카 여행기 중 하나였던 '소똥,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사 때문에 '니콜키드박'(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 내가 나에게 지어준 별명이다)은 네이버 검색어가 됐을 정도였다. 이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워크숍에 가서 들었던 일들도 참 신선했다.
오마이뉴스 기사로 인해 오래되고 낡고 불편했던 관습이 순식간에 시정되었다는 일들도 꽤나 많았다. 노원구청 아기 호랑이 사건 역시 <오마이뉴스>의 영향력이다. 나 역시도 얼마 전에 난 김용철 변호사 인터뷰 기사를 읽자마자 <삼성을 생각한다>를 구입해 열독했을 정도니까.
그런 반면,
"너의 글은 '오마이갓뉴스'에서 잘 읽고 있어."
친구에게서 온 문자 때문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누구에게 <오마이뉴스>는 케케묵은 제도를 바꿀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매체로 다가오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오마이'보다 '오마이갓'으로 불릴 만큼 생소한 매체라는 사실 또한 신선한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나 다 알려진 매체, 감춰진 속셈 따위도 그대로 드러나 너덜너덜해진, 그래서 거는 기대나 희망조차도 없는 매체보다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게 많은 게 <오마이뉴스>다. 이런 <오마이뉴스>는 꼭 이른 사춘기가 찾아온 열 살 소년 같다. 여드름도 '송송' 나 있는 소년에겐 걸어봄 직한 희망이 있다. 앞으로 자랄 일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자! 말(言)이 곧 자기(己)가 되는 이들이 기자(記者)라고 했다. 자신의 글이 곧 자신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의 슬로건은 더욱 근사하다. 모든 시민이 '말과 행동에 어긋남 없이 일치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갖고 싶었던 이름을 내게 선물로 준 <오마이뉴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공사 사장님이나 진중권 교수님처럼 기하급수적인 조회수를 올려주지 못하는 나를 포함한 평범한 소시민 62000여 명에게 멋진 기자직을 허락해준 <오마이뉴스>, 그의 열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내가 그에게 줄 생일 선물로는, 마감 시간을 여섯 시간이나 앞당겨 보내는 지금 이 원고와, '나'와 또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제대로, 올바로 전달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더 진실 되게 쓰고자 하는 나의 기자된 마음이다.
글. 니콜키드박
그러나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가 과연 정상적으로 원고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기록으로 보는 오마이뉴스 10년>으로 오마이뉴스가 '콩콩' 발자국 찍어놓은 길을 따라가 보았다. 차례차례 보고 있으려니, 나는 과연 <오마이뉴스>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와 나, 그 사랑의 시작
▲ '삼성 관련기사 삭제' 이후 편집권 독립을 위해 싸워왔던 시사저널 기자들이 2007년 6월 26일 전원 사표를 제출하며 사측과 결별을 선언했다. 1년여동안 끌어왔던 사측과의 줄다리기를 끝내며 편집국 현판 앞에 모인 기자들은 "굿바이~ 시사저널!" 을 외치며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내가 <오마이뉴스>를 알게 된 것은 2007년이 시작되고 있던 즈음이었다. 우연히 PD수첩 <시사저널 사태>를 보며 분노하게 되었을 때, 그때였다. 당시 어느 복지단체에서 발행하는 잡지기자였던 나는 시사저널과 관련된 사람들이 쓴 <기자로 산다는 것>을 출간되자마자 사 읽고는 나름 꽤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주로 이런 고민이었다. 나는 정의가 끝끝내 승리할 것을 믿으며, 돈보다 진실이 더 귀한 가치를 지닌 것임을 안다. 하지만 승리하기 전까지 정의는 왜 허겁지겁 돈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걸까. 마치 막장 드라마들처럼 정의는 16부 후반까지 계속 억울하다가, 종영되기 10분 전에서야 겨우 기쁨을 만끽하는 것. 난 항상 그게 불만이었다.
그때 본 기사가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라는 제목의 서명숙 기자님이 직접 쓴 글이었다. 물론 전에도 <오마이뉴스> 기사를 수차례 봤지만, 유심히 보게 된 것은 그때였던 것 같다.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사람이 편집국장을 했던 매체라니, 이후에도 서명숙이라는 이름은 제주올레로, 또 그곳에서 끊임없이 늙지 않는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으로, 계속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루에 열두 번? 뻔질나게 드나드네
▲ 누리꾼이 중심이 된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지난 2008년 5월 2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한-미 쇠고기 협상을 규탄하는 촛불문화제에 참가자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 유성호
본격적으로 <오마이뉴스>를 제 집 드나들듯 한 것은 재작년 뜨거웠던 촛불집회 때부터이다. 나는 당시 퇴근을 하면 곧장 룸메이트와 함께 광화문으로 달려가곤 했다. 초저녁잠이 매우 많은 내가 다음날 출근 부담을 안고서도 그곳을 향한 이유는 그냥 그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더니 애가 이상해졌다며 자나 깨나 큰딸 걱정인 'TK' 출신 울 엄마는 "조용히 집에서 촛불 켜놓고 혼자 집회하라"며 매일같이 전화를 해댔다. 서울로 오기 전 'TK'에 있을 때도 역시 이랬던 게 분명한 나는, 내가 아무리 콩알만 하게 작아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한 명'의 국민으로 보태질 의무를 놓칠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만날 기회, 쌈짓돈으로 산 김밥을 전경들에게,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가슴 뜨거운 장면을 직접 볼 기회 역시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오마이뉴스>를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내가 직접 목격한 장면을 가장 현실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나 물대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내 사진이 실려 있진 않을까, 나름 기대하며 찾아보는 것도 사실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열살 사춘기 소년이여, 더 잘 자라다오
▲ 지난 1월 15일 시민기자 워크숍에서의 나. 어디 있을까요? ⓒ 김대홍
매일같이 들락거리면서도,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내가 기자로 이곳에 동참할 시간을 앞당기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무턱대고 아프리카 여행 기획안을 편집부로 보냈던 것이나, 내 기사에도 원고료가 나온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나 알았던 사실, 뭐 이런 것은 내가 아직까지도 <오마이뉴스>를 알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는 <오마이뉴스>는 신선하다. 그리고 영향력도 엄청나다. 아프리카 여행기 중 하나였던 '소똥,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사 때문에 '니콜키드박'(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 내가 나에게 지어준 별명이다)은 네이버 검색어가 됐을 정도였다. 이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워크숍에 가서 들었던 일들도 참 신선했다.
오마이뉴스 기사로 인해 오래되고 낡고 불편했던 관습이 순식간에 시정되었다는 일들도 꽤나 많았다. 노원구청 아기 호랑이 사건 역시 <오마이뉴스>의 영향력이다. 나 역시도 얼마 전에 난 김용철 변호사 인터뷰 기사를 읽자마자 <삼성을 생각한다>를 구입해 열독했을 정도니까.
그런 반면,
"너의 글은 '오마이갓뉴스'에서 잘 읽고 있어."
친구에게서 온 문자 때문에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누구에게 <오마이뉴스>는 케케묵은 제도를 바꿀 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매체로 다가오고, 또 어느 누구에게는 '오마이'보다 '오마이갓'으로 불릴 만큼 생소한 매체라는 사실 또한 신선한 느낌이었다.
누구에게나 다 알려진 매체, 감춰진 속셈 따위도 그대로 드러나 너덜너덜해진, 그래서 거는 기대나 희망조차도 없는 매체보다는 아직도 알아야 할 게 많은 게 <오마이뉴스>다. 이런 <오마이뉴스>는 꼭 이른 사춘기가 찾아온 열 살 소년 같다. 여드름도 '송송' 나 있는 소년에겐 걸어봄 직한 희망이 있다. 앞으로 자랄 일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자! 말(言)이 곧 자기(己)가 되는 이들이 기자(記者)라고 했다. 자신의 글이 곧 자신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의 슬로건은 더욱 근사하다. 모든 시민이 '말과 행동에 어긋남 없이 일치하는 자'가 되길 바란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갖고 싶었던 이름을 내게 선물로 준 <오마이뉴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정연주 전 한국방송공사 사장님이나 진중권 교수님처럼 기하급수적인 조회수를 올려주지 못하는 나를 포함한 평범한 소시민 62000여 명에게 멋진 기자직을 허락해준 <오마이뉴스>, 그의 열 살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내가 그에게 줄 생일 선물로는, 마감 시간을 여섯 시간이나 앞당겨 보내는 지금 이 원고와, '나'와 또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제대로, 올바로 전달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더 진실 되게 쓰고자 하는 나의 기자된 마음이다.
글. 니콜키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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