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동진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 박도
'우수'가 지나면
나는 지난 겨울 내내 매우 바쁘게 한 철을 보냈다. 지난 초겨울 안중근 장군의 뒤를 쫓아 속초를 출발하여 러시아의 연해주인 크라스키노, 슬리비얀카, 블라디보스토크, 뽀그라니치나야를 경유하여 중국의 수분하, 하얼빈, 채가구, 장춘, 대련을 거쳐 당신께서 순국한 여순까지 대장정을 열흘 동안 배로 열차로 답사하고서는 그 답사기를 쓰느라 골몰했다. 오는 3월 26일이 안중근 장군 순국 100돌이라 그때까지 책을 펴내야 하기에 출판사의 원고마감 일에 쫓겨 밤낮없이 강행군으로 눈병이 날 정도였다.
그 일이 끝나자 체액을 다 쏟은 누에처럼 몸도 마음도 텅 빈 듯하다. 이럴 때는 여행처럼 좋은 게 없다. 그래서 어제(2월 18일) 눈발이 휘날리는데도 언젠가 꼭 한번 태백선 열차를 타고 강릉을 가고 싶었던 소망도 풀 겸 원주에서 오전 8시 59분에 출발하는 강릉행 1631호 열차에 올랐다.
▲ 예미역 ⓒ 박도
카지노도시로 변한 탄광촌
차창 밖에는 계속 눈발이 흩날렸다. 10: 45, 도착한 역의 이름이 '예미(禮美)'다. 이름이 아주 예쁘다. 알고 보면 이름만 아니라 예절이 아름다운 고장이 아닐까? 이 아름다운 눈길에 열차는 텅 비다시피 승객이 별로 없었다. 여객전무는 도착하는 역마다 내려 승객의 안전 승하차를 돕고는 출발 신호를 보냈다.
11:15, 지난날 탄광지대로 이름을 날렸던 '사북', 11:25에는 고한역에 머물렀다. 이곳을 지나면 역 일대는 온통 저탄장으로 온 마을도 탄가루에 묻힌 듯 시커멓게 물든 듯했는데 지금은 강원랜드가 들어선 탓인지 온통 무슨 무슨 호텔이네 모텔들이 울긋불긋 들어섰다.
탄광촌이 카지노도시로 변해 버렸는데 애초 탄을 캐던 광부나 그 가족을 위한 정부시책이 못된 토호들이나 카지노업자들의 배만 잔뜩 불리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전국에서 팔자 좋은 이들이 다 모여 개중에는 많은 이들이 신세 망치고 떠나는 곳이라고 하니 어찌 보면 하늘은 참 공평한 것 같기도 하다.
▲ 태백선 고한역 ⓒ 박도
▲ 태백역 ⓒ 박도
하늘의 뜻
11:35, 추전 역 한 모퉁이에는 아직도 저탄장이 있었다. 지금은 가스에, 전기에, 기름에, 밀려난 단지 서민들에게만 사랑을 받는 천덕꾸러기 연료이지만, 우리나라 산림 녹화에 크나큰 공헌을 한 연탄이다. 어느 하루 서울 명동 한복판에 막장에서 석탄을 캐던 차림 그대로 정부의 연료정책에 항의하는 광부들의 무언시위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집은 서울 종로구에 살았지만 1990년대말까지 연탄을 뗐던 나에게는 매우 친숙한 연료다.
11:40, 태백을 지나는데 한 아파트 주차장에는 승용차들로 가득 찼다. 이제는 전국 어디나 집집마다 다들 승용차를 한두 대 굴리는 부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아마도 상대적 박탈감 때문인가 보다. '고사리' '하고사' '마차리' 조그만 간이역 이름이 정겨웠다.
▲ 눈에 덮인 나무들 ⓒ 박도
산비탈에 나무들이 잔뜩 눈덩어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가운데 몇 그루는 눈을 이기지 못한 듯 가지가 부러지거나 밑동부터 쓰러져 마침내 수명을 다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아닐까? 사실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들은 적당한 때에 가줘야 한다. 가지 않으면 하늘이 벌을 내려서 떠나게 한다.
12:25, 흥전역과 나한정역으로 가는 철길은 고지대로 바로 아래에 또 다른 철길이 보였다. 차내 방송은 바로 그 길로 열차가 뒤로 달린다고 친절히 알려주었다. 옆자리 여객전무는 이를 스위치백(Swich Back) 철길로, 열차가 고산지대에서 앞뒤 지그재그 형으로 달리는, 우리나라 유일한 곳이라고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 강원도 산과 개울 ⓒ 박도
봄기운이 환연한 정동진 바다바람
12:40, 신기역을 지나자 그동안 여우 날씨로 강설과 맑음을 반복하던 날씨가 쾌청해졌다. 참 아름다운 강산이다. 내 조국 산하의 아름다움을 모른 채 신혼여행 부부도, 골프채를 든 졸부들도 온통 해외나들이다. 이따금 나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온 제자들에게 나는 신혼여행은 가능한 국내로 하라고 권장한다.
몇 해 전에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두 제자가 결혼하겠다고 찾아왔기에 그렇게 권했더니 착하게도 내 말을 듣고는 강원도 고성에서 부산 해운대까지 일주를 하고 돌아와서 "참 좋았습니다"라고 인사했다. 하기는 밀월여행에 좋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 강원도 겨울산 ⓒ 박도
▲ 봄이 오고 있는 정동진 바다 ⓒ 박도
13: 09 동해역에 닿았다. 눈이 부신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계속 눈을 동해바다에 두는 새 13: 35. 정동진역에 닿았다. 열차에서 내려 동해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고는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바닷바람이 부드러웠다. 봄기운이 환연했다.
13: 50, 정시보다 5분 늦게 종착역에 닿았다. 곧장 시내버스를 타고 주문진 항으로 가서 펄떡이는 생선을 즉석에서 떠서 모처럼 입을 즐겁게 한 뒤 한계령을 넘고자 양양으로 달렸다.
16:40, 양양에서 한계령을 넘어 춘천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한계령을 넘는데 언저리 경치가 그야말로 "선계(仙界)인지 불계(佛界)인지 인간(人間, 인간세상)이 아니었다"라는 선인의 시구 그대로였다. 한계령 나무들은 모두 눈꽃을 피웠다. 이를 '수빙(樹氷)' 이라고 한다.
늦은 밤 내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몸을 닦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꿈같은 하루였다.
▲ 한계령의 멧부리 ⓒ 박도
▲ 한계령의 눈꽃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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