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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387)

―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듬기

등록|2010.02.23 14:24 수정|2010.02.23 14:24
- 일고의 가치도 없는

.. 지식인들과 세련된 사람들은 판소리가 처음 태동했던 3백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디스코 뽕짝을 저속하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  <스콧 버거슨/주윤정 옮김-맥시멈 코리아>(자작나무,1999) 226쪽

"세련(洗練)된 사람들"은 "잘난 사람들"이나 "한다 하는 사람들"로 손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태동(胎動)했던'은 '태어났던'이나 '움트던'이나 '꿈틀거리던'으로 다듬고, "3백여(-餘) 년(年) 전(前)에 그랬던 것처럼"은 "삼백 해쯤 앞서 그랬듯이"로 다듬습니다. '저속(低俗)하고'는 '덜 떨어지고'나 '모자라고'나 '지저분하고'로 손질하고, '가치(價値)'는 '값어치'로 손질하며, "없는 것으로"는 "없다고"나 "없는 듯이"나 "없는 노래로"로 손질해 줍니다.

 ┌ 일고(一顧) : 한 번 돌이켜 봄
 │   - 그는 요즘 너무 바빠서 일고의 여지도 없다 /
 │     기애의 고통의 호소에는 거의 일고의 주의도 베풀지를 않았다
 │
 ├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 돌아볼 값어치도 없다고
 │→ 눈여겨볼 값어치도 없다고
 │→ 생각할 값어치도 없다고
 └ …

젊은 사람한테서 "일고의 무엇" 꼴로 읊는 말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일고의 무엇" 꼴로 읊는 말투는 거의 모두 어른한테서 듣습니다. 제법 나이 많은 분들한테서 들으며, 이 말투가 어린이책에 실린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입으로 읊는 말투보다는 글에 실린 글투로 흔히 봅니다. 교장선생님 같은 분이나 나이 많은 지식인들 글에 으레 나타납니다.

아무래도 '일고'라는 낱말은 아이들한테 알맞지 않은 데다가 젊은 사람들이 익히 쓸 만하지 않은 말투가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이런 말투라 해서 안 써야 하는 말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이들한테 새로 가르치면서 두루 쓸 수 있습니다. 그저, 이 말투를 즐겨쓰기 앞서 한 번쯤 '일고'라는 한자말이 무엇을 뜻하고 어느 자리에 어울리며 우리는 왜 이 낱말을 쓰고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낱말을 아이들한테 가르치거나 물려주기 앞서 우리한테 이 낱말이 꼭 있어야 하는가를 헤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아무런 값어치도 없다고
 ├ 아무 값어치도 없다고
 ├ 조금도 값어치가 없다고
 ├ 어떠한 값어치도 없다고
 └ …

"한 번 돌이켜 본다"는 한자말 '일고'입니다. 그래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같은 말마디라면 "한 번 돌이켜 볼 값어치도 없다"는 소리입니다. 이런 소리란, '눈여겨볼' 값어치가 없다거나 '생각할' 값어치가 없다거나 '따져 볼' 값어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무' 값어치가 없고 '어떠한' 값어치가 없으며 '하나도' 값어치가 없다는 이야기예요.

말뜻 그대로 적으면 이렇습니다. 말뜻 그대로 적는 이런 말투라 한다면,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쓰기에 좋고 언제라도 쓸 만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한자말 '일고'가 좋아서 쓰겠다면 쓰시라고. 그렇지만, 이 한자말이 없어도 우리는 우리 뜻과 느낌을 널리 나눌 수 있는 말길이 있는 한편, 더욱 넉넉하고 알차게 우리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글길이 있다고.

 ┌ 일고의 여지도 없다
 │→ 한 번 돌아볼 틈도 없다
 │→ 한 번 쉴 겨를도 없다
 ├ 일고의 주의도 베풀지를 않았다
 │→ 한 번 돌아봐 주지를 않았다
 │→ 한 번 눈길조차 두지를 않았다
 └ …

누구한테나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한테나 어릴 적부터 익숙한 말을 쓸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한테나 학교를 다니건 집에서 지내건 하며 익힌 말을 쓸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한테나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한테나 오래오래 익숙한 글을 쓸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한테나 책을 읽건 방송을 보건 배운 글투로 글을 쓸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다릅니다.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다 다른 사람이요 다 다른 삶을 꾸리고 있으니, 다 다른 말투로 다 다른 이야기를 펼치며 다 다른 말마디로 다 다른 생각을 나눕니다.

그러면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우리가 우리 권리와 자유를 마음껏 뽐내면서 쓰는 말과 글은 얼마나 어울리거나 알맞거나 싱그럽거나 고울까요. 우리가 신나게 쓰는 말과 글은 나 스스로한테나 나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사람한테나 얼마나 즐겁고 반갑고 살가울까요. 우리가 쓰는 말은 얼마나 우리 말답고, 우리가 나누는 글은 얼마나 우리 글다울는지요.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고 했는데, 우리는 참말 얼마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일까 모르겠습니다. 말 한 마디를 놓고, 투표 한 가지를 놓고, 정치와 사회 이야기 하나를 놓고, 우리가 돈벌이 삼아 하는 일 하나를 놓고, 우리 식구나 동무나 이웃하고 나누는 삶을 놓고, 우리는 얼마나 생각을 찬찬히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생각없이 내뱉는 말은 아닌지, 생각없이 표를 던지지 않는지, 생각없이 휘둘리며 눈먼 채 지내지는 않는지, 내 밥그릇만 채우면 그만이라고 여기지 않는지, 나눔과 사랑과 믿음은 없이 바보로 머물고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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