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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39) 쉽게 쓰기 8

[우리 말에 마음쓰기 868] '이중생활의 피로',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 다듬기

등록|2010.02.27 16:53 수정|2010.02.27 16:53
ㄱ. 이중생활의 피로

.. 9년 이상 계속한 재단 근무와 소설을 쓰는 작업으로 인한 이중생활의 피로가 이 입원 덕분에 완전히 풀려서 생명을 구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  <소노 아야코/오근영 옮김-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리수,2009) 168쪽

"9년(九年) 이상(以上) 계속(繼續)한"은 "아홉 해 넘게 이어진"이나 "아홉 해 동안 이어온"으로 다듬고, "재단 근무(勤務)와 소설을 쓰는 작업(作業)으로 인(因)한"은 "재단에서 하는 일하고 소설을 쓰는 일 때문에"나 "재단 일과 소설쓰기 때문에"로 다듬습니다. "이중생활(二重生活)의 피로(疲勞)가"는 "두 가지 삶으로 쌓인 고단함이"나 "두 가지 고된 삶이"로 손질하고, '완전(完全)히'는 '모두'나 '말끔히'로 손질하며, "생명(生命)을 구(救)했는지도"는 "목숨을 건졌는지도"나 "살아났는지도"로 손질해 줍니다.

 ┌ 이중생활의 피로가
 │
 │→ 두 가지 일을 하며 쌓인 고단함이
 │→ 두 가지 일을 하는 삶 때문에 쌓인
 │→ 두 가지 일 때문에 쌓인 고단함이
 │→ 두 가지 일 때문에 고단했던 몸이
 └ …

이 글을 옮긴 분은 이렇게 옮길 수밖에 없었구나 싶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한 줄이지만, 이 한 줄을 한결 말끔하고 살갑고 손쉽게 옮겨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옮겨냈다고 해도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고 읽어낼 사람은 읽어낼 테지요. 그러나, 이 나라 번역쟁이는 우리 말과 글을 고작 이만큼으로 다루고 얼레벌레 지나쳐야 하는가 싶어 안쓰럽습니다.

"아홉 해 넘게 이어진 재단 일과 소설쓰기라는 두 갈래 삶 때문에 고단했는데, 이 입원 덕분에 말끔히 풀려서 목숨을 건졌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라든지, "아홉 해 넘게 재단 일과 소설쓰기를 나란히 이어오며 쌓였던 고단함이 이 입원 덕분에 모두 풀려서 죽지 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처럼 통째로 고쳐쓰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 마디 두 마디에 깊이 마음을 쏟고 한 줄 두 줄에 널리 마음을 바치면서, 이 글을 처음 쓴 소설쟁이 한 사람 마음밭이나 마음결을 우리 나라 사람들한테 따사롭고 넉넉하게 나누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말이란 삶입니다. 말하는 사람 삶입니다. 창작이란 창작하는 사람 삶입니다. 번역이란 번역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번역을 할 때에는 창작하는 삶까지 아울러 담아내어 보여줍니다. 창작은 창작대로 고되고 벅차지만, 번역은 번역대로 두 나라 사람들한테 사랑스럽고 애틋할 수 있게끔 말글을 다스려야 하니 새삼스레 고되고 벅찹니다. 번역을 하는 이라면, 이 고됨과 벅참을 기쁘게 짊어지며 더욱 다부지게 붙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고됨을 고됨으로 느끼며 말마디 하나를 몇 번씩 더 살피고, 벅참을 벅참으로 받아들이며 글줄 하나를 낮은자리 사람들 눈높이까지 곰곰이 톺아보면서 어루만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ㄴ.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

.. 랭커스터 지역의 TV방송사가 시청자들의 거부 반응을 감안해 동시 방영을 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그 프로그램을 보는 데는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  <임세근-단순하고 소박한 삶, 아미쉬로부터 배운다>(리수,2009) 115쪽

"랭커스터 지역(地域)의 TV방송사가"는 "랭커스터 지역에 있는 방송사가"나 "랭커스터에 있는 방송사가"로 다듬습니다. "시청자(視聽者)들의 거부(拒否) 반응(反應)을 감안(勘案)해"는 "시청자들이 거부할까 걱정스러워"나 "사람들이 안 좋아할 듯하여"나 "사람들이 거리껴 할까 근심스러워"로 손질하고, "동시(同時) 방영(放映)을 하지 않기로 결정(決定)함에 따라"는 "나란히 방영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나 "함께 보여주지 않기로 하면서"로 손질해 줍니다. '프로그램(program)'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이 자리에서는 '방송'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
 │→ 좀 기다려야 했다
 │→ 얼마쯤 기다려야 했다
 │→ 며칠 더 기다려야 했다
 │→ 얼마 동안 기다려야 했다
 └ …

누군가를 기다린다고 할 때에 "얼마나 기다렸어?" "응, 조금 기다렸어." 하고 말을 합니다. "응, 약간 기다렸어." 하고 말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척 어설프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약간 기다렸어"도 아닌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처럼 쓰면 더더욱 어설프며 얄궂습니다. 아니, 말이 되지 않아요.

우리는 말이 안 되는 말을 어찌하여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는 말이 안 되는 말을 왜 버젓이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배운 분들일수록 말이 안 되는 말을 쉽게 쓰고 있으며, 글을 다루는 사람일수록 말이 안 되는 말에 깊이 젖어들어 있으니, 더없이 알쏭달쏭한 노릇입니다. 배운 분이라면 말이며 글이며 한껏 잘 가다듬어야 옳지 않을는지요.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말이든 글이든 알차고 알맞게 가눌 줄 알아야 옳을 텐데요.

 ┌ 이 방송을 보려면 조금 기다려야 했다
 ├ 이 방송을 보려면 얼마쯤 기다려야 했다
 ├ 이 방송을 보려면 여러 날 기다려야 했다
 └ …

배운 분들이라고는 하지만 저마다 맡고 있는 전문 지식만 배웠기 때문에, 전문 지식을 다루는 말은 제대로 모른다 할 수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파야 한다는 사람입니다만, 한 우물 지식인 까닭에 둘레 지식이나 말 지식은 젬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우물을 파고자 하는 전문 지식인 만큼, 이 지식을 더 깊이 갈고닦느라 정작 지식을 다루는 말을 알뜰살뜰 여밀 줄을 모른다 할 수 있습니다.

글을 다룬다고 할지라도 좀더 뽐내려고 하는 마음이 클 수 있습니다. 요모조모 잔뜩 치레를 해야 글이 되는지 잘못 알고 있을 수 있습니다. 문학이란 말장난이 아닌데 말장난을 해야 문학이 되는 듯 어린 날부터 학교에서 잘못 배운 탓일 수 있습니다. 문학을 곱고 힘차고 싱그럽게 다스리도록 이끌어 준 좋은 스승이 없어서일 수 있습니다. 늘 보는 문학책마다 온통 엉망진창 말글로 이루어져 있어, 저절로 물들거나 길든 탓일 수 있습니다.

 ┌ 이 방송은 나중에야 볼 수 있었다
 ├ 이 방송은 며칠 뒤에야 보여주었다
 ├ 이 방송을 곧바로 볼 수는 없었다
 └ …

함께 나누는 말이요, 함께 주고받는 말입니다. 함께 가꾸는 말이며, 함께 일구는 말입니다. 함께 아끼는 말이고, 함께 사랑하는 말입니다. 말을 할 때에는 듣는 사람을 살피고, 글을 쓸 때에는 읽는 사람을 헤아려야 합니다. 말을 할 때에는 듣는 사람 눈높이를 톺아보아야 하고, 글을 쓸 때에는 읽는 사람 마음밭을 곱씹어야 합니다.

줄거리를 담아낸다고 해서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이 된다고 해서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줄거리에 입히는 옷이 모두 넉넉해야 합니다. 의사소통을 이루는 바탕이 하나하나 튼튼해야 합니다. 지식뿐 아니라 사람을 보듬는 말이 되도록 애쓰면 좋겠습니다. 전문 갈래를 비롯해 우리 삶터를 고루 어루만지는 말이 되게끔 힘쓰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값을 넘어 서로 어깨동무할 큰 살림살이를 얼싸안는 말로 북돋우도록 마음쓰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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