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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7회)

계책 속의 계책 <2>

등록|2010.03.02 11:27 수정|2010.03.02 11:27
"정한수씨가 근자에 들어와 달라진 건 없었습니까. 부인께서 보실 때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없었느냐는 얘깁니다."
"그런 점은 없고···."
"부인께서 느끼신 점이라든가, 평소와 다른 점이 있으면 말해 주십시오. 평소의 남편과 다른 점 말입니다."

장씨의 얼굴이 빨개졌다. 시어머니가 반생반사의 상태에 있으니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을 터지만, 낯선 사내 앞에서 부부간의 은밀한 얘기를 한다는 게 여간 남우세스러운 게 아니었다. 때마침 송화가 들어와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부인께 물은 게 있다. 네가 듣고 내게 전해라."

정약용은 크흐음! 헛기침을 뿌리고 집 주위를 둘러보겠다는 빈말을 흘리며 문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사람은 한 번 집을 나가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래도 문밖을 기웃거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긴 탓에 뜬소문을 전해 주더군요. 어느 곳 투전판에서 횡재해 기생을 끼고 뱃놀일 갔다거나, 어떤 때는 상갓집에서 부랑배와 싸움이 붙어 걷지 못할 정도로 늘씬하게 맞았다고도 했고요. 그래도 그 사람 마음은 따뜻했어요. 어쩌다 돈이 생기면 먹을 걸 챙겨 잊지 않고 보내줬으니까요. 술에 곤죽이 돼 돌아왔다가 술이 깨면 횅하니 나가버렸으니 언제 겸상(兼床)으로 부부의 정을 나눌 여유가 있었겠어요."

참으로 불행한 부부라고 안타까운 마음 짓누를 때 부인의 낯이 붉어졌다. 아름답고 행복에 겨운 생각이 마음자락을 어지럽힌 탓일 것이다. 역시 그런 얘기가 조용조용 새어나왔다.

"열흘 전쯤 됐을 거예요. 낮에 비가 좀 쏟아졌는데 해가 뉘엿해서 돌아온 그 분은 좋은 일을 만난 듯 즐거워했어요. 오랜만에 그 분과 사랑을 나눴고요. 평소와 다른 열정이 흘러나왔거든요. 그리고 며칠이 지나 단약(丹藥)을 들고 왔어요. 먹으면 몸이 상쾌해질 것이라 하여 몇 알 삼켰는데···, 어찌나 몸이 뜨거운 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일테면 사랑의 묘약이었나요?"

부인이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빈 자리만을 만든 남편이 꽉 채운 사랑의 방이었다. 그것이 약을 사용하든 독을 사용하든 곁에 있어준 것만으로 행복했다. 이날 사랑을 나눈 남편은 그녀에게 옥가락지 하나를 선물로 내놓았다.

"선물로 받은 것이오만, 내키지 않으면 끼우지 않아도 되네. 부인 맘대로 해요. 이 가락지를 만든 장인(匠人)은 아주 유명하다네. 자네도 들어보았을 것이야. 염주에 부처를 새긴다는 해월(海月) 스님 말일세. 이 가락지에 수(壽) 자를 새겨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들었네."

술만 마시지 않으면 성인군자의 반열에 들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나, 한 방울 술이 들어가면 본래의 그가 아니었다.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미친개처럼 날뛰었다. 한때 무과(武科)에 응시하고자 무예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어지간한 사내들은 그의 솜씨를 당해내지 못하고 나동그라졌다. 이기지 못한 사내들은 상대를 헐뜯기 마련이다. 집안이 빈한하니 돈냥이나 있는 쪽들의 눈 밖에 나면 상갓집 개가 되었다가도 일대의 호걸로 되살아났다. 그의 말대로 참으로 엿가락 같은 세상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정약용은 해월의 반지에 대해 입을 열었다. 홍제동 어느 객주 집에 정한수가 자주 들르는데 어느 날 반지(環) 하나를 투전판에 내놓고 호언장담 했다는 것이다.

"이건 시중에서 돈만으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네. 여기엔 부처의 오묘한 법력이 깃들어 있어. 재물로 따지면 수십 냥에 이른다고나 할까."
"미친 놈 넋 떨어진 소리 하고 있네."

투전꾼들은 실소를 깨물며 비웃었다. 때마침 내리는 비를 피해 잠시 쉴 요량으로 객주 집에 들어온 방사용(方仕勇)이란 의원의 말 한 마디가 분위기를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그 분의 반지가 분명하다면 내가 사겠습니다. 쌀 스무 가마면 어떻겠습니까?"

가뜩이나 어려운 때니 스무 가마 쌀이면 눈이 번쩍 뜨이는 액수였다. 그러나 정한수는 냉소를 쳤다.

"보아하니 의원인 듯싶소만 어디서 듣긴 들었나 봅니다. 이건 당신한테 팔 물건이 아니오. 정히 반지가 필요하다면 내가 일러드릴 테니 그분을 찾아가 부탁 한 번 해보시오."

그 사내는 손을 내저으며 겸양했다. 자신이 백 번을 찾아가도 그 분은 꿈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대방은 낙담부터 쏟아놓았다.

"우리 어머니가 부처님을 믿으니, 그런 부탁을 드립니다. 선비님께서 가락지를 팔기 싫으시면 그와 같은 물건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역시 같은 글자인 수(壽) 자를 넣고 만들어 오시면 쌀 서른 가마를 드리겠습니다. 그리 해주신다 약조하시면 지금 쌀 열 가마는 선불로 드리겠습니다."

순식간에 이뤄진 계약이고 보니 좌중은 그저 놀랄 뿐이었다. 빗발이 뜸해지고 방사용이란 사내가 방을 나가자 사람들이 다가왔다. 도대체 해월이라는 자가 누구인데 그 같은 가격에 옥가락지를 만드느냐가 화제로 떠올랐다. 마포 잠방이를 입은 사내가 입맛을 다시며 퉁을 놓았다.

"이 사람은 소문도 아니 듣나! 해월은 염주 안에 부처를 새겨  넣는 조선 제일의 장인(匠人) 아닌가. 앞을 못 보는 처진데도 염주 안에 불자(佛子)의 모습을 일백 여덟 가지나 새겨 넣는다는 스님이네. 그런 스님의 반지니 쌀 서른 가마가 대순가!"

그날의 얘기는 그런저런 소란으로 막을 내리고 정한수가 오랜만에 내놓은 한 잔 술에 취해 희희낙락 권주가 부르며 음담패설로 도배하며 시끌벅적했다. 정약용은 그 날의 일을 다시 상기시켰다.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얘기론 그저 술 한 잔 마시고 떠들다 돌아갔다는 것일세. 투전목은 만지지도 않았고. 술판이 벌어지기 전 방의원이 잠시 문밖으로 정한수를 불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는데 그 외엔 달리 일이 없었네. 계산해 보면 그 날 이후 일 주일 안에 정한수 사건이 일어난 것이네."

얘기는 다시 이어졌다.

"검시기록을 살피니 풍지(風池)란 혈 자리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초검관이 소견서를 써놓았는데 나의 생각도 같네. 주검이 발견된 산자락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은 묘각(廟閣)이네. 또한 홍제동 객주 집에서 투전판이 벌어진 지점과는 샛길로 삼각형을 이루네. 여기에서 옥인동이나 인근의 가옥까진 누구든 통행이 자유로운 지점이지. 여인의 몸으로 이곳을 지나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건 당연한데,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게 불공이네. 주검이 발견된 곳에서 반대쪽 산자락에 작은 암자가 있으니 그럴 법한 가설이 서네. 서리배를 그곳에 보냈으니 출입한 자가 누군지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고···."

다시 얘기가 이어졌다.

"해월이란 스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여승(女僧)이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불력(佛力)이 대단해 사리함을 조각하거나 염주 안에 부처의 상을 조각한 조선 제일의 장인으로 알려져 있네. 그 분은 자신을 찾아와 뭔가를 만들어 달라는 보살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네. 대수롭지 않게  답을 하면 미소 짓는 것으로 그만일 터이고···, 그렇다보니 이제껏 해월 스님의 조각품을 받은 보살이 없다는 것이네."

정약용이 종달새 마냥 실없는 웃음을 입가에 떠올린 건 이상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얼마 전 해월 스님은 정한수에게 옥가락지 하나를 조각해 주었다는데···.

"이상한 일이잖은가. 앞을 못 보는 스님이 다른 사람도 아닌 건달기 있는 한량에게 그런 물건을 만들어 주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곳에 다녀온 서리배가 관아에 돌아오면서 전말이 밝혀졌다. 흐트러진 주변 얘기를 정리하는 데엔 그의 말이 절대적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은 일이었기에 직접 스님을 찾아뵙고 그 점을 물었습니다. 암자에 계신 다른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관아의 서리배는 노스님이 들려준 말을 다시 꺼냈다. 당시 스님은 인왕산 암자에 계셨는데 지금은 합천 해인사 쪽으로 출타했다고 덧붙였다.

"얼마 전 정한수가 찾아간 모양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루만 가는 게 아니고 몇날 며칠 스님의 거처에 머무르며 졸라대기 예사였습니다만, 정한수를 만난 스님은 별다른 말이 없이 가락지를 만들어 준 모양입니다."

스님을 비롯해 항간에 알려지기론 약간의 군살이 붙었지만 해월의 결정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한수는 그날 스님을 만난 자리에서 부탁했다는 것이다.

"제가 스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 왔습니다. 너무 외람된 일인데다 스님이 즐겨하시던 게 아니라서 시생이 암자에 열 가마니의 쌀을 시주하고 말씀드립니다. 저에겐 노망이 든 어머니가 계시는 데 시생의 죄업이 하늘에 닿아 그리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나를 길러주신 어머니신데 병마가 침입했다고 어찌 모른 척 하겠습니까. 스님, 하실 수만 있다면 제 어머님을 위해 옥가락지에 수(壽) 자 하나만 새겨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해월이 며칠 후에 오라는 말로 선선히 허락했다. 이런 얘긴 개인적인 것이기에 본인들이 직접 얘기하지 않은 이상 알 수 없었다. 스님 가까이 있던 보살들이 돌아간 뒤의 일이니 소문은 무성하게 가지를 치며 정한수의 능력에 대해 여러 말들이 흘러 다녔다. 그가 아니고선 어느 누구도 해월의 반지를 얻을 수 없다는 풍설이었다. 장약용은 미심쩍은 부분을 건드리고 나왔다.

"해월 스님이 만든 건 반지가 하나야. 하나를 만들고 스님이 합천으로 떠난 후 정한수가 살해됐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야. 그런데 문제는 쌀 열가마야. 쌀 열 가마를 암자에 시주했다고 관아의 서리배가 말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만···."

"객주 집에서 정한수가 반지를 내놓고 해월의 반지라 했네. 그땐 반지가 하나였지만 쌀 열 가마가 없었네. 그 말을 들은 후 정한수가 스님을 찾아가 반지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반지는 두 개가 되어야겠지. 그러나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반지는 하나일 수밖에 없거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 맞아."

이런 문제는 생각 여하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지만, 정약용의 뇌리엔 또 다른 조각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방사용 의원에 대한 행장(行狀)이었다.

수표교 근방에서 제중당(濟衆堂)이란 한약방을 운영하는 방사용은 재산깨나 있는 집안을 찾아다니며 딱 떨어지는 처방을 내리는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사냥을 좋아해 악산(嶽山)이든 평원이든 말 달리며 살(矢) 날리기 좋아하던 송찬우(宋燦宇)가 두 해 전 낙마해 허리가 고장 나자, 방사용은 옥인동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허리는 신(腎)과 관계 깊어 사내 몸에 생긴 이상 징후로선 으뜸이었다.

허리가 약할 때 민간에선 척수염(脊髓炎)의 경우 도마뱀 처방을 내리는 방법이 있다. 진소음인(眞少陰人)이라 부르는 신허 요통엔 도마뱀 대신 지네를 이용한 처방법을 사용했으나 송찬우는 불개미를 술에 담가 마시는 민간처방을 해오다 방의원을 불러들여 침을 맞았다.

비가 줄기차게 내린 그날은 송찬우가 고통을 호소해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사연을 들으니 기가 차 말도 안 나왔다는 것이다. 몸이 웬만큼 좋아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 두 팔을 쳐 올리며 기지개를 켜더니 활을 꺼내 크게 시위한 게 병이 도진 원인이었다. 그 바람에 불침을 놓듯 뜨끔한 허리를 움직이지 못한다는 다급한 전언이었으나 이건 병이 아니라 허리가 약간 놀란 것이다. 그런 곳은 주무르거나 마찰을 통해 치료할 수 있었는데도 방사용이 병을 키운 건 이유가 있었다. 이날 송찬우의 사랑채에서 얘기를 나누다 돌아가는 길에 별당에서 일하는 계집아이의 전언을 받았다.

"아씨께서 잠시 뵙자고 하십니다."

[주]
∎단약(丹藥) ; 알약
∎장인(匠人) ; 어떤 일에 뛰어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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