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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경의 숲길에서 깁는 단상(斷想)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무등산 옛길 풍경

등록|2010.03.02 14:04 수정|2010.03.02 14:04
지난 주말(27일)에는 무등(無等)에 올랐다. 산장에서 무등산 옛길 2코스를 따라 산행길을 잡았다. 먼 옛날 선인들이 개나리 봇짐을 메고 걸었을 이 길을 다시 복원하여 21세기를 사는 내가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다. 화순 동복에서 말년을 보냈다는 김삿갓도 혹 이 길을 걷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인적이 드문 고즈넉한 산길은 산새들만 바쁠 뿐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었다. 잘 다듬어진 옛길을 따라 걸으니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던 원시의 숲이 바람결에 꿈틀대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계곡에는 얼었던 눈이 녹아 산 정상에서부터 겨울을 싣고 내려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땀에 젖어 걷고 있는 내 옆을 지나 산 아래 낮은 곳으로 흘렀다.

그러고 보니 산은 한겨울을 빈 가슴으로 삭풍(朔風)과 한설(寒雪)속에서 오롯이 버텨내더니, 지난겨울의 상처를 털어내고 말갛게 씻은 얼굴로 새로이 맞을 계절,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산에 들면 자신의 존재마저 잊게 된다는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숲길을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산행 중에는 야생동물과 새들을 위해 조용히 하라'는 팻말 옆을 소란스레 떠들며 지나갔다.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겼다. 원시의 숲에서 사는 새들은 아직 도시인들의 습성을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제 곧 적응하게 되겠지.

완만하게 경사져서 걷기에 편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무기를 만들었다는 제철터가 있으며, 한 20분을 더 오르니 치마처럼 펑퍼짐한 치마바위가 나왔다. 바위에 앉아 잠시 한숨을 돌리고 다시 가파른 경사지를 올랐다. 경사로에는 얼기설기 뒤엉킨 나무뿌리가 앙상하게 속살을 드러낸 채 비바람에 씻겨 내린 길을 버텨내고 있었다.

산중턱에 오르니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소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멀리 산등성이를 따라 마른 줄기를 곧추세우고 서 있는 활엽수들의 쓸쓸한 모습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왔다. 잔설이 채 가시지 않은 산, 그 비탈에 서서 꿋꿋이 비바람을 견뎌내며 서 있는 나무들과 마주했다. 겨울 한철 버릴 건 다 버리고, 다만 야윈 가슴속에 한줄기 푸른 꿈을 간직한 채 봄을 준비하는 그 모습이 숙연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아름다운 모습과 풍경을 가꾸기 위해서는 많은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게 된다.

무등산(無等山)은 그 의미만을 보면 '그 이상 더할 수 없을 정도'의 최고의 산이다. 물론 높이나 크기는 최고가 아니지만 산이 지닌 풍모나 기품이 그 이름에 걸맞다. 중봉에서 장불재로 이어지는 어머니 품속같은 원만한 능선은 장불재에 커다란 억새밭은 만들어 놓고 이곳을 찾는이들을 가슴을 열고 맞아준다.

그래서 무등은 무각(無覺),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위자연(無爲自然)과도 맞닿아 산에 오르면 탈속의 참의미를 느끼게 한다. 산에 머무는 시간만이라도 세상사 잡다한 생각을 접고, 일체의 상념을 떠나 자연 그대로의 이상적인 경지를 느끼고 싶었다.

이제 무등산 산행코스는 막바지다. 군사도로를 횡단하여 잡목숲을 헤치고 30여분을 올라가니 무등산 옛길의 종점인 서석대에 이르렀다. 병풍처럼 펼쳐진 서석대는 무등산의 상징이다. 서석대 정상에 서니 그곳에도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가는 나무들이 옅은 운무속에서 이제 곧 시작될 3월을 바디질하고 있었다.

산은 풍상속에서 이렇게 늘 한곳에 머물러 있는데, 산을 지나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들이 조잘거리며 지나간다. 바람은 계절을 몰고 왔다가 지나가고, 계절은 빛바랜 쓸쓸함만 남기고 지나간다. 계절이 지나가는 산속에 내가 찾아와 계절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진다.

피었다가 지는 줄 모르게 지고 마는 키 작은 코스모스처럼 28일의 짧은 2월이 지나가고 그 자리에 새싹처럼 3월이 돋아나면 산은 온통 긴 잠에서 깨어 희망으로 가득한 초록의 싹을 키울 것이다. 이 산에 봄이 깃들면 다시 찾으리라 약속하며 올라올 때와는 반대로 입석대를 돌아 장불재를 타고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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