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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지역 감정의 깊은 골을 메워야 할까

호남 영남 독립운동가 후손의 만남

등록|2010.03.02 16:20 수정|2010.03.02 16:20

▲ 호남 고광순 의병장 후손 고영준 씨와 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룡 임정 초대국무령 후손 이항증 씨가 광주 포충사 앞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 박도


우물 안 개구리

▲ 산이 보이지 않은 중국 헤이룽장성의 대평원 ⓒ 박도

1999년 여름,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자 중국에 갔을 때다. 당시 김포공항에서 베이징으로 간 뒤 상해로, 장춘으로 이동할 때 길 안내를 하던 김중생 (일송 김동삼 손자) 선생은 중국은 워낙 넓은 곳이라 열차나 자동차를 이용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항공기를 타고 다녔다.

그런 가운데 장춘에서 하얼빈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했는데, 이른 아침 6시에 장춘을 출발하여 시속 100킬로미터로 3시간을 달려 하얼빈에 도착했는데 도중에 산이 하나 보이지 않은 대평원이었다. 나는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허허벌판 지평선을 바라보며 정말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중국대륙을 네 차례, 미국을 세 차례, 러시아를 한 차례 누벼보니까 그들 나라는 정말 국토가 넓었다. 미국은 동부와 서부의 시차가 세 시간으로 비행기를 타고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까지 가는데도 한나절이 걸렸다.

중국에는 23개의 성(省)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의 넓이는 46만 평방킬로미터로 우리나라 남북한의 두 배요, 대한민국의 다섯 배 정도다. 그야말로 좁은 땅에서 산 사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상은 넓다.

지난해 10월 29일 오후 5시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중국 러시아 국경을 넘어 하얼빈까지 꼬박 40시간을 타고 갔는데(절반 정도는 정차시간), 새삼 우리나라가 좁다는 생각과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있다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세종대왕이 나와도 당선될 수가 없어요

▲ 남도의 동백꽃 ⓒ 박도

남북한이 고작 22만 평방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좁은 국토에서 남과 북으로 두 조각이 나고, 그것도 부족하여 경상도니, 전라도니, 충청도니 세 조각 네 조각으로 나눠졌는가 하면 수도권이니, 비수도권으로, 서울은 강남과 강북으로 나눠져 서로 갈등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어찌 한심치 않을까?

그동안 정치인들이 나서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목청을 높였건만 선거 결과는 더 부추긴 꼴로 어느 지역에서는 자기네 고장 출신 후보가 90퍼센트가 넘는 반이성적인 작태를 보여주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였다.

"우리 지역에서는 세종대왕이 타당 후보로 나온다 해도 당선될 수가 없어요."

남도의 한 고장에서 만난 토박이의 말이었다.

사실 나는 경상도 구미 사람으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인 'TK'의 본거지 출신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한 번도 지역감정을 가진 적도, 그런 말을 한 적도 없거니와, 사람을 가려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는데 고3 때 내 짝은 전남 보성에서 올라온 친구(염동연)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 역시 경상도인 나를 좋아해서 서로 키도 비슷하지도 않은데도, 그가 일부러 담임선생님에게 부탁하여 내 옆자리에 앉아 1년을 같이 보냈다.

그는 16대 대통령 선거 때  상대지역 후보의 참모가 되어 그 후보를 당선시켰지만, 최근 만난 자리에서 지역감정은 결코 해소시키지 못하였다고 참담한 심경을 고백했다. 결론은 정치인으로서 지역감정 해소는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잡는 일처럼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지역으로 돌아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지 않는가.

10여 년째 항일에 대해 공부하자 독립운동에는 지역감정은커녕 오히려 온 나라 백성이 하나로 뭉칠 뿐 아니라, 심지어 화합하기 힘든 다른 종교인까지도 단합된 모습을 보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지역이나 계층 간의 갈등은 망국의 요인이다. 조선이 망한 것도 지배계급의'부패'와 홍경래난과 같은 지역감정 분출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따른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갈등에서 비롯됨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 남도 가로수 종려나무 ⓒ 박도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 함평 임정청사에서(왼쪽부터 고영준, 고재수, 이항증, 김근순 씨) ⓒ 박도

2007년 가을, 나는 국내 의병전적지 답사에 앞서 고심 끝에 호남지역 답사부터 먼저 시작했다.

조금 배웠다고 하는 사람이 '내 고장 출신 인물'부터 떠벌이며 자기고장 자랑을 잔뜩 늘어놓는다면 어찌 이 나라에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해소가 되겠는가.

나는 그 흔한 승용차도 없이 다니는 초라한 답삿길이었지만 호남인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화순에서 만난 행사(杏史) 양회일(梁會一) 의병장 후손 양동하 옹은 내 손을 잡고 고마워했다.

"지난날에는 영호남이 없었어요. 우리 할아버지 행장을 영남 선비가 쓰신다니 더 없는 광영이오."

6개월 남짓 호남지역을 누비며 펴낸 책이 '호남 벌에 휘날리는 창의의 깃발'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이다. 이 책이 나온 지 이태가 지났지만 호남의병 후손들은 나에게 보고 싶다고, 한 번 다녀가라며 틈틈이 전화도 편지도 보내주고 있다.

정초부터 한 번 다녀가라는 편지와 전화를 받고 지난 2월 26일 호남으로 갔다. 창평의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의병장 후손 고영준 씨가 나에게 굳이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후손 이항증 씨와 동행을 간청하기에 두 사람이 서대전역에서 만나 새마을 열차로 광주역에 내리자 고영준, 고재수 두 분이 마중을 나왔다. 거기서 바로 영광으로 가 김용구·김기봉 부자 의병장 후손 김근순 전 대마면장을 만나 함평군 신광면에 있는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관람하였다. 

▲ 임정 내부 집기들 ⓒ 박도


자그마한 면소재지에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정성에 우리 모두 감탄을 쏟았다. 영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갑사에서 잠시 머문 뒤 굴비의 고장 영광에서 굴비백반을 드는데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호남은 어디를 가나 맛깔스런 음식이 풍성한 '미향(味鄕)'이었다.

▲ 영광의 굴비백반 정식(1인당 1만원이라고 했다). ⓒ 박도

이튿날 아침 고영준 녹천 후손의 안내로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용두산 기슭에 있는 만수사(萬壽祠)로 갔다.

안중근 장군 일문인 안종복, 안경순, 안춘섭, 안병만 족친(族親, 같은 성을 가진 일가붙이)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만수사는 장흥에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삶)하고 있는 죽산(竹山) 안씨(순흥 안씨에서 분파)들이 당신들의 선조인 해동공자로 일컫는 고려 충렬왕 때 문성공 안향(安珦, 1243~1306)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운 사당이다.

이곳 안씨 일문들이 1910년 안중근 장군이 여순에서 순국 뒤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제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여러 유지들의 성금을 모아 만수사에다 안중근 장군의 사우(祠宇, 따로 세운 사당)를 지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글을 내려 '해동사(海東祠)'로 명명(命名)케 되었다는 아름다운 얘기를 족친들이 들려주었다.

이 날 봄을 재촉하는 단비를 맞은 만수사 일대는 더욱 청아하고 고즈넉했다. 우리 일행은 족친들의 안내로 해동사에 든 뒤 '義士 安重根(의사 안중근)'위패 앞에 분향재배했다.

▲ 안중근 장군의 사당(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해동사 앞에서 참배객 일동 ⓒ 박도


돌아오는 길, 고영준씨가 당신이 태어난 마을인 장흥읍 평화리 마을로 안내했다. 큰댁 장흥 고영완 가옥은 전남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집이었지만 집주인 고병선 씨 홀로 쓸쓸히 지키고 있어 썰렁해 보였다. 아무리 아름다운 집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광채가 없음을 새삼 느꼈다.

▲ 장흥읍 평화리에 있는 고영완 고택인 정화사 ⓒ 박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는 몹쓸 유산

광주에 이르러 포충사에 들렀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을 모신 사당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야 고영준씨가 왜 굳이 이항증씨를 초대한 까닭을 알았다.

두 집안은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항일 명문으로 이미 400여 년 전부터 서로 세교가 있었다. 곧 제봉의 큰 며느님이 안동 임청각을 지은 고성 이씨 이명(李洺)의 증손녀이고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서애 유성룡 형수도 고성 이씨로, 이들 집안은 사돈에 겹사돈으로 지역을 초월하여 혈맹을 맺고 있었다.

"안동의 퇴계(退溪) 선생은 돌아가실 때 당신 제자가 무려 300여 명으로 시호를 받은 제자만 30여 명이 되었지만 굳이 당신 묘갈명(墓碣銘, 묘비의 비문)을 호남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부탁하였으며, 독립운동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선생도 당신의 묘갈명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선생에게 맡길 정도로, 내 고장 문사보다 다른 지역 문사를 더 우대했습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지역감정이 없었는데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해서 부추긴 때문입니다. 이 몹쓸 망국 유산을 다음 세대까지 물려줄 수는 없지요."

안동 임청각의 주인인 이항증씨의 말이었다. 이씨의 손을 굳게 잡은 고영준씨가 화답했다.

"미국, 중국을 이웃마을 가듯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세상에 지역을 가르고, 계층을 가르는 짓은 시대를 역행해도 한참 역행하는 몹쓸 짓이지요. 우리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나서서 독립운동을 하신 선열들의 뜻을 받들어 깊은 골을 메워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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