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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까지 와서 피자를 먹다니...

[1박 2일 제주여행 ①] 준비 없이 떠나 엉망이 된 여행

등록|2010.03.03 13:20 수정|2010.03.03 13:20

▲ 제주도 가는 카페리. ⓒ 전용호


확실히 예약된 건 여객선 표 하나

제주 여행을 준비했다. 배를 타고 제주에 들어갔다 나오는 1박 2일 일정. 지난해 말 15년 만에 개방한 한라산 돈내코 탐방로를 올라볼 계획이었다. 물론 전날은 애들이 좋아하는 제주에서만 즐길 수 있는 체험도 준비했다.

다른 곳은 차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이곳은 일단 무장해제를 하고 들어가야 한다. 여행준비에 너무 게을렀나? 확실한 건 제주도 들어가는 여객선 하나 예약되었다는 것. 숙소도 렌터카도 구하지 못했다. 렌터카 예약은 너무 늦게 했는지, 황금연휴(2.28~3.1)에 렌터카가 남은 게 없단다.

차를 가져갈까 고민했지만, 차를 싫어 나르는 운임이 만만치 않다. 왕복 삼십만원 정도는 생각해야…. 그럴 바엔 제주 가서 택시 타고 다니지. 숙소는? 정 없으면 찜질방에서 자면 되지. 설마 잘데 없겠어.

3등 객실은 사람들로 북적북적

그렇게 떠난 2월 27일 여행 당일 아침.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심 걱정이다. 애들과 함께 가는 여행. 요즘 부쩍 투덜거리는 큰애도 걱정이다. 새벽, 부스스한 어둠을 뚫고 고흥 녹동항으로 달려간다. 날씨가 흐리다. 고흥반도를 달릴 때면 산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여유 있게 도착한 녹동항은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 카페리 3등 객실 풍경. ⓒ 전용호


여객선 표는 미리 팔지 않는다. 예약만 될 뿐이다. 당일 출발 전에 매표를 한다. 승선권은 제일 싼 3등 객실이다. 객실등급 만큼이나 삶의 수준도 등급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부담 없이 갈 수 있어 3등 객실을 이용한다. 표를 사고 선실에 들어서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북적거린다. 3등 객실을 이용할 때에는 돗자리 필수. 바닥이 차다.

단체 관광을 가는 분들은 아침부터 술판을 벌인다. 담요까지 준비해와 화투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에서 애들과 탑쌓기 놀이를 하는 가족까지 다양한 놀이를 한다. 우리 가족은 먹을 것만 준비해왔다. 자리를 펴고 일찍 출발하느라 못 먹은 아침을 대신한다. 준비한 것도 소박하다. 빵, 삶은 계란, 땅콩 등등.

비는 내리고, 차는 없고…

배는 녹동항을 뒤로 하고 제주로 향한다. 섬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물을 가르고 나간다. 물빛이 검다. 날이 맑으면 좋으련만…. 처음은 설레는 마음으로 바다 경치구경하다가, 똑같은 바다 보는 것도 지쳐서 선실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 즐길 거리를 가져오는 건데.

4시간 걸려서 제주항에 도착했지만, 접안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30여분 늦어진다. 배에서 내리니 비가 내린다. 난감하다. 차가 없으니 당장 불편하다. 택시를 잡기 힘들다. 택시마저도 장거리 손님만 기다리느라 태워주지 않는다. 도로를 따라 걷는다. 시작부터 씁쓸하다.

▲ 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 길 ⓒ 전용호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터미널로 향한다.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도 지났다. 터미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골목에 있는 갈비집으로 들어섰다. 아내가 "제주 왔으면 특별한 걸 먹어야지. 똑같은 걸 먹어?"하며 불만이다. 간단하게 갈비탕을 먹으러 들어섰는데 작은애가 갈비가 먹고 싶단다. 주인 할아버지는 "제주돼지는 쇠고기보다 더 맛있어요"라며, 먹어보란다. 정말 맛있다.

제주사람들의 여유가 느껴지는 구멍 숭숭 뚫린 돌담

제주도에서 첫날 계획은 서귀포로 넘어가서 열기구 체험도 하고, 쇠소깍에서 테우도 태워주려고 했는데, 날씨가 안 좋아 모두 영업을 하지 않는단다. 난감하다. 렌터카도 빌리지 못했는데. 애들은 불만이 심하다.

"오늘 파업할 거예요." "그럼, 너희가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해." "미로공원 가요."

순간 머리가 띵하다. 터미널에서 물어보니 만장굴 입구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된단다. 그래 가보자. 제주 동부노선 버스를 타고 만장굴 입구로 간다. 비가 많이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비옷을 입고 미로공원으로 걷는다.

▲ 제주 돌담. 구불거리며 이어가는 검은 돌담이 아름답다. ⓒ 전용호


▲ 제주 돌담. 구멍이 숭숭 뚫린 담을 쌓았다. 어찌보면 위태롭게도 보인다. ⓒ 전용호


비가 오지만 춥지 않아서 걸을 만하다. 길가로 밭을 경계 짓는 돌담이 운치가 있다. 돌담은 자연석 돌멩이를 맞춤 없이 올려놓았다. 구멍이 숭숭 뚫렸다. 바람이 지나가라고 여유를 부렸나. 무너질 것 같은데. 제주사람들의 여유가 있다.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된다는 여유? 검은 돌담 안으로 파릇파릇 봄빛이 넘쳐난다.

집 나오면 개고생

미로공원까지는 생각보다 길다. 1.5㎞ 정도. 협죽도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다. 적당히 구불거리며 이어진 길은 정감이 있다. 아름다운 길이다. 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 걷기에 좋다. 비만 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걸. 애들은 빗길을 걷는 게 색다른 즐거움인가 보다. 잘 걸어간다. 일부러 올레길도 걷는다는데.

▲ 미로공원 가는 길. 비에 촉촉이 젖어 아스라한 아름다움이 있다. ⓒ 전용호


▲ 이건 올레가 아니다. 미로공원까지 비옷을 입고 걷는다. ⓒ 전용호


▲ 미로공원 ⓒ 전용호


미로공원. 빗속에도 비옷을 입고 많은 사람들이 미로를 헤맨다. 작은 애는 길을 다 외웠다며 따라오라 한다. "단 번에 찾으면 너를 천재로 인정하마." 빙빙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몇 번. 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진 단순한 길이지만 애들에게는 너무 즐거운 공간인가 보다.

만장굴도 둘러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늦었다. 택시를 불렀다. 지금은 차가 없으니 30분 정도 기다리란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전화했더니 차가 없단다. 다시 걸어 나왔다. 애들에게 미안하다. 즐거운 여행이 생고생하는 여행으로 돌변. 즐겁게 여행을 왔는데….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제주도까지 와서 피자를 먹다니

버스를 탔다. 서귀포까지 두 시간 걸린단다. 동부 해안도로를 따라가면서 마을마다 들렀다 간다. 버스 요금도 신기하다. 김녕에서 3천원 주고 탔는데, 한참을 가다가 타는 손님도 3천원이다. 제주도 어디를 가나 최고 요금이 3천원이란다. 거리가 짧아지면 구간별 요금으로 받는다. 2천원도 받고, 천오백원도 받고.

숙소가 정해지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기사 아저씨에게 물었더니 뒤에 타신 아주머니께서 숙소를 소개해준다. 찜질방 신세는 면했다. 주인 아저씨가 너무 친절하다. 서울에서 교수하시는 분인데 잠시 내려와 쉬고 있단다. 여관비는 조금 비싸도 침구가 깨끗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내일 새벽에 한라산 간다고 했더니 차로 태워주신단다.

▲ 우리가 머문 숙소는 다녀간 외국인 여행객들의 방명록이 가득하다. ⓒ 전용호


저녁을 먹지 못했지만, 나가서 먹기에는 시간이 늦어버렸다. 결론은 시켜먹자. 그래서 선택한 게 피자.

"야! 제주도까지 와서 피자를 먹다니."

그렇게 준비 없이 온 제주여행의 하루를 보냈다. 배타는 것 빼고 전혀 다를 것 없는 제주도 여행. 피곤해서 잠은 잘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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