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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재벌 2세', 대한민국엔 없습니다

[TV리뷰] <부자의 탄생>, 캐릭터는 신선한데 현실감 떨어져

등록|2010.03.03 09:43 수정|2010.03.03 19:11

▲ KBS 새 월화드라마 <부자의 탄생>. ⓒ KBS


지난해 이맘 때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궜던 2편의 드라마가 있었다. KBS <꽃보다 남자>와 MBC <내조의 여왕>이 바로 그 주인공들. 이들 드라마는 3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고, 그 중심에는 구준표(이민호 분)와 허태준(윤상현 분)이 있었다.

이 두 캐릭터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드라마가 끝난 후 이들을 연기했던 이민호와 윤상현은 작품 하나로 순식간에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섰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두 캐릭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재벌이었다는 점이다.

극중에서 구준표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를 아우르는 대기업 신화그룹의 상속자였고, 허태준은 국내 굴지의 식품기업인 퀸즈푸드의 오너였다. 이들은 때때로 자신이 가진 막대한 부와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돼줬고, 시청자들은 그런 그들의 매력(이라고 쓰고 '경제력'이라고 읽는다)에 푹 빠져들었다.

이처럼 재벌과 소시민의 신분과 격차를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 이른바 신데렐라 스토리는 꾸준히 반복되어 오면서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양반과 노비의 구분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민주사회가 도래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경제적 격차로 인한 새로운 신분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어쩌면 시청자들이 재벌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부자의 탄생> '부'에 대한 욕망, 너무 노골적이다

▲ 최석봉(지현우 분)은 동료들에게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 KBS 화면캡쳐


조선시대에 평민이 돈을 벌어 양반 신분을 사 양반 행세를 하고 다녔듯,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사회에서 성공하고 돈을 벌어 '부자'라는 신분을 사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바란다고 모두 부자가 될 순 없는 일. 드라마 속 재벌은 부자가 되고 싶은 대중의 욕망을 대리만족시켜주는 존재로 작용한다.

새로 시작한 KBS 월화드라마 <부자의 탄생>은 그런 면에서 대중의 욕망을 좀 더 노골적으로 건드린다. 자신이 재벌의 아들이라고 믿는 최석봉(지현우 분)은 실제로는 옥탑방에 살며 월세조차 밀려 있는 가난한 처지이지만, 언젠가는 아버지를 만나 재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재벌의 아들이기 때문에 언젠간 자신 역시 재벌이 될 것이라고 믿는 그는 현재 가지지 못한 부에 대한 욕망을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마치 자신이 부자인양,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을 따라 읽고, 주식 투자에 관심이 많으며, 동료들에게 "부자가 되고 싶다면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대로 따라 해라"는 식의 충고를 하기에 이른다.

이런 석봉의 캐릭터는 기존의 재벌 드라마에서 신데렐라 역할을 연기했던 캐릭터와는 대조되는 것이었다.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구혜선 분)나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 분), 그리고 <부자의 탄생>과 같은 역(易) 신데렐라 이야기 구조였던 KBS <아가씨를 부탁해>에서의 서동찬(윤상현 분)까지, 이들은 모두 부자나 재벌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욕망 자체가 없었다.

할인쿠폰 갖고 다니는 재벌 상속녀? 신선하긴 하네

기존의 캐릭터들이 돈이나 부에 신경 쓰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욕망을 속물이라 여기고 터부시했던 것과 다르게 석봉은 '돈', 그 자체에 연연한다. 팁을 받으려고 손님 앞에서 한참을 서 있기도 하고, 내기에서 딴 돈은 철저하게 챙기며, 보너스를 100%나 준다는 말에 모두가 꺼려하는 일에 자원한다. 결국 그가 이신미(이보영 분)와 엮이게 되는 것도 자신의 목숨 값인 1억 원을 벌기 위해서였다.

석봉과 사사건건 부딪히며 그와 러브라인을 만들어갈 여자 주인공 이신미 역시 기존의 재벌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캐릭터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오성그룹의 하나 뿐인 상속녀. 상속 유산만 4천억 원에 달한다는 그녀는, 그러나 "내 돈이든 남의 돈이든 돈 새는 꼴은 못 본다"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는 굉장한 자린고비다.

대개 드라마에서 재벌 2세를 묘사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재산을 믿고 방탕하게 사는 멍청이 형과, 착실하게 부를 불려나가는 똑똑이 형, 그리고 첫 번째였다가 깨달음을 얻어 두 번째가 되는 환골탈태 형까지, 대개 이 3가지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묘사하거나 재벌이 근검절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신미의 자린고비 캐릭터는 신선하다. 지갑 안에는 할인쿠폰이 잔뜩 들어있고, 화장품 가방 안에는 명품 화장품 대신 샘플이 가득이다. 운전기사에게는 기름이 많이 닳는다는 이유로 브레이크를 적당히 밟으라고 소리치고, 호텔 곳곳을 돌아다니며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는 건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실로 신개념 재벌 2세 캐릭터로 부를 만하다.

설득력 없는 드라마는 시청자 마음 못 돌린다

▲ 이신미(이보영 분)의 돌발행동은 그녀를 유능하거나 카리스마 있게 보이게 하는 데 실패했다. ⓒ KBS 화면캡쳐


4명의 주인공 가운데 3명이 재벌인 <부자의 탄생>에서 캐릭터와 서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재벌에 대한 묘사다. 재벌들의 이야기, 상류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리얼리티가 뒷받침되지 않는 묘사는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 물론 <꽃보다 남자>에서 그랬듯 만화적 상상력을 가미하여 과장되고 판타지스럽게 그려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무대가 학교였고, 주인공들이 모두 학생이었던 <꽃보다 남자>와는 다르게 <부자의 탄생>에서 주인공들은 성인이며 대부분 경영 일선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위치에 있다. 그들의 사적인 생활에 대한 묘사는 상상력이 가미될 수 있을지언정, 일을 해나가는 공적인 영역의 모습이 과장되거나 엉터리로 그려진다면 몰입도는 떨어지고 이야기에 대한 흥미는 반감된다.

그런 면에서 <부자의 탄생>이 우려스러운 것은 주인공들의 일처리가 전혀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 그려진다는 데에 있다. 1회에서 신미는 오성그룹에서 새로 인수합병한 회사의 임직원이 합병을 반대하자 시위 현장에 찾아간다. 그녀가 일자리를 잃을 것을 걱정하는 직원들에게 고용 보장을 약속하고 그들을 설득한 방법은 생뚱맞게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이었다.

인수합병을 반대하는 임직원의 서명이 담긴 서류들은 하늘 위로 던져 버리고 종국에는 머리카락을 자르며 "월급 받고 싶은 사람은 내 뒤에 줄을 서라"며 그들을 협박(?)했다. 어딜 봐도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이 우스꽝스러운 협상 광경을 통해 신미는 단신으로 어려운 일을 해결해내는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재벌 2세로 그려졌다.

이러한 장면들은 물론 오성그룹의 후계자인 신미를 돋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장치로 준비되었지만 그 기능을 제대로 소화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과연 시청자들은 신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부자의 탄생>이 시청자의 공감을 사기 위해서는 좀 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야 한다.

<부자의 탄생>, 진정 부자되는 법 알려줄까

석봉은 부자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아마도 그건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동료들을 향해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브라운관 너머 드라마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던지는 말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부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회. 부자라는 신분을 사기 위해 무한경쟁의 시스템 속에서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사람들. 한층 더 살벌하게 가속화된 경쟁 시스템만큼이나 드라마 역시 한층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부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부자의 탄생> 속에는 진정 부자가 되는 방법이 들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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