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94) 희미
[우리 말에 마음쓰기 872] '소리가 희미해지고' 다듬기
- 희미
.. 이제 워낭 소리가 희미해지고, 다시 거센 물소리가 들렸다. 루디는 계속 걸었다 .. <제임스 램지 울만/김민석 옮김-시타델의 소년>(양철북,2009) 10쪽
┌ 희미(稀微)하다 : 분명하지 못하고 어렴풋하다
│ - 희미하게 웃다 / 기억이 희미하다 / 목소리가 작아 희미하게 들린다 /
│ 기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 어둠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그의 얼굴
├ 희미(熹微)하다 : 햇빛이 흐릿하다
│ - 싸늘한 햇살이 희미하게 꺼져 가고 있었다
│
├ 워낭 소리가 희미해지고
│→ 워낭 소리가 잦아들고
│→ 워낭 소리가 멀어지고
│→ 워낭 소리가 가물거리고
│→ 워낭 소리가 거의 안 들리고
└ …
'분명(分明)하지' 못하다고 하는 뜻을 나타내는 한자말 '희미'입니다. '분명'은 "틀림없이 확실(確實)하게"를 뜻합니다. 한자말 '확실'은 "틀림없이 그러함"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분명'이라는 한자말은 "틀림없이 틀림없음"을 뜻하는 셈입니다. 말풀이가 영 엉터리입니다.
모름지기 한 나라를 대표한다고 하는 국어사전이라 한다면, 아니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어사전이 아닐지라도 국어사전이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있으려면 이와 같은 엉터리 말풀이를 담아서는 안 됩니다. 옳지 않습니다. 옳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한테 바르고 알맞게 말을 익히도록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말동무가 되지 못하고 말스승이나 말배움책이 되지 못합니다. 말곳간 노릇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이를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이를 알아채서 꾸짖거나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러한 엉터리 국어사전은 하루아침에 바뀌거나 바로잡혔을 텐데, 아직까지 바뀌거나 바로잡히는 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르는 노릇이나, 꾸짖거나 나무라는 사람이 있어도 바꾸지 않거나 바로잡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하지 않다면 얄딱구리한 말풀이가 버젓이 국어사전에 실린 채 수십 해를 이어올 까닭이 없을 테니까요.
이러구러 살펴보건대, '희미 → 분명하지 못함 / 어렴풋 → 틀림없이 / 확실 → 틀림없이'가 되어, '희미'란 "틀림없이 않음"이나 "어렴풋함"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리고, '틀림없이'와 '어렴풋함'을 헤아리면서 '흐림'이나 '흐릿함'이나 '또렷하지 않음'이나 '뚜렷하지 않음'이나 '환하지 않음' 같은 말마디로 우리 느낌과 뜻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 희미하게 웃다
│→ 살며시 웃다 / 빙그레 웃다 / 어렴풋이 웃다 / 엷게 웃다
├ 기억이 희미하다
│→ 기억이 어렴풋하다 / 기억이 가물거리다 /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
├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 어렴풋이 들린다 / 살짝 들린다 / 작게 들린다 / 들릴 듯 말 듯하다
└ …
국어사전에 실린 보기글을 하나하나 짚어 봅니다. 웃음을 가리키는 자리에 쓰인 '희미'란 '살짝'이나 '살며시' 자리에 끼어든 셈입니다. 우리는 웃음을 '희미하게'이든 '흐릿하게'이든 짓지 않습니다. '살짝' 웃음짓거나 '엷게' 웃음짓거나 '빙그레' 웃음짓습니다.
떠올리는 생각을 가리키는 기억을 놓고 보아도 그렇습니다. 기억이란 '어렴풋하'거나 '가물거리'거나 '흐릿하'다고 이야기해야 알맞습니다. 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나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소리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작게'나 '어렴풋이'나 '살짝'을 넣어야 잘 들어맞습니다. 때때로 '모깃소리처럼 작게' 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게'나 '어렴풋이' 앞에 요모조모 꾸밈말을 넣으면서 느낌을 사뭇 달리할 수 있어요. 무서운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든 채 말하는 소리라 한다면 '개미 목소리'로 빗댈 수 있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라 해도 됩니다.
┌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 희미한 불빛 → 엷은 불빛 / 가느다란 불빛 / 어렴풋한 불빛 / 흐릿한 불빛
└ 희미하게 드러나는 → 어렴풋이 드러나는 / 살며시 드러나는 / 찬찬히 드러나는
이 보기글에서는 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있기에, 이 느낌 그대로 '멀어지다'나 '잦아들다'나 '수그러들다' 같은 낱말을 넣어야 알맞습니다. 모든 낱말은 어울리는 자리가 있고, 알맞게 넣을 곳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부터 써 온 말마디는 저마다 알맞춤한 자리가 있어요. 말 한 마디를 읊든 글 한 줄을 적든, 내가 나타내려 하는 낱말이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내 느낌을 제대로 담고 있는지 돌아보고, 내가 이 낱말로 담아낸 느낌을 맞은편에서 제대로 알아차리고 있는지 헤아려야 합니다. 되는 대로 읊는 말이 아니요 아무렇게나 쓰는 글이 아니라 한다면, 가장 맑고 따뜻하며 곱고 쉬운 낱말을 찾아서 써야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을 쓴 분이나 국어사전을 엮는 분들한테는 '희미'라는 한자말이 가장 맑거나 따뜻하거나 곱거나 쉬운 낱말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 숱한 사람들로서는 '희미'라는 말만큼 맑거나 따뜻하거나 곱거나 쉬울 낱말이 없을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들어 온 낱말일 수 있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흐뭇하게 쓰던 낱말일 수 있습니다. 한자말이고 아니고를 떠나 살갑고 반갑고 괜찮은 낱말일 수 있어요. 저로서는 '희미'라는 낱말이 그리 익숙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러한 낱말을 쓸 까닭을 따로 느끼지 못합니다. 때와 곳에 따라 수없이 달리 쓸 만한 좋은 낱말이 많은데, 이런저런 말마디를 밀어젖히고 '희미' 하나를 어설피 뭉뚱그려서 쓰고프지 않습니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또렷하게 나누고 싶습니다. 글 한 줄을 쓰더라도 환하게 적바림하고 싶습니다. 말 한 마디마다 환한 마음을 담고 싶습니다. 글 한 줄마다 빛나는 넋을 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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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