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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쌍용차 다닌 분들은 받지 않습니다"

[현장] '고용특구' 평택에서 만난 쌍용차 해고자들

등록|2010.03.08 16:55 수정|2010.03.15 15:16
김태준(가명)씨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중장비 학원으로 갑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푹 잠들 수 있다면……. 밤새 몸을 뒤척이다 새벽을 맞곤 합니다. 그날 이후, 김태준씨의 밤은 악몽과 끝없는 사투입니다. 잠에서 깨면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입니다. 어김없이 새벽은 밝아오지만 삶은 어두운 밤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밤이 무섭습니다. 지난여름 이후….

중장비 학원에서

김태준씨는 학원에서 지게차와 굴착기를 운전하는 시간만은 모든 걸 잊으려고 노력합니다. 어서 빨리 중장비 자격증을 따는 것이 지루한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이기에. 김태준씨는 쌍용자동차 해고자입니다. 자신이 왜 해고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스무 해를 다녔던 쌍용자동차는 김태준씨의 첫 직장입니다. 어느 날, 산자와 죽은 자로 공장 동료들이 나뉩니다. 김태준씨는 죽은 자가 됩니다. 이력서에 적을 내용이라고는 '쌍용자동차 20년 근무' 밖에 없는 마흔 여섯의 김태준씨. 중장비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해야 남편으로 아버지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 지난해 8월 3일 오후 쌍용자동차 노사협상이 사측의 결렬선언으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쌍용차 가족대책위와 인권단체 회원들이 파업 노조원들에게 물과 의약품을 공급하기 위해 공장 집입을 시도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해 쌍용자동차를 떠난 사람은 3천 명에 이릅니다. 누구도 공장을 떠나고 싶어 나간 사람은 없습니다. 희망퇴직 혹은 정리해고. 어느 쪽도 선택이 아닙니다. 날벼락처럼 덮친 운명. 그날 이후로 발을 뻗고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숱합니다. 김태준씨처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어찌 살고 있을까? 반년이 지난 2010년 2월 평택을 찾아갑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도시. 이성보다는 야만이 지난여름을 불지옥처럼 달군 쌍용자동차. 물이 그리운 이들에게 하늘은 한 방울의 비도 허락하지 않았던 곳. 헬기의 괴성과 방패를 시멘트 바닥에 내리찍는 소리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외침을 집어삼킨 전쟁터.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운전을 하건만 몇 번이고 쌍용자동차로 가는 길을 놓칩니다.

이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뇌출혈로, 심근경색으로, 때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사람들. 목숨이 아직 살아있는 해고자들은 발버둥을 칩니다. 살아남기 위해. 인력시장을 통해 공사장 잡부로 나갑니다. 밤을 지새우며 올빼미처럼 대리운전을 합니다. 시급 4천5백원을 받으며 택배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죽은 자'의 멍에에서 도망치려고 일자리를 찾아 아등바등합니다. 발이 닳도록 고용센터를 들락거리며 이력서를 쓰지만 입사는커녕 면접 보러오라는 소식조차 없습니다. 다니던 학원을 그만둔 자식들, 식당으로 옷 가게로 돈벌이를 나가는 아내를 보며, 무능한 자신의 가슴에 못질을 합니다.

쌍용자동차 정문에서

▲ 또 다시 공장 앞에 선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 오도엽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올해 마흔둘의 이영호씨. 부모님도 아내도 이젠 쌍용이라는 회사가 싫으니 인연을 끊으라고 이영호씨에게 '강요'합니다. 하지만 이영호씨는 공장에서 함께 쫓겨난 동료들을 만나러 집을 나섭니다.

2월 25일 오전 7시 30분, 비 내리는 쌍용자동차 정문 앞. 예전에 한솥밥을 먹었던, 다행히 '살생부'의 명단에서 빠져 살아남은 이들이 바쁘게 공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유난히 큰 눈으로 정문 앞을 바라보는 이영호씨의 얼굴이 촉촉이 젖습니다. 비가 내려 다행입니다. 빗물이 설운 눈물을 지웁니다.

"쌍용자동차 사태로 평택이 고용특구로 지정됐는데, 실제로 (실직자들이) 받는 혜택이 없어요. 평택시와 노동부 통계를 보니까 쌍용자동차 실직자 가운데 지난해 연말 기준으로 650명 정도가 취업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이 가운데 30% 자영업이고. 나머지 취업한 사람들 대부분은 구인구직 프로그램으로 취업된 것이 아니고 친인척이나 아는 사람을 통해 취업했어요. 그 가운데 70명은 다시 직장을 그만뒀어요. 지금 1700-1800명이 실업 상태로 있는 거예요."

정부는 2009년 8월 13일 평택을 고용개발촉진지역으로 지정합니다. 노동부와 평택시가 쌍용자동차 실직자들의 재취업을 돕겠다고 떠들지만 성과는 초라합니다. 이력서에 쌍용자동차 경력이 들어가면 아예 면접 볼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현실의 장벽이 두툼하게 놓여 있습니다.

미군기지 건설현장에서

▲ 수많은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이제 공장이 아닌 건설현장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 오도엽

최철호(가명)씨. 거짓말 보태지 않고 백군데 가까이 이력서를 넣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도 연락이 오지 않습니다. 최근에 쌍용자동차 근무한 내용을 빼고 이력서를 넣자 한 중소기업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들뜬 마음으로 달려갔지만 참혹한 말에 기가 죽습니다.

"쌍용차 다닌 걸 빼니까 면접 보러 오라 하더라고요. 갔더니 어찌 알았는지, 왜 쌍용차 다닌 것을 쓰지 않았냐고 묻더라고요. 하도 취업이 안 돼서 그랬다고 했더니, 쌍용차 다닌 분들은 받지 않는다고, 미안하다 그러며 가라 하더라고요."

이후로 최철호씨는 이력서를 쓰지 않습니다. 이력서를 쓸 필요가 없는, 몸뚱이가 이력서가 되는 건설현장을 찾아갑니다. 최철호 씨는 평택 미군기지 건설현장에 자주 갑니다.

그곳에 일하는 일용잡부 가운데 백여명은 최철호씨와 함께 공장에서 일했던 쌍용자동차 동료들입니다. 이들과 마주치기 싫어 안산이나 송탄의 아파트 공사현장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심심찮게 동료들과 마주칩니다. 반가움보다는 계면쩍은 마음이 앞서 서로를 외면합니다.


"아니 쌍용자동차 다닌 게 무슨 죕니까? 20년을 쌍용차에 다녔어요. 이력서에 쓸 게 없어요. 쌍용차 빼면은. 고용특구 지정하면 뭐합니까? 희망퇴직을 했든 정리해고를 당했든 상관없어요. 파업에 참여했든 안 했든 관계없이 쌍용자동차에 다녔다면 무슨 폭력집단에 있었던 사람처럼 색안경을 쓰고 보니 어디 취업이 됩니까? 이젠 더러워서 이력서 안 씁니다."


최철호씨는 작업복 가방을 어깨에 힘겹게 걸고 집으로 갑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공친 날입니다. 혹시나 하며 작업복을 챙겨 집을 나섰지만 역시나 오늘 하루 그가 팔릴 현장은 없습니다. 공친 날, 대낮에 텔레비전을 켜고 멀뚱히 앉아 아내와 자식 얼굴을 맞이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터질 것 같습니다. 소주 한 병을 사서 작업복 가방에 쑤셔 넣습니다.

로또 복권 앞에서

▲ 지난해 8월 4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농성중인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진압작전이 시작된 가운데 도장공장 앞 바리케이드를 사수하기 위해 나온 농성노동자들이 물대포를 피하고 있다. ⓒ 권우성


올해 마흔의 정완석씨도 쌍용자동차에 16년을 다니다 해고되었습니다. 만약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민을 가겠다"고 합니다. 정완석씨는 이 땅이 왜 지긋지긋할까?

"내가 왜 해고가 된 건지 모르는 거예요. 내가 회사 물건을 빼돌리다 걸려서 해고되면 이해가 되는데 그냥 조용히 십육년동안 일만 했어요."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사람들 대부분 자신이 왜 해고가 됐는지 모릅니다. 소방호스에서 질금질금 흐르는 물로 양치질을 하며, 주먹밥으로 한 끼를 때우고, 최루탄과 경찰의 방패와 곤봉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며, 77일간 자신의 몸을 공장에 묶은 채 고통을 당한 까닭은 내가 왜 해고가 되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물음표로 남아있습니다.

"막대한 힘과 돈을 풀어서 이념전쟁을 시킨 거하고 똑같더라고. 전쟁. 공장 안의 남북전쟁. 산 자와 죽은 자를 만들어,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의식을 퍼뜨려가지고 니들 때문에 회사가 망했다, 선전하는 거지. 산 자들에게는 니들이 나서서 쟤들을 무찔러야 산다, 그러며 노동자끼리 싸우게 만들고 말이에요. 처음에 병아리였죠. 내가 왜 해고를 당해야 하지? 병아리 같은 마음으로 출발했다고. 근데 점점 지나면서 회사가 싸움닭을 만들더라고. 싸움닭이 나중에는 공룡이 되고, 공룡이 괴물이 되고, 이제 마녀사냥을 해가지고 폭도들이다, 쉽게 말하면 반정부세력이다, 이런 쪽으로 몰아가는 거야. 그리고 벼랑으로 뚝 떨어뜨리는 거야."

김태준씨는 지난해 이념전쟁을 치렀다고 합니다. 해고자들이 취직이 되지 않은 이유는 '선입견' 때문입니다. 해고를 당하자 일하고 싶다며 병아리 같은 마음으로 나선 이들을 공권력과 경영진들은 붉은 페인트로 도배질 합니다. 쌍용자동차를 망치고 한국경제를 무너뜨리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으로 덮어씌웁니다.

개인택시 앞에서

▲ 지난해 8월 6일 밤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77일간 점거농성을 벌였던 노동자들 중에서 귀가조치된 한 노동자가 경찰버스에 태워져 평택역 광장에 내린 뒤 아이를 안고 귀가하고 있다. ⓒ 권우성

여주가 집인 김길용(가명)씨는 쌍용자동차 기숙사에 머물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며 쌍용자동차에 다녔습니다. 지금은 해고자이자 실업자입니다. 개인택시를 할까 싶어 택시 면허를 땄지만 1억이라는 돈이 있어야 개인택시를 살 수 있다는 말에 포기합니다. 아내가 학교 보조교사로 나가 한달에 오십만 원을 벌고 있습니다. 백십만 원씩 받던 실업급여는 오는 4월 22일이 되면 끊깁니다. 그전에 어떤 일자리든 구해야 하는데, 앞날이 깜깜합니다.

"저 같은 경우도 지금 잠을 못자요. 회사에서 받은 배신감이 떠나지 않아요. 아침까지 잠을 설치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멍하니 있는 거예요. 걱정이 되어서. 무얼 하긴 해야 되는데 받아주는 데는 없고, 그렇다고 해서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니던 학원을 그만 둔 자식들을 보고 있자면 김길용씨 가슴은 미어터집니다. 좀 못 먹고, 못 입더라도 자식들이 배우고 싶은 것은 어떻게든 가르치겠다는 마음으로 허리띠를 졸라맨 김길용씨. 이제는 학원비가 아니라 급식비를 고민해야 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올해 마흔살인 최영호씨는 지난 2월 12일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최영호씨는 자신이 석방되어 집에 돌아간 날, 책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집에 딱 갔는데 그게 있더라고요. 책상 위에 대출, 신용대출 용지가 있더라고요. 아내가 쓰지는 않았는데 어디서 받아놨는지 그게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아, 마음이……, 지금도 계속 씁쓸하죠."

신용대출 신청서 앞에서

자신이 없는 동안 신용대출 신청서를 눈앞에 두고 수십번을 멈칫멈칫 했을 아내. 최영호씨는 직장을 구하는 일보다 아내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게 먼저입니다. 아내는 최영호씨에게 애원했습니다. 그깟 회사 그만두고 희망퇴직하고 나오라고. 아내는 물었습니다. 가정이 우선이냐, 동료가 우선이냐? 최영호씨는 희망퇴직 대신 부당한 해고에 맞선 파업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은 해고자 낙인 위에 전과자 낙인을 더 찍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의 선택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서운함마저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걸 최영호씨는 압니다.

고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이 지금의 아내입니다. 칠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고, 이제 이십년지기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인생을 걷고 싶습니다. 석방된 뒤로 집에서 설거지와 청소를 도맡아 합니다. 너무 가까운 존재라 잊고 지냈던 아내에게 다시 이십년 전 첫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합니다.

병역의무를 마치고 쌍용자동차에 입사했을 때 최영호씨의 소망은 소박합니다. 이곳에서 평생 일하고 싶다.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서 아이들도 키우고 노후를 준비하겠다. 쌍용자동차에서 쫓겨나는 순간, 그 꿈은 흐릿하게 사라집니다. 이제 어떻게든 살아남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옥쇄는 봉쇄가 되고

▲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꿈은 여전히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 오도엽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아직 비가 내립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의 삶을 취재할 때가 '아직은' 아닙니다.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해고자이고, 이들이 내민 이력서에는 '사회에서 추방'이라는 붉은 낙인이 여전히 찍혀 있습니다. 처참한 절망을 확인, 또 확인하는 과정이 되풀이 되고 있을 뿐입니다.

77일간의 옥쇄파업은 공권력과 자본의 무자비한 공격을 받아 끝이 났지만, 해고노동자들은 정부의 약속과 달리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파업 이후, 쌍용자동차 해고자의 삶은 세상에서 봉쇄되었습니다. 다시 옥쇄를 선택할지 모릅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 사라지는 것마저도 '봉쇄'된 이들의 삶 앞에 따뜻한 봄비가 되지 못하는 차가운 겨울비가 억수로 쏟아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참세상, 레디앙, 프레시안에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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