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선생님, 학교를 어쩌시려는 건가요?
경기도교육청 지정 혁신학교로 개교한 용인 흥덕고의 실험
▲ 학생총회학생총회에서 마음에 드는 이야기들이 나올 때마다 학생들은 박수와 환호로 공감과 동의를 표시했다. ⓒ 임정훈
지난 5일 오후, 경기도 용인의 한 학교에서는 이색적인 만남과 토론의 시간이 마련됐다.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혁신학교'로 지정된 흥덕고등학교의 '새내기 예비학교' 프로그램 둘째 날 행사가 열린 것.
학생 수 146명에 교원 16명(교장 · 교감 포함)으로 지난 4일 개교한 흥덕고는 4일 첫 입학식을 했다. 5일에는 오전 일정을 마치고 오후 6시부터 진행된 학생총회에서 두발규정, 휴대폰 사용, 액세서리 착용, 보충 · 자율학습 운영 방법 등을 두고 토론이 이루어졌다.
흥덕고는 혁신학교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교장도 공모제(내부형)를 통해 선발했다. 이에 뜻을 같이 하는 교사들도 초빙됐다. 학교 시스템도 보통의 학교와는 많이 다르다.
우선 교훈도 교가도 없다. 머리길이는 몇 센티미터, 양말 색깔은 ○○ 운운하는 학생생활규정도 없다. 교훈과 교가는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창의적이지도 않고 계몽의 내용을 담은 틀에 박힌 교훈과 교가는 별 의미가 없다는 이범희 교장의 생각 때문이다.
교훈 대신 '참여와 소통을 통한 희망과 신뢰의 배움공동체'라는 학교 경영 기본 방향 아래 '돌봄과 치유의 관계맺기'를 시도한다는 것이다(아래 인터뷰 기사 참조). 학생생활규정은 학생·학부모·교사 등 학교 구성원들의 토론을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5일 저녁에 열린 학생총회는 바로 학생생활규정을 마련하기 위해 학생들의 의견을 모으는 자리였다. 먼저 모둠별로 교실에 모여 한 시간 남짓 의견을 정리한 학생들은 저녁 7시부터 시청각실로 모여 두발규정, 휴대폰 사용, 액세서리 착용, 보충·자율학습 운영 방법 등을 두고 토론한 내용을 발표하고 의견을 모았다.
혁신학교란? |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핵심 공약사업 가운데 하나로 교육 과정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학생의 수업 집중도와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학급당 25명 이하 1개 학년 6학급 이내의 소규모로 운영되는 학교다. 혁신학교에는 교사들이 학생 교육과 상담에 집중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교무보조인력을 두고, 상담전문교사·사서교사·보건교사를 필수적으로 배치하며, 학생들이 쾌적한 조건에서 수업 받을 수 있도록 1학교당 1억 2천만 원(2010년 기준)의 예산을 지원해 수업 여건을 개선하게 된다. 경기도교육청은 혁신학교를 지난해 13개교에서 올해 50개교, 2011년~2012년 100개교로 확대시키고, 2013년에는 전체 학교의 10% 수준인 200개교로 늘릴 예정이며 2014년에는 일반 학교까지 혁신학교 모델을 적용할 계획이다. |
이만주 교사의 사회로 진행한 학생총회에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레 오고갔다.
'두발과 휴대폰은 자유롭게 해 달라' '액세서리는 자유롭게 하되 크기는 적당하게' '안 때렸으면 좋겠다' '심한 염색은 하지 말자' '무단 결석하지 않기' '선생님과 친구들 배려하기' 등 마음에 드는 이야기들이 나올 때마다 학생들은 박수와 환호로 공감과 동의를 표시했다.
이날 정리한 내용들은 3월 중 학부모 총회(17일)를 하고 교사들의 의견을 모아 합동토론을 벌인 후 학교운영위원회를 거쳐 학생·학부모·교사 모두가 동의하는 학생생활규정을 만들게 된다.
자신들의 생활규정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자신들의 의견이 반영된다는 것에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학생총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무렵 이범희 교장이 들어서자 학생들과 이 교장 사이에 즉석 토론이 이루어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신입생 조재인 학생은 "다른 학교에서는 선생님들끼리만 회의해서 결정하고 학생한테 강요하는데 여기는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토론도 해서 규정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상 깊다"면서 "모든 선생님들이 우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수업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흥덕고가 이처럼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학생 인권과 자치가 존중되는 학생 중심의 생활지도'를 우선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체벌은 금지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다. 학생들이 체벌보다 가혹하다고 말하는 상 · 벌점제도도 없다.
▲ 학생총회 발표 준비한 학생이 모둠토론에서 정리한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 임정훈
한편 학생들이 학생총회를 벌이고 있던 시각 컴퓨터실에서는 학부모 간담회가 열렸는데 100여 명에 이르는 학부모들이 참석했다.
비평준 지역의 신설학교 학부모 간담회에 전체 학생 숫자의 2/3에 해당하는 학부모들이 모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학교 측도 이같은 학부모들의 반응에 당황했다고 한다.
"신설 학교라 두려움이 있었다. 오늘 간담회 와서 보니 다행이다 싶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이웃 아이는 입학 첫날부터 밤 10시까지 야자를 하고 왔다는데 여기는 빈 손으로 가서 밤 9시가 넘어서 오기에 이상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아이들에게 동기 부여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구나' 싶어 감동받았다. 믿고 지원해야 겠다."
제일 앞자리에 앉아 김주영 교무부장 교사의 설명을 메모해 가며 듣고 있던 학부모 박경희씨의 말이다.
흥덕고의 출발은 일단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학생과 학부모들의 참여와 공감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새로운 대안 제시를 내걸고 출발한 혁신학교 흥덕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아이들은 또 어떻게 변화하고 달라질지 관심이 모아진다.
▲ 학부모 간담회학생들이 학생총회를 벌이고 있던 시각 컴퓨터실에서는 학부모 간담회가 열렸는데 100여 명에 이르는 학부모들이 참석했다. ⓒ 임정훈
▲ 이범희 흥덕고 교장. ⓒ 임정훈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멋을 부려 쓴 것 같은 글씨체의 이름 옆에 늘어서 있는 문장은 그러했다.
이범희 교장은 지난해까지 용인의 한 고교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교장공모제를 통해 올해 임기 4년의 흥덕고 교장으로 부임했다. 그 동안 꿈꾸어 오던 새로운 공교육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공교육의 새로운 시도를 들어보자.
- 신입생들은 주로 어떤 아이들인가?
"용인이 비평준 지역이라 학교가 생긴 순서대로(학생·학부모들이) 선호한다. 우리 학교는 비선호라고 보면 된다. 자기 존중감이 낮은 아이들이 지원했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가 안다. 스스로가 자기를 비하하거나 자기 확신이나 신뢰감이 떨어진다. 아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색다른 데 기대도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고민할 것이다. 탐색 중이라고 본다."
- 학교 경영 기본 방향을 보니 '참여와 소통을 통한 희망과 신뢰의 배움 공동체'다. 학생들의 참여와 소통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교사가 결정하고 학생은 수동적으로 따르는 생활 지도는 한계가 있다.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주체가 되도록 할 것이다. 오늘 한 학생 총회도 중요한 수단이다. 그동안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더욱이 아이들은 전체 안에 포함돼 있으면 자신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작은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 아이들이 드러나도록 할 것이다. 교사와 학생이 1 : 1로 만날 수 있도록 해서 아이들이 존중 받는 기회를 주려고 한다."
- 학부모와 소통하는 것도 중요할 텐데?
"어제 한 학부모가 학교 홈피에 두발 문제 관련해 글을 올렸다. 내가 직접 댓글을 달았다. 자신을 드러내고 질문을 올려준 게 고맙고 그런 관계를 통해 신뢰 쌓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학부모와 만나는 기회를 넓힐 것이다. '학교신문'과 '학부모통신' 등을 만들어서 학교 정보를 소수의 학부모들이 가지는 게 아니라 모든 학부모와 지역 사회가 공유하도록 할 생각이다."
- '인권 주간 설정', '어떠한 경우에도 체벌 금지' 등의 내용도 있던데?
"설득하고 호소해서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생활지도 요체다. 오늘 학생총회가 첫 시작이다."
- '혁신학교'라는 이름의 부담감도 있을 것 같은데?
"(학부모를 탓하는 게 아니라) 교육 여건 현실이 아이들을 명문대 가도록 하는 것이 학교의 중요한 목표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학습 노동량과 교육의 질이 비례한다고 인식하는 경우도 많다. 벌써부터 우열반·심화반 편성을 요구한 학부모도 있다. 하지만 그런 학부모를 탓할 상황이 아니고 책임 지울 수도 없다. 학부모와 함께 공부하는 게 필요하다. 학부모 연수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만나고 이야기 할 것이다."
- 교사들이 많이 힘들 수도 있을 것 같다.
"필요한 부분은 교사들도 설득할 생각이다. 이 곳에서 지금껏 교사로서 잃고 산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교사들한테 권한을 주고 결정하도록 유도하겠다. 나와 함께 근무했다는 것이 교직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꿈이다."
- '교훈'이 없던데?
"그렇다. 계몽적이라고 할까, 그런 교훈이 굳이 필요할까 싶다. '참여와 소통을 통한 희망과 신뢰의 배움공동체'라는 기본방향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교훈뿐만 아니라 현재로서는 교가도 따로 만들 생각 없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부르는 게 훨씬 낫다. 혹 나중에 생각 있는 분이 아이들과 함께 부를 의미 있는 노래를 만들어 준다면 고려해 보겠다."
- 어떤 기대와 희망을 꿈꾸나?
"아이들이 여기에 오기까지 한 두 번 상처 받았겠나? 돌봄과 치유 과정이 필요하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주체 의식 가지고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교사들의 노력과 헌신은 물론 지역의 전문과들과 네트워킹도 필요하다."
- 아이들이 잘 적응할 것이라 생각하나?
"교사들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주 1회는 아이들을 조기 귀가 시키고 선생님들은 토론과 연수를 할 계획이다. 아이들은 이미 어제보다 훨씬 달라졌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걸 해야 학교 생활이 신명난다. 그렇지 않으니 수업 시간에 잠을 잘 수밖에 없다. 내가 교사 시절 '가장 행복한 학교는 야자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학교'라는 게 아이들의 말이었다. 모든 교사가 지원하는 1인 1동아리 활동을 통해 평일 저녁 시간에는 교정 곳곳에서 동아리 활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동아리 활동비도 아이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뒷받침 해 줄 생각이다."
- 직접 수업도 한다고 들었다.
"그렇다. 일단 다음 주 첫 시간 모든 학급에 들어간다. 학교 비전 등을 아이들에게 적극 호소할 생각이다. 정기적인 시간표를 짜서 수업에 들어가는 건 힘들지만 결·보강 시간이라도 꾸준히 챙길 생각이다. 벌써부터 아이들이 부르고 매달리고 한다"
- 끝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모든 게 염려된다. 고교 과정에서 내부형 공모제 교장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데, 고등학교는 진학을 포함한 진로지도가 유의미해야 한다. 초·중학교 공모 교장보다는 훨씬 많고 다양한 요구가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의 교육시스템을 두고 '잘 하는데 약하다'는 반응과 '교육을 하자는 것이냐 말자는 것이냐'는 말들이 있을 텐데……. 이 (혁신학교) 시도는 이벤트가 아닌 공교육의 변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고 아이디어도 주고 지적할 건 하면서 함께해 주면 좋겠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상 하나하나에 조급해하지 말고 멀리 좀 봐 달라.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것이 바람직하다. 정말 노력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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