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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56)

[우리 말에 마음쓰기 875] '존재하지 않았다', '모태로 존재' 다듬기

등록|2010.03.10 14:15 수정|2010.03.10 15:21

ㄱ.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라크전쟁을 지지했다가, 나중에 와서 '무기가 없었으면 후세인은 진작에 그렇게 밝혔어야 했다'고 정색하며 말을 바꾸는 저널리스트들과 학자들이 있다 ..  <강상중/이목 옮김-청춘을 읽는다>(돌베개,2009) 15쪽

 "그러나 결과적(結果的)으로"는 "그러나"나 "그러나 끝끝내"로 다듬고, '주장(主張)하면서'는 '외치면서'로 다듬으며, '지지(支持)했다가'는 '밀었다가'나 '옳다고 했다가'로 다듬습니다. '정색(正色)하며'는 '낯빛을 바꾸며'나 '아무렇지 않게'나 '버젓이'로 손질하고, '저널리스트(journalist)'는 '기자'나 '언론인'으로 손질해 줍니다.

 ┌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 '있다'고 주장하면서
 ├ 무기가 없었으면
 └ 말을 바꾸는 학자들이 있다

이 보기글을 살피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첫머리를 열다가는, 곧바로 따옴표를 치고는 '있다'를 적습니다. 그러고는 글 끝에서는 학자들이 '있다'고 적어 놓습니다.

곰곰이 헤아리면, 이 보기글에서는 세 대목 모두 '존재'로 적을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 대목 모두 '있다'로 적어도 그만입니다. 따로 '존재'라는 낱말을 쓴다고 하여 더 깊거나 너르거나 대단한 뜻이 담기지 않습니다. 우리 말 '있다'라는 낱말을 쓴다고 해서 더 얕거나 모자라거나 어설픈 뜻으로 나뒹굴지 않습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다" 말고 "부재(不在)했다"고 적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글월 가운데 자리에서는 "무기가 없었으면"이 아닌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면"이나 "무기가 부재했으면"으로 적었을 수 있어요.

우리 말은 '있다-없다'이지만, 이 같은 우리 말을 알맞고 올바르기 쓰기보다는 '존재-부재'를 즐겨쓰는 학자요 지식인이요 기자요 교사라고 할까요. 배운 사람뿐 아니라 적게 배운 사람이든 여느 사람이든 '있다-없다'로 이야기를 나누면 넉넉하고 즐거울 텐데, 더 배운 사람들은 더 배운 티를 내느라 널리 어깨동무하면서 오순도순 나눌 말하고 동떨어진다고 할까요.

 ┌ 그러나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다
 ├ 그러나 끝끝내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있지 않았다
 ├ 그러나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나오지 않았다
 ├ 그러나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를 찾을 수 없었다
 └ …

생각을 살리면서 말을 살립니다. 말을 살리면서 생각을 살립니다. 생각과 말을 살리면서 삶을 살리고, 삶을 살리는 동안 말과 생각을 살립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은 생각을 살리지 못하고 말을 살리지 못합니다. 말을 살리지 못하며 생각 또한 살리지 못합니다.


ㄴ. 학습의 문화를 모태로 존재

.. 데나라이쥬크는 여러 예능을 가르치는 쥬크라는 학습의 문화를 모태로 존재, 보급되었던 것이다 ..  <츠지모토 마사시/이기원 옮김-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知와사랑,2009) 55쪽

"쥬크라는 학습(學習)의 문화를 모태(母胎)로"는 "쥬크라는 배움터를 바탕으로"나 "쥬크라는 배움터를 밑거름 삼아"로 다듬고, "보급(普及)되었던 것이다"는 "널리 퍼져나갔다"나 "고루 자리잡을 수 있었다"로 다듬어 줍니다.

 ┌ 문화를 모태로 존재, 보급되었던
 │
 │→ 문화를 바탕으로 자리잡고, 퍼졌던
 │→ 문화를 발판으로 뿌리내리고, 퍼졌던
 │→ 문화를 밑거름으로 제몫을 하고, 퍼졌던
 │→ 문화에 따라 있으면서 퍼졌던
 └ …

이 보기글에서는, "쥬크라는 학습 문화를 모태로 보급되었던 것이다"로 손질할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이런저런 군더더기 한자말을 덜어내고 싶지만, 이런저런 한자말을 군더더기로 느끼지 않는 분들이라면 '존재' 하나만 슬그머니 덜어내 줍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존재'라는 낱말을 굳이 넣을 까닭이 없었음을 느낄 수 있을까요. 이 대목에 쓰인 '존재'는 그저 '있다'를 뜻할 뿐임을 알아챌 수 있을까요. 이 대목뿐 아니라 앞뒤 흐름을 좀더 곰곰이 헤아리면서 한결 부드럽고 매끄럽고 싱그럽게 가다듬는 말길을 틀 수 있음을 돌아볼 수 있을까요.

이 보기글을 좀더 살펴보면, "예능을 가르치는"과 "학습의 문화"라는 대목에서 '가르치는'과 '학습'이 겹말입니다. 둘 가운데 한쪽을 덜어야 글흐름이 살아나고 느낌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학습의 문화"는 "학습 문화"로 손보며 토씨 '-의'를 덜 수 있지만, "학습 문화"란 다름아닌 '가르치는' 일이기에, 통째로 덜어 "예능을 가르치는 쥬크를 모태로"라고만 적으면 한결 나아요.

 ┌ 데나라이쥬크는 여러 예능을 가르치는 문화를 바탕으로 퍼졌던 셈이다
 ├ 데나라이쥬크는 여러 예능을 가르치면서 골고루 퍼진 셈이다
 ├ 데나라이쥬크는 여러 예능을 가르치는 가운데 퍼져나간 셈이다
 └ …

언제나 우리 몫입니다. 좀더 생각하고 헤아리며 알맞고 올바로 쓰려고 한다면 알맞는 말길과 올바른 글길을 틀 수 있습니다. 좀더 생각하지 않고 헤아리지 않는다면 언제가 되든 알맞는 말길은 못 찾고 올바른 글길을 열지 못합니다.

애쓰고 힘쓰면 잘 되고 잘 풀립니다. 애쓰지 않고 힘쓰지 않으면 잘 안 되고 잘 안 풀립니다. 말이며 글이며, 삶이며 생각이며, 일이며 놀이이며,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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