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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천국' 비밀 담은 프랑스 화폐

[유러피언드림, 그 현장을 가다 19] 결혼은 자유, 남녀는 평등, 보육은 연대

등록|2010.03.11 11:10 수정|2010.03.11 23:10
<오마이뉴스>는 창간 10주년기념 특별기획으로 '유러피언 드림, 그 현장을 가다'를 연중 연재한다. 그 첫번째로, 시민기자와 상근기자로 구성된 유러피언 드림 특별취재팀은 '프랑스는 어떻게 저출산 위기를 극복했나'를 현지취재, 약 30여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글을 쓴 김용익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는 오마이뉴스의 <유러피언드림: 프랑스편> 특별취재팀의 편집자문위원이다. [편집자말]
2004년 늦봄 청와대 국무회의실, 당시 '고령화 및 미래사회 위원회'라는 국정과제 위원회의 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육아지원 대책을 보고하고 있었다.

국정과제 보고회의장에는 총리와 여성부 장관을 위시하여 사회, 경제 분야의 장관들과 청와대 수석, 외부 전문가들이 큰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육 예산을 크게 늘려 부모들의 보육비용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는 대책과 함께 북구와 프랑스 등의 출산력 제고 성공사례도 보고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보고가 끝나면 장관과 수석들에게 충분한 시간 동안 토론을 하게 하고 자신이 최종판단을 했다. 한 경제장관이 "프랑스나 북유럽의 사례를 성공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아이들의 절반은 혼외 출산이고 이민자들이 아이를 많이 낳기 때문에 높은 것이다"라며 예산 증액에 반대하고 나섰다. 내 보고에 매우 호의적이었던 회의장은 일순간에 "아! 그런가? 그럼 문제네"하는 어두운 분위기가 덮쳐 버렸다.

다행히 대통령은 나의 보고를 받아주었고 참여정부 임기중 육아지원 예산은 국민의 정부에서 물려받은 3000억 원에 1조 원을 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당황스러움으로 프랑스의 '혼외 출산'은 두고두고 나의 뇌리에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다.  

▲ 프랑스 파리 15지구에 있는 한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프랑스 아이의 절반 이상이 혼외출산

내가 편집자문위원으로 동참한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 프랑스편> 취재팀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장품 회사이자 가족친화적 기업의 모범사례라고 하는 로레알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로레알은 미장원이나 이발소에서 흔히 보는 이름이다. 랑콤이나 비오템도 이 회사의 제품이란다. 

회사의 보육시설을 안내해 주던 주던 홍보책임자 장-도미니크 또르띨씨가 잠시 쉬는 틈에 프랑스 통계청이 낸 작은 논문 한편을 내밀었다. 제목은 <결혼 셋에 팍스(PACS) 둘>.

PACS는 pacte civil de solidarité(civil pact of solidarity)의 약자이다. '시민연대협약'이라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풀어서 말하자면 '(결혼은 하지 않되) 서로 도우며 살기로 한 민간인 사이의 계약, 또는 민법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동거계약'인 셈이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의 저자 목수정씨는 "팍스는 두 사람이 결혼 또는 동거하는 상태임을 입증하는 서류와 함께 양자의 계약서를 관청에 신고함으로써 성립된다"고 알려줬다. 그녀는 프랑스 남성과 팍스로 맺어져 살고 있다. 이로써 정부는 이들이 사실혼 관계인 것을 인정하고, 조세와 사회보장에서 법률혼 관계의 부부와 동일한 혜택을 준다.

또르띨씨가 준 자료에 의하면 2004년을 기점으로 해서 법률혼이 눈에 띄게 줄고 그 이상으로 팍스가 늘어가고 있다. 결혼도 팍스도 아닌 '한부모' 가정이라도 편견은 전혀 없다. 입양이나 핏줄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일도 많다. 프랑스에서 우리가 만난 그 어느 누구도 이런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해 편견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남녀가 만나는 어느 형태의 가족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편견은 전혀 없다. "아이들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프랑스 가족조합연합(CSF)의 파트리샤 오귀스탱 사무총장은 이 대목에서 유난히 표정이 단호했다.

육아는 철저히 사회의 책임이다. 아이는 사회가 합심하여 연대의 정신으로 키우는 것이다. 법률혼 밖에서 태어난 프랑스 아이의 비율은 2008년 51.6%이다.
   

▲ 프랑스의 몽마르뜨 언덕에서 내려다 본 파리 시내 전경. 모처럼 화창한 오후를 맞은 파리가 햇살가득 눈부시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국립인구문제연구소(INED)의 안 솔라즈 박사는 "왜 결혼을 하지 않고 팍스를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에 "둘이 같이 사는 것은 개인들의 사적 선택인데 왜 국가나 교회가 개입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 이건 정말 한국과 프랑스에 놓여있는 엄청난 문화적 차이다.

물론 팍스는 결혼보다는 만남과 헤어짐이 유연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이혼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다는 사람들은 없었다. "프랑스 아이들의 절반이 혼외 출산이어서 실패"라고 말한 그 장관님의 말씀이야말로 한국적인 편견이었을 뿐이다.

팍스가 법으로 정해진 것은 1999년이지만 이미 80년대부터 전통적 결혼을 거부하고 동거하는 '부부'가 늘어갔다. 여기에는 68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가 있다. 가사노동을 남녀가 나누어 하는 것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68혁명은 정치혁명으로는 잊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성의 관습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한 문화혁명으로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길거리에서 만난 20대 여성부터 전문가들에 이르기까지 가족과 양성관계의 변화에 68혁명이 계기가 되었음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국 혼외출산에 새겨진 주홍글씨 '사생아'

▲ 오마이뉴스 <유러피언드림:프랑스편> 특별취재팀 자문을 맡은 김용익 서울대 의대교수.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쯤에서 한국과 비교를 해보자.

한국에서는 '법률혼'이 유일하게 인정되는 가족의 형태이다. 사실혼도 얼마쯤의 법적 보호는 받지만 사회적 편견은 여전하다. 법률혼 밖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사생아'로 취급된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은 유난히 심하다. 이들에게는 사실상의 '주홍 글씨'가 새겨진다.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에서 유일하게 관습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혼과 여성의 재혼이 법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자유로워졌다는 정도이다. 

프랑스에서는 가족 형태와 출생이 분리되어 둘이 모두 자유롭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가족형태와 자녀출생은 강하게 붙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출생'은 철저히 법률혼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출산율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국의 출산율이 낮아지는 원인의 절반은 결혼 연령이 늦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여성 초혼 연령이 거의 30살인데, 가정해서 -정말 가정에 불과하지만- 한 살 당겨지면 0.2명 정도가 더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한살 당겨지면 일본(1.4명), 2살 당겨지면 독일(1.6명), 3살 당겨지면 스웨덴(1.8명), 4살 당겨지면 프랑스(2.0명)  수준이 된다.

출산이 결혼에 갇혀 있지 않은 프랑스에서 결혼 연령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프랑스에서는 20대 초중반의 엄마들이 적지 않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아이를 낳는 부담이 없으니까.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에서 10년 전과 비교해서 20대 출산은 줄지 않았는데 30대 이후 출산율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재혼이건 팍스건 두 번째 결합에서 애를 낳는 경우가 많다"고 국립인구문제연구소(INED)의 안 솔라즈 박사나 로레알의 차별문제 개선을 담당하는 고위간부 장-클로드 르그랑씨가  공통적으로 해 준 말에 이 통계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두 나라 사이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은 인공유산이다. 프랑스는 낙태가 합법이다. 한국에서는 불법이지만 프랑스보다 많다. 프랑스에서는 수태한 아이의 약 20% 정도가 중절된다고 하는데, 한국은 40~50% 정도로 추계된다. 우리나라의 낙태 중 절반은 법률혼 안에서, 절반은 밖에서 일어난다. 낙태를 해야 하는 상황이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훨씬 적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제도가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 변해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출산율은 높이기 위해 낙태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 프랑스의 자유로운 가족제도는 그들이 선택한 문화의 형태이지 출산력 대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높은 출산율에 비옥한 토양이 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일이다.

프랑스 동전에 새겨진 자유 평등 박애

▲ 프랑스 동전에 새겨진 자유(liberte), 평등(egalite), 박애(fraternite). 이 속에 '육아천국' 프랑스의 비밀이 담겨 있다. ⓒ

필자가 30살을 갓 넘었던 80년 초반,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린 적이 있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데 생긴 몇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야 했다. 그 틈에 파리 구경을 하자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부지런히 전철을 타고 파리 구경에 나섰다. 젊었으니까… 그게 나의 첫 파리 여행이었다.

샹젤리제 거리에 서서 멀리 개선문을 바라보며 '나도 파리에 있다'며 짜릿해 하던 그 순간과 사르트르와 보봐르를 떠올리며 철학적이지 않은 철학적 커피를 마시고 값을 치르다가 자세히 보게 된 프랑스 돈이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그러고 보니 사르트르와 보봐르는 '계약결혼' 관계였다. 팍스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프랑화에 새겨져있던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의 세 단어를 몇 번이고 거듭해 읽었다. '아! 이런 말을 돈에 새기고 있는 나라도 있구나' 감격해 했었다.

이제 몇 번인지도 모르게 가 본 프랑스를 다시 본다. 정치적 자유를 넘어 혼인의 관습을 넘은 자유의 나라, 계급적 평등을 넘어 남녀가 이룬 평등의 나라, 가난을 돕는 박애를 넘어 아이를 같이 키우는 새로운 박애의 나라.

▲ 주말인 27일 프랑스 파리의 노틀담성당 앞을 지나던 시민들이 인라인 스케이트 묘기를 지켜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오마이뉴스 <유러피언 드림: 프랑스편> 특별취재팀: 오연호 대표(단장), 김용익 서울대 의대교수(편집 자문위원), 손병관 남소연 앤드류 그루엔 (이상 상근기자) 전진한 안소민 김영숙 진민정(이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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