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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더럽히는 우리 삶 (94) 타임

[우리 말에 마음쓰기 877] 칭찬 타임, 과자 타임, 커피 타임, 소주 타임

등록|2010.03.12 11:37 수정|2010.03.12 11:37

ㄱ. 칭찬 타임

.. "그럼, 지금 칭찬 타임이야?" ..  <다나 토시노부/유미선 옮김-아카네 (15)>(북박스,2003) 131쪽

일본 만화책을 보노라면, 우리 말로 옮긴 분들이 일본사람이 일본 만화에서 쓴 영어를 고스란히 적어 놓은 모습을 어렵잖이 엿볼 수 있습니다. 보기글에 적은 "칭찬 타임이야?" 또한 일본사람 말투 그대로입니다. 일본에는 제 나라 말인 일본말이 있습니다만, 일본사람은 한국사람과 매한가지로 일본말보다 영어를 즐겨쓰곤 합니다. 글을 쓰거나 말할 때에 제 나라 말을 알뜰살뜰 살리기보다는 바깥말을 요모조모 섞곤 합니다.

일본 만화책을 우리 말로 옮기니, 일본사람이 영어를 즐겨쓰는 매무새를 하나하나 옮겨 놓아야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일본말로 이래저래 나타내거나 가리키는 느낌하고 영어로 이럭저럭 나타내거나 가리키는 느낌은 똑같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면, 일본 만화를 영어로 옮길 때에는 어떻게 될까요. 이때에는 어떤 느낌으로 옮겨야 좋을까요. 일본 만화를 영어로 옮길 때에는 '일본사람이 영어를 즐기는 모양새'를 '라틴말을 섞어 쓰는 모양새'로 고쳐 주어야 할까요. 일본사람은 '영수증'이라는 말마디보다 '레십트(recipt)'라는 말마디를 '레시또'로 읽기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적바림하는 일본사람 만화나 소설이나 영화를 우리 말로 옮길 때에도 '레십트'라고 적바림해 놓아야 알맞을까요.

 ┌ 지금 칭찬 타임이야? (x)
 └ 지금 칭찬 시간이야? (o)

다듬고 풀어내고 할 구석이란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라고 적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일본사람뿐 아니라 한국사람들도 "무슨무슨 타임" 하고 읊는 말투가 널리 자리잡고 있습니다. "작전 시간"이라 말하는 사람이란 없이 "작전 타임"입니다. 그나마 "휴식 타임"이라 안 하고 "휴식 시간"이라 하니 반갑지만, 우리들은 "쉬는 시간"이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한 번 더 헤아리자면 "쉬는 때"나 "쉴 겨를"이지만, 여기까지 헤아리며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란 우리 나라에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어쩌면 우리들 한국사람이란 일본사람들이 이렇게 영어를 좋아하고 내세우고 마구마구 퍼뜨리는 말씨를 고스란히 흉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넋을 알뜰살뜰 살찌울 줄 모르고, 우리 얼을 아름다이 북돋울 줄 모르며, 우리 삶을 튼튼하게 가꿀 줄 모릅니다.


ㄴ. 과자 타임

.. "과자 타-임. 다 함께 외출하는 겁니까. 전 집에서 시험공부 하겠지만. 뭐, 신경쓰지 말고 즐기다 오세요." "응, 힘내." ..  <아즈마 키요히코/금정 옮김-요츠바랑! (9)>(대원씨아이,2010) 132∼133쪽

"외출(外出)하는 겁니까"는 그대로 둘 수 있으나, "나들이를 합니까"나 "바깥바람을 쐽니까"나 "마실을 나갑니까"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신경(神經)쓰지'는 '마음쓰지'로 손볼 수 있고요.

 ┌ 과자 타임 (x)
 └ 과자 시간 (o)

과자를 먹자면서 "과자 타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태어난 날을 기리는 잔치를 일컬어 '생일잔치'라 하는 사람은 거의 사라지는 판이고, 으레 '생일파티'라고 하며, 아예 한 걸음 나아가 '버스데이 파티'라고까지 하는 판이니까요. 사진을 찍으니 사진기이건만, 요사이는 사진이 아닌 '포토'를 하고, '포토그래퍼'라 하며, '카메라'만을 이야기하니까요.

책이름을 붙이든 출판사이름을 붙이든 회사이름을 붙이든, 아무렇지 않게 영어로 붙입니다. 대놓고 알파벳으로 적어 놓습니다. 운동경기를 하는 모임에서는 알파벳 아닌 한글로 적으면 어설픈 줄 압니다. 어울리지 않다고 여깁니다.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어른들이라면 틀림없이 '영어 타임'이나 '잉글리쉬 타임'을 마련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플렉스타임(Flextime)'이라는 말마저 떠돌고 있는데, '북 타임'이라는 말을 쓰는 어른이 어김없이 있을 터이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베드 타임'이라는 말이 제법 쓰이고 있습니다. '베드 타임 스토리'라고 이름을 달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마저 있어요.

 ┌ 과자 먹자
 ├ 과자 먹읍시다
 ├ 과자 먹어요
 ├ 과자 드셔요
 └ …

오늘날 한국땅에서 영어는 바깥말이라 하기 어렵겠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어를 중심으로 한국말을 곁들이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나라말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할 만하며, 우리 나라말은 이제 영어라고 해야 옳지 않느냐 싶습니다.

 ┌ 과자 도르리
 ├ 과자 나누기
 ├ 과자 나왔어요
 ├ 과자 나갑니다
 └ …

바르고 알맞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은 차츰 사라집니다. 곱고 슬기롭게 글쓸 줄 아는 사람은 나날이 스러집니다. 쉽고 맑게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은 꾸준히 자취를 감춥니다. 우리는 우리 말길을 우리 손으로 내쳤고, 우리 글길을 우리 발로 걷어찼으며, 우리 이야기길을 우리 스스로 짓뭉갰습니다. 그저 그렇습니다. 그저 그런 대로 참 잘 살아가고들 있습니다.


ㄷ. 커피 타임과 소주 타임

만화책 <이은홍-술꾼>(사회평론,2001)을 보다가 군데군데 나와 있는 '커피 타임'이라는 말마디를 보고는 이냥저냥 지나칩니다. 그러다가, 건물 청소를 하는 아저씨들이 하루 일을 마친 다음에 '소주 타임'을 마련한다는 대목을 보고는 눈길이 멈춥니다. 차를 마시니 '찻시간'이나 '찻때'요, 커피라면 '커피 시간'이나 '커피 때'라 할 텐데, 이렇게까지 말하기는 어렵다 하여 '커피 타임'이라 한달지라도 '소주 타임'이라니.

그러나 아주 스스럼없이 '커피 타임'이라 하는 만큼 '소주 타임'이란 그리 대수롭지 않은 말투입니다. 참으로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술꾼들이라면 '소주 타임'뿐 아니라 '맥주 타임'과 '막걸리 타임'을 나란히 마련할 테지요. '술 시간'이나 '술 마실 때'라 하지 않으며, '술자리'나 '술잔치'라는 말마디는 하루이틀 잊어 갈 테지요. 온누리는 영어누리요 영어판이요 영어물결이요 영어나라요 영어범벅이요, 영어 영어 영어이니까요.

 ┌ 밥때 / 술때 / 찻때 / 잠때 / 놀때 / 일때
 └ 푸드 타임 / 드링크 타임 / 커피 타임 / 베드 타임 / 플레이 타임 / 워크 타임

만화쟁이 한 사람을 탓할 노릇이 아닙니다. 만화쟁이는 청소 아저씨 말투를 만화책에 고스란히 옮겨 놓았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국사람이 그린 한국 만화책에 아로새겨져 있는 '소주 타임'이라는 대목을 보면서, 이 책을 찢어 버리고 싶었으나 차마 찢지는 못하고,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주제넘게 집어던지지 못하며, 그예 곱다시 책시렁 깊이깊이 처박아 놓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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