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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피를 말리는 암투

[역사소설 민회빈강7] 비단이 문제로다

등록|2010.03.21 20:47 수정|2010.03.23 14:18

통명전. 구중궁궐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왕비의 처소다. 창경궁에 있다. ⓒ 이정근


제조상궁 애란은 궁중 고사(故事)에 밝고 익숙했다. 각종 기제사와 기념일을 빠짐없이 챙겼고 막힘없이 처리했다. 애란 없는 궁중 경조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을 애란에게 의존했다. 때문에 조상 섬기는 데 극진했던 임금으로부터 신임을 받았고 중전과 동궁의 신뢰를 얻었다.

입궐 당시 궁중 법도에 서툴렀던 소의조씨는 애란에게 매달렸고 애란 역시 친딸처럼 대해주었다. 허나, 궁중 여인들의 시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애란은 그 누구에게 치우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외줄타기 곡예였다.

궁중 여인들 역시 애란을 통하여 정보를 입수하려 촉각을 곤두세웠다. 예민한 삼각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가장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세자빈은 애란을 통하여 조소의의 흐름을 파악하려 들었고 조소의는 애란을 통하여 세자빈의 약점을 캐려 들었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첩보전이 벌어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임금 역시 애란을 통하여 세자빈의 동정과 조소의의 꼼수를 파악하려 들었다.

이목을 피해 궁궐에 들어온 여인

땅거미가 짙게 내린 창경궁. 세인의 눈을 피해 궁에 들어온 여인이 검은 비단 장옷을 깊게 뒤집어쓰고 잰 걸음을 놓았다. 제조상궁 처소 앞에 잠시 머뭇거리던 여인이 애기나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닌 밤중에 웬일이냐?"

밤늦게 찾아온 여인의 신분을 파악한 애란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빈궁마마께 흉사가 닥칠까봐 부리나케 쫓아왔습니다."
"빈전마마의 흉사라니? 그러한 일이라면 빈전으로 곧바로 갈 일이지 왜 이리로 왔느냐?"
"빈궁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이리로 왔습니다."

조소의가 심어둔 세작이 동궁에 있다는 것을 이 여인도 알고 있었다.

"안으로 들라."

섬돌에 비단신을 벗어둔 여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워낙이 내밀한 일이라 주변을 물리쳐 주십시오."

무릎 꿇고 앉아 있는 애기나인을 애란이 문 밖으로 내보냈다.

"세자저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북경에서 가지고 온 금수(錦繡) 때문에 화를 당하여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있으니 이것들을 빨리 물에 띄워버리거나 불에 태워 신(神)에게 사죄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수가 빌미가 되어 빈궁과 원손에게 흉화가 닥칠 것이라 했습니다."

"그게 정말이냐?"
"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알았다. 입단속하고 조심해서 돌아가거라."

여인을 돌려보낸 애란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궁궐에 응봉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세자저하께서 북경에서 가지고 온 비단 옷감을 빨리 불태워버리라고 말씀하셨다 합니다."
"누가 그러더냐?"
"길례의 꿈에 저하께서 나타나 선몽했다 하옵니다."

길례라면 세자빈도 익히 알고 있는 무당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화급하다. 우선 이 비단을 너의 처소로 옮기도록 하라."

세자빈이 비단 필을 내놓았다. 적잖은 양이었다. 아닌 밤중에 비단 수송 작전이 벌어졌다. 애란이 자신의 처소에 비단을 가득 쌓아놓고 총 수량을 점검하고 있을 때였다. 애기나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큰방상궁마마! 소의전에서 납시었습니다."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와 함께 조소의가 방안에 들어섰다.

"아닌 밤중에 어인일이십니까?"
제조상궁이 애써 당혹감을 감추며 예를 갖추었다.

"등촉이 켜져 있기에 지나는 길에 들렸느니라."
소의 조씨가 야릇한 미소를 흘렸다.

"안으로 드십시오."
제조상궁의 보료위에 조소의가 앉았다.

"이것들은 무엇이냐?"
"경사에 쓰일 비단입니다."
"색깔이 곱구나."

의도적으로 쓰러지는 여인,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비단 필을 만지던 소의 조씨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배가 아프다는 것이다. 야심한 밤. 궁중에 소동이 벌어졌다. 의원이 동원되는 사단이 때 아닌 밤중에 벌어진 것이다. 이튿날 보고를 받은 인조는 대노했다.

"요망한 무당과 상궁이 서로 통했단 말이냐? 애란을 내옥(內獄)에 내려 국문하라."
궁중의 큰 상궁 애란이 내옥에 갇혔다. 이례적인 일이다. 사간원에서 상소했다.

"어찌 내사(內司)의 일을 국문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사사로운 여인네의 일을 추국한다는 것은 성세에 어긋납니다."

"명에 따르도록 하라."

"애란을 내옥에서 국문하고 그 추안을 올리라 하심은 전고에 없었던 일이고 떳떳한 법도가 아니옵니다. 명을 거두어 주소서."
사헌부에서 상소했다.

"일없다."

"전하께서 죄를 지은 내인을 내옥에 가두고 내관을 시켜 죄를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 무슨 꼴입니까. 궁내에 감옥을 두는 제도가 한(漢)나라에서 시작되어 애제(哀帝)·성제(成帝) 연간에 가장 두드러졌으니 이것은 어두운 시대의 좋지 못한 형정(刑政)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내옥을 혁파하여 형정이 한 곳에서 나오도록 하지 않습니까?"

대사간 조경이 직격탄을 날렸다. 조소의의 손에서 법이 집행되는 것은 법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번거롭게 하지 말라."
삼사가 들고 일어났으나 인조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드디어 국청이 열렸다. 칼을 쓰고 갇혀있던 애란이 형틀에 매달렸다.

"어디에서 가져온 비단이냐?"
내관이 휘두르는 채찍이 애란의 어깨를 할퀴었다.

"최상궁 거소에서 가져왔다."
이러한 일을 예상해서일까? 동궁에서 비단을 가져올 때 큰 상궁 거처로 직접 가져오지 않고 최씨 거소를 거쳐 왔다.

"최씨를 잡아들여라."
상궁 최씨가 끌려왔다.

"어디에 쓰려던 비단이냐?"
"원손마마의 생신 잔치에 쓰려고 준비한 옷감이다."
최씨는 원손 석철의 보모였다.

"생신은 석 달이나 남아 있지 않느냐?"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도 죄가 됩니까?"
죽음을 감지한 최씨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에게 전하라고 준 비단이냐?"
"원손마마에게 입히려던 옷감일 뿐입니다."
"빈궁마마께서 누구에게 전하라고 준 비단인지 바른대로 대라."
불인두가 애란의 가슴에 닿았다.

"빈궁마마는 모르는 일이다."
"이런 죽일 년이 있나?"
"차라리 죽여라."

죽음으로 주인을 지킨 여인

살이 타는 냄새가 형옥을 진동했다.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최씨가 절명하고 말았다. 보고를 받은 인조가 진노했다.

"아직까지도 소현의 장자를 원손이라 함은 해괴하다. 원손의 칭호를 지금까지 그대로 쓰는 것은 매우 온당하지 않으니 각사의 해당 관리들을 추고하여 치죄하라."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전하께서 봉림대군을 세자로 정하였으나 원손의 칭호에 대해서는 아직 고치라는 명이 없었으므로 신하들 또한 감히 품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도 원손으로 칭하고 각사의 공문에도 모두 그대로 써 왔으나 지금까지도 전하께서는 이를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리들을 추고하라 하시니 어리둥절할 따름입니다."

내옥에서 고문을 당한 애란은 절도(絶島)에 유배되었다. 귀양 떠나는 애란은 자신과 친숙했던 무당 길례가 소의 조씨의 고향 대흥에서 조소의의 부름을 받고 궁중 무당이 되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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