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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발 철 좀 드세요!"

아이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이 중요합니다.

등록|2010.03.14 11:29 수정|2010.03.14 11:29

매화모든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생식기관이지만 꽃의 효용은 꽃 그 자체에 있습니다. 미래의 꿈나무인 아이들도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이 중요합니다. ⓒ 안준철


쉬는 시간이었는지 점심시간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쉬는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아마도 하릴없이 교실에 들어갔다가 아이들 얼굴이나 보고 나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마를 짚어보면 손바닥에서 물기가 느껴질 만큼 정신없이 바쁘고 체력 소모가 많은 3월이지만 아이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짬을 내어 교실을 중뿔나게 드나듭니다.

담임을 맡게 되면 전에 비해 수 십 가지 업무가 더 생깁니다. 그 엄청난 일의 홍수 속에서 잊지 않거나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들의 눈동자입니다. 그것은 마치 밭에 숨겨둔 보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가끔 그 보물을 확인하고 싶어지듯이 저도 아이들의 눈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아이들은 지금 행복한가? 아이들은 지금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가?

매화 학교 뒷산에 매화가 피었습니다. 학교에는 자신이 꽃인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좀 더 다가갔으면 꽃이 되었을 우리 아이들이 참 많습니다. ⓒ 안준철


창가의 두 아이매화를 보러 학교 뒷산에 갔다가 멀리서 찍은 사진입니다. 참 귀엽지요? ⓒ 안준철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를 불러 눈을 바라보며 말을 걸어볼 참이었는데 아이의 머리에 웬 꽃이 꽂아져 있었습니다. 그 아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칠팔 명의 아이들이 머리에 꽃을 하나씩 꽂은 채 희희낙락거리고 있었습니다. 가만 보니 누군가 꽃꽂이를 했다가 버린 것을 주어온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재활용인 셈이었는데, 한 아이는 그 꽃을 제 머리에도 꽂아주겠다고 난리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한 순간 삐에로가 되어주는 것도 나쁠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물처럼 덧없이 흘러가버릴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붙잡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교무실로 급히 달려가 사진기를 가져왔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사진을 찍는데 호의적이었고 무엇보다도 행복해보였습니다.  

꽃을 단 아이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 나를 사랑하는 아이들. 혹시 후자는 아직 희망사항일지도 모르지요. ⓒ 안준철


저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행복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꼭 그런 건만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한국의 교육(혹은 학교)은 아동들의 미래의 행복에 대해서만 관심이 많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가?' 이런 물음을 갖는 교사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모든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생식기관이지만 꽃을 보면서 그 열매를 먼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꽃의 효용이 꽃 그 자체에 있듯이 우리 아이들도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이 중요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1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1년 동안 불행하면 평생 그 영향이 미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담임을 맡은 1년 동안 아이들이 저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저를 만나 행복의 실체를 느끼고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아, 선생님은 늘 저래서 행복하시구나!"하고 저를 통해 보고 배우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아이들에게 행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두 소녀와 거울 속 남자이런 사진은 처음입니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습니다. ⓒ 안준철


지난 금요일에는 학급 임원들(반장, 부반장, 대의원 의장, 부의장, 각 모둠장 등)과 함께 지역 대학인 순천대학교를 방문했습니다. 말이 방문이지 어떤 특별한 계획이 세워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선, 아이들과 함께 걷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그곳까지는 걸어서 약 20분이 걸립니다. 봄비도 그치고 꽃샘추위도 가신, 봄기운이 완연해진 길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걷다보니 정말 행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조금 지나쳤던지 한 아이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제발 철 좀 드세요!"

철부지 소녀들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런 말을 한 두 번 들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능청을 떨곤 했었지요.

"나 철들었는데. 내 이름이 안준철이잖아. 철들었잖아."

그런 시시껄렁한 농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순천대학교 교정을 가로질러 최종목적지인 대학 후문에 있는 김밥(떡볶이, 순대도 팜)집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수다고 떨고 하다가 자리가 끝날 무렵에 학급 운영을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고 했더니 부반장인 찬희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저희들에게 화를 안 내셨으면 해요."
"내가 언제 화를 냈었니?"
"아니요. 근데 화를 내시면 무서우실 것 같아요."

학급 간부 단합대회 우리반 학급 임원과 모둠장들, 그리고 그냥 좋아서 따라온 아이도 몇 있다. ⓒ 안준철


화를 내면 무서울 것 같다는 아이의 말이 제 귀에 솔깃하게 들려왔습니다. 자칫했으면 "자식, 날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네!" 하고 득의의 미소를 지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그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난 아직 평화의 사람이 아니구나!' 이런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바로 이 말 때문이었지요. 

"선생님, 제발 철 좀 드세요!"

한 아이의 눈에는 철없는 교사로, 또 다른 아이의 눈에는 화를 내면 무서울 것 같은 교사로 보인다면 되었지 싶었던 것이지요. 학교가 동화의 나라는 아니기에 말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아이들에게 평화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저를 통해 평화의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이 노력해야겠지요.

동백학교에는 숨어서 피는 꽃처럼 숨어서 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숨어서 피더라도 그 모습을 가만 들여다보면 좋겠지요.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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