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국수군 결전의 중심에 섰던 묘도
묘도 - 정유재란시 조선 명나라 일본 수군의 명운을 건 해전 중심지
▲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진린도독이 머물렀다고 해 도독마을이라 부르는 도독마을 모습, ⓒ 오문수
묘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동에 있는 면적 9.47㎢에 13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조그만 섬이다. 묘도 초등학교는 한창 때 학년별로 2학급이나 된 큰 학교였지만 현재 15명만 남아 분교가 됐다. 인근 공단이나 외지로 나가 그만큼 인구가 줄었다는 의미다.
묘도는 생긴 모습이 고양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창촌에서 서남방 1㎞지점 해변에 산줄기가 돌출한 끝에 암혈(岩穴)이 있다. 높이 약 3m, 남북의 길이 약 5m, 굴의 길이는 서쪽에서 동쪽방향 수평으로 약 5m정도 되는 굴방이다. 이곳을 괴입(猫口)이라고 부르며 묘도의 지명은 암혈에서 유래한다.
묘도는 광양만에서 제일 큰 섬으로 역사가 깊다.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돌칼, 온동의 조개무덤, 창촌의 고인돌, 묘읍의 정이오의 시, 묘도목장, 도독포의 조명 연합군 주둔, 산성과 좌기청등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여행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순신 장군의 손때가 묻은 임진·정유재란의 유적지다.
묘도는 현재 여수산단과 광양제철을 갈라놓는 중심에 선 섬이다. 여수에서 배를 타고 15분쯤 가면 묘도 선착장에 다다른다. 선착장에서 내려 초등학교를 지나 3백여미터쯤 가면 선장개가 보인다.
▲ 임진 정유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수군을 주둔하고 조련했다는 선장개 ⓒ 오문수
선장개는 당곡재 밑의 포구로 남쪽은 남산능선이, 북쪽은 봉화산의 능선이 만든 계곡이다. 남산능선의 해안 끝 지점에서 북쪽능선을 연결하는 직선거리는 625m지만 현재 축조된 간척지 제방의 길이는 250m이며, 간척지로 조성돼 있는 계곡의 깊이는 375m에 이른다.
선장개란 임진왜란시에 이순신 장군이 병선을 대피시키고 군사를 조련시켰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돌칼이 발견됐다.
묘도는 고니시 유키나카(소서행장)가 성을 쌓고 주둔했던 순천 왜교성과는 가까운 거리다. 이순신 장군은 섬의 왼쪽인 선장개에서 진을 치고 군사를 조련시켰다. 명나라 진린 제독은 섬의 오른쪽인 도독마을에서 왜군의 탈출로를 막고 있었다.
▲ 광양포의 아주머니들. 행정구역상 여수지만 광양이 훨씬 가깝다 ⓒ 오문수
▲ 묘도 봉화대. 순천왜교성, 여수, 광양, 남해 평산포, 노량의 상황을 한 눈에 볼 수있는 군사적 요충지다. ⓒ 오문수
광양포와 도독마을로 갈라지는 갈림길 바로 옆에는 봉화대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마을에서 등산로를 만들 셈인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길을 내놨다. 15분쯤 올라가니 봉화대(258m)가 있었다. 봉화대에서는 광양만의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왜교성, 여수산단, 광양제철, 남해의 항구들. 사천의 좁은 물목을 거쳐 노량으로 들어오는 모든 수군들의 상황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야말로 군사상 요충지다.
봉화대는 간봉이다. 남해 평산포와 여수 종고산, 천성산을 거쳐 묘도 봉화대, 광양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감제고지다. 정유재란시 수십 수백번이나 올랐을 법한 높이 1m 지름 5~6m의 봉화대는 허물어져 칡넝쿨과 풀뿌리가 바위사위에서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 봉화대에서 바라본 광양의 모습. 이순신대교 건설이 한창인 아래로 광양제철이 보인다. ⓒ 오문수
▲ 봉화대에서 바라본 여수산단 모습 ⓒ 오문수
얕은 바다 즉 연안을 지역에서는 갱개 또는 갱본이라 부른다. 따라서 갱개는 바닷물이 들어와 포구를 만든 곳이다. 광양포는 갱개의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소리값에 가까운 음을 취한 것이다. 임진왜란 때 광양과 전령이 오가며 연락을 취했던 곳으로 광양을 마주보고 있어 광양포라 부른다.
강원도 길과 비슷한 꼬부랑길을 차를 타고 내려간다. 차 한 대가 간신히 다닐 수 있는 길이다. 중간에서 다른 차를 만나면 어디서 어떻게 비켜갈지 걱정이다. 바닷가 마을에 이르니 할머니 네분이 한가로이 잡담을 하다 카메라를 보고 예쁘게 찍어 달란다.
"아주머니, 여수보다 광양이 훨씬 가깝네요. 가구 수는 얼마며 광양은 어떻게 다녔습니까?"
"현재 22가구입니다. 옛날에는 돛단배를 타고 광양에 갔다 왔지요. 여수에 가려면 혼자 지나갈 정도로 좁은 오솔길을 따라 고개 넘어 선창가까지 가서 배타고 다녔습니다."
도독골 또는 도독개라 불린 마을은 정유재란 때 조명(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주둔해 붙여진 이름이다. 30여 가구가 살고 군대가 주둔할 정도의 평지도 별로 없는 이곳에 연합군이 주둔해 왜군의 퇴로를 막고 있었단 말인가.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구차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충무공은 명나라 진린의 눈치를 보며 복수의 칼을 갈았던 곳이다.
1597년 9월 18일 명나라의 진린제독이 수군 5천명과 전함 6백척을 이끌고 완도군 고금도를 출발하여 9월 20일 이곳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9월 21일 첫싸움에서 장도에 비축한 적의 군량을 불태우고 순천왜성을 공격했다.
다음날 아군은 수륙양면으로 공격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사도첨사 황세득을 비롯 연합군 8백명이 전사했다. 4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끄덕없이 버텼다. 명나라 육군 유정이 왜군의 뇌물공세와 휴전제의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19일간 머문 제1차 주둔은 1598년 11월 11일 진린제독이 다시 돌아와 주둔하기 시작했고, 소서행장을 구하기 위해 들어오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한 노량해전에서 3국 수군간에 최후의 일전이 벌어졌다. 구국의 영웅 충무공은 11월 19일 새벽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세운 순천왜교성모습. 가운데 불쑥 솟은 부분이 천수각으로 지휘소이다 ⓒ 오문수
▲ 정유재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왜군의 3국 수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전투 행로. 광양만의 중심에 묘도가 있다. ⓒ 오문수
도독포는 1, 2차에 걸쳐 조선과 명나라의 수군대장이 27일간 머물렀던 곳이다. 묘도의 동쪽 관음포에서 명운을 건 일전이 벌어지는 노량해전이 한창일 때 소서행장은 섬의 왼쪽해역을 지나 남해 평산포 쪽으로 달아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포성과 함성·전투로 피바다가 됐던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량앞바다는 여전히 푸르기만 하다. 다만 광양항으로 오가는 무역선만 넘실대는 파도를 헤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의 중요한 요충에 자리 잡은 묘도는 여수엑스포가 열리는 2012년이면 섬으로서의 운명을 다한다. 박람회에 참석할 관광객들의 교통로인 이순신대교를 만들기 위해서다. 50분 걸리는 여수에서 광양간 거리는 10분이면 가능하다.
덧붙이는 글
희망제작소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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