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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50년만에 김주열 열사 '해원 범국민장' 여나"

[인터뷰]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 여는 '4.11 50주년행사준비위' 김영만 위원장

등록|2010.03.20 13:49 수정|2010.03.20 13:49
"비록 반세기가 지났지만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그 때 열사의 시신을 지키지 못한 마산시민과 국민들의 의무요, 살아남은 자들의 도리이며, 열사에 대한 합당한 예우다. 국민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자랑스러운 민주역사를 되새기고 사람이 사람답게 하는 세상을 위해 피 흘린 숱한 민족민주열사들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함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金朱烈, 1943~1960) 열사. 50년만의 '해원 범국민장'이 열린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던 김주열 열사. 당시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 '4.11 50주년 행사 준비위원회' 김영만 위원장이 50년 전 3.15의거 시위에 가담했다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그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사진을 들어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 시신을 안치해 놓았는데, 그해 4월 13일 밤 11시경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 경찰은 시신을 탈취해 갔다. 고향 남원에서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억울하고 원통하다"며 대성통곡했지만, 어쩔 수 없이 선산에 묻고 말았던 것.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대표 백남해․박영철)가 오래 전부터 '범국민장'을 계획하고 준비해 왔다. '50년만의 해원,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은 오는 4월 11일 시신 인양지인 마산 중앙부두에서 열린다. 시신이 인양된 날에 맞춰 '범국민장'을 열기로 한 것.

운구행렬도 이어진다. 시신인양지를 출발해 마산의료원-3․15의거탑-남성동파출소-창동-북마산파출소-용마고까지 거리행진(약 3km)한 뒤 차량으로 남원까지 이동한다.

범국민장은 '4․11 50주년 행사 준비위원회'가 주관한다. 마산지역 추모사업회 회장을 지낸 김영만 위원장이 맡았다. 그는 김주열열사와 마산상고(현 용마고) 입학동기가 인연이다.

김영만 위원장은 "김주열은 살아서는 호남의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마산 곧 영남의 아들이었으며, 역사 속에서는 국민의 아들이 되었다"면서 "영호남 갈등이 심한데 우리 역사 속에는 김주열만큼 동서화합의 상징적인 인물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는 "'김주열은 이모할머니 집에서 데모 구경하다 변을 당했다'는 등 김주열을 폄훼하는 소문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마산에서 나돌기 시작했다"며 "이번 범국민장을 통해 잘못된 소문은 진실이 아님을 알리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만 위원장은 3․15의거 정신은 '저항정신'과 '대동정신'이라고 밝혔다. 최근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열린 첫 기념식에 대해, 그는 "주객이 전도 됐다"며 "신동엽 시인이 4․19에 대해 껍데기는 가라고 했던 말이 새삼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는 "국가기념일 제정이라는 것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피흘림에 희생당한 민주열사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국가적 차원의 예우다"면서 "국가가 산 사람을 보고 수고했다고 주는 것이 아니다. 산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산에 3․15와 관련된 단체는 많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원을 받고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은 건물에서 사무실을 사용하는 단체도 있다.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마산)는 지원도 받지 못하고, 마산 오동동의 상가 건물에 있는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 간판만 붙여 놓고 같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추모사업회는 지금까지 김주열 열사를 '제대로 모시기' 위한 많은 사업을 벌여 왔다.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 잡기 위해 다큐멘터리 영화 <친구야 미안하다>를 제작하고 있는데, 오는 4월 17일 마산에서 시사회를 연다. 김영만 위원장은 다큐멘터리 시나리오와 연출까지 맡았다.

"독재정권의 하수인, 경찰이 탈취한 열사의 시신"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가 걸어온 길
-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추진위원회 발족(1999년 1월)
- 남원 추모사업회 발족(1999년 3월)
- 마산 '3.15정신계승 동서순례단' 발족(1999년 3월)
- 제1회 김주열열사추모제(1999년 3월 14일)
- 남원 금지중-마산상고 형제학교 결연(1999년 4월)
- 마산 추모사업회 창립(2000년 2월)
- 김주열 열사 흉상 제막(용마고)(2000년 3월)
- 김주열 열사 진혼제(시신 인양지점)(2001년 4월 11일)
- 남원 '김주열로' 지정, 표지석 준공(2001년 4월 19일)
- 마산 시신 인양지 '역사 표지판' 제막(2002년 4월)
- 3.15 오적 심판식(2005년 3월)
- 소통과화합을위한 186 김주열 대장정(2007년 4월)
- 김주열 열사 흉상․조형물 제작(마산)(2008년 4월)
- 김주열과 함께하는 꽃담축제(2009년 4월18~19일)
- 다큐멘터리 <민주횃불 김주열 열사> 제작(남원)(2009년)
범국민장 준비에 여념이 없는 지난 18일 저녁 김영만 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문이다. - 당시 김주열 열사의 장례를 제대로 안 치렀다는 말인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 갔다. 그해 4월 11일 마산 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이 떠올랐다. 그 날 마산도립병원에 안치했다. 시민들이 병원을 에워싸서 지키고 있었다. 13일 밤 11시경이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병원을 지키고 있던 시민들이 장대비가 내리니까 느슨해졌다. 그 순간 경찰이 시신을 탈취했다. 경찰이 시신을 탈취하기 위해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병원 뒷문으로 시신을 빼내 남원으로 내달렸다. 다음 날 새벽이 도착했고, 그날 아침 김주열 열사의 고향 동네로 가져갔다.

- 김주열 열사는 고향에 편안히 잠들었는지?
"어머니(권찬주)가 아들의 시신을 보고 못 받겠다고 했다. 당시 어머니는 '나는 억울하고 원통해서 자식의 시신을 남원에서 인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대성통곡을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의 선산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4.19묘역과 3.15민주묘지에 김주열 열사의 묘소가 있지만 그것은 가묘다."

- 당시 시신은 어땠다고 하는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 간 뒤 마산시민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남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시신을 그 때나 지금이나 가족들에게 확인시키는 게 관례였다. 당시 관 뚜껑을 열어줘도 가족들이 확인을 거부했다. 김주열의 형(김광열)의 친구들이 확인했다. 시신을 본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완전히 팅팅 불어 있는 몸에 바다이끼가 끼었다고 한다. 엉망진창이었다. 시신을 닦지도 않고 벗겨진 채로 보냈던 것이다."

- 남원의 장례는 어땠는지?
"그런 상황에서 경찰들이 유가족을 아무리 달래려고 해도 달래지는 게 아니었다. 경찰이 억지로 선산에 묘를 파서 안장을 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의 입장에서는 전혀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떻게 파악했는지?
"김주열 추모사업을 하다 보니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알았다. 어머니가 했던 말은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장례식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증언도 있다. 김주열 형(김광열)의 친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대표적으로 하용웅(68) 선생이다. 그 분은 김주열과 같은 동네에 살았고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 선생과 김주열의 형과도 친하게 지냈다. 김주열은 하용웅 선생의 권유로 남원에서 마산으로 유학 온 것으로 안다. 하용웅 선생이 그 해 마산상고를 졸업했던 것이다."

- 김주열 열사가 마산으로 유학 오게 된 배경에 대해 들었던 증언이 있다면?
"당시 김주열 열사의 집안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업고교를 나오면 은행에 취직하기 쉽고, 은행에 취직해 가세를 일으킬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김주열의 생각도 일치했다고 한다."

▲ '4.11 50주년 행사 준비위원회' 김영만 위원장은 김주열 열사와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화 <친구야 미안하다>를 제작하고 있다. 사진은 김영만 위원장이 김주열 열사의 눈에 박혔던 최루탄의 실제 모형을 들어 보이고 있는 모습. ⓒ 윤성효


형 친구 하용웅 선생의 증언은?

-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전라도지역에서 경상도로 유학 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지금 동서(영남-호남)의 정서로 보면 유학을 온다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올 수 없다고 본다. 그런데 그 때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교통은 불편했지만 지역감정은 없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동서갈등으로 여러 가지 피해를 볼 수 있는데, 그때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하용웅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친구들이 어쩌다가 말을 흉내 내며 놀리는 정도였다고 한다. 하용웅 선생은 차라리 김주열한테 마산으로 유학을 권유하지 않았더라면 김주열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분은 당신이 김주열을 죽게 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과 같은 동서갈등이 있었다면 오라고 할리도 없고, 집에서도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차라리 지금 같았으면 김주열은 마산에서 시위에 참가했다가 눈에 최루탄이 박혀 죽는,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를 만든 계기는?
"마산상고 입학 동기가 인연이다. 같은 해 입학하게 되었다. 마산에서 추모사업회를 만든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기도 했다. 김주열은 이미 국민 사이에 4월혁명의 상징이 되어 있다. 특별히 위장하고 치장하기 위해 사업회를 만든 것은 아니다. 1999~2000년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당시 우리 사회에서 김주열의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먼지가 펄펄 나는 역사책 속에서 다시 그를 불러낸 것이다. 그 이유는 산 자와 죽은 자를 통틀어서 아무도 할 수 없는 일, 김주열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서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김주열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는 살아서는 남원의 아들이었지만 50년 전 3월 15일 밤 마산에서 죽는 순간 마산의 아들이 되었다. 마산이 엄청나게 김주열을 자랑했다. 지금도 국민들은 김주열을 마산의 아들로 생각한다. 3․15와 4․19가 끝나고 난 뒤 마산이 김주열이고 김주열이 마산이었다. 그리고 그는 4월혁명을 통해 국민의 아들이 되었다. 그 보다 더 동서화합․국민화합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어디 있나. 동서화합 때문에 김주열을 불러내고 추모사업회를 만든 것이다."

- 그동안 왜 제대로 된 장례식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는지?
"김주열이 죽고 난 바로 그 다음 해(1961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긴 세월 군사정권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생각했더라도 실천에 옮길 수 없었다. 그런데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이후에는 김주열에 대한 역사적 상징성이 흐릿해 졌다. 한마디로 잊혀지게 되었다. 그동안 군사독재정권의 긴 시간을 지내면서 우리의 사고에는 동서문제가 굳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 추모사업회는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그를 보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3․15와 4․19 50주년이 되면 해에 장례를 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계획은 사실 몇 년 전부터 구상해 왔다."

"3.15며 4.19년 껍데기만 남는 행사가 되어"

- 왜 범국민장인지?
"김주열이 국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범국민장을 하는 게 당연하다. 또 이번 행사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게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3․15와 4․19의 기념행사를 여는데, 껍데기만 남는 행사가 되었다. 주인공도 없고, 정신도 없는 행사가 되어 왔다. 언제부터인가 그랬다. 이번 국민장을 계기로 해서, 그 정신을 제대로 살려보자는 것이다. 혁명이건 항쟁이건 그 역사에서 항상 주인은 힘없는 민중이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고 깨닫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범국민장의 기조는 '민주수호'와 '정신계승'이다."

- 범국민장을 한다고 하니 시민들의 반응은?
"뜨겁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본다. 대개 3월 15일 죽었는데, 왜 4월 11일 범국민장을 하느냐고 의문을 갖더라. 또 범국민장을 하려면 전국 국민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데, 지방인 마산에서 그것이 가능하겠느냐고 질문한다. 묻는다는 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 본다."

- 김주열 열사의 유가족들은?
"50년만에 처음으로 범국민장이 거행되는 날 마산에 올 것이다. 현재 살아있는 형제는 김주열의 큰누나(영자, 74), 작은누나(경자, 68), 남동생(길열, 55)이다. 형제들을 포함해서 유가족 10여명이 올 것이다. 모두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동안 유가족들은 김주열의 시신인양지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것보다 마산에 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아서 온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리고 김병오 의원이 김주열과 친인척으로 알고 있는데, 참석하기로 되어 있다."

▲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 인양지인 마산 바닷가에는 안내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윤성효


- 범국민장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은?
"어려움이 엄청나게 많다. 우선 돈이 필요하다. 지금은 10원도 확보되지 않았다. 마산시와 남원시에 최근 재정 지원을 요청해 놓았는데 아직 대답이 없다. 범국민장을 위한 기금 마련이나 후원이 필요한데, 오는 4월 7일 그와 관련한 행사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 올해가 3.15의거 50주년인데 의미는?
"3․15와 4․19 50주년은 역사적으로 중요한데, 그동안 그 의미나 정신이 퇴색됐다.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있는데, 무엇을 기념하는지 모르겠다. 과거 회고라고 하는 게 노병들의 무용담처럼 한다. 그러려면 기념할 필요가 없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희생자들의 뜻을 기리면서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해야 한다. 그 정신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고 있다. 주객이 전도됐다. 주인보다는 객이 먼저다.

3.15의거 정신은 저항정신과 대동정신

- 3․15의거 정신은 무엇이라 보는지?
"특정단체를 이야기해서 안됐지만, 3․15의거기념사업회는 공식적으로 3․15의거의 정신이 '자유민주정의'라고 했다. 자유민주정의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이 세계 어떤 독재자도 '민주'를 말하지 않는 독재자가 없다.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나. '민주'와 '정의'라는 말이 누가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다른 것 같다. 3․15의거 당시 시민들에게 타도의 대상이 됐던 이승만 독재정권도 당시 정당 이름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들어갔다. 전두환 정권은 '민주정의당'이었다. 315기념사업회가 3․15의거의 정신을 '자유민주정의'라고 하는데, 인정할 수 없다. 보수나 수구꼴통세력들도 민주자유정의를 말한. 진보세력도 민주자유정의를 말한다. 똑 같은 용어를 두고도 하늘과 땅만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면 3․15의거 정신이 뭐냐. 바로 '저항정신'과 '대동정신'이다. 모든 독재와 독선, 독식, 독점, 불의,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3․15의거 정신을 그렇게 정리해 놓으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될 수 없다. 날이 갈수록 빛나고 예리해질 것이다. 그 정신은 1000년이 지나도 변할 수 없다."

- '대동정신'이란?
"최근 마산․창원․진해시를 행정구역통합하면서 일부에서 말하기를 3개 통합시의 정신이 '3․15의거 정신'이 되었으면 한다고 하더라. 말이 안된다. 그것은 통합이 아니나 분열이다. 역사적으로 마산시민이 하나가 되고 일치된 때가 언제였나. 바로 3․15의거와 4․11항쟁, 부마항쟁, 6월항쟁 때였다. 항상 그 때 마산이 중심에 섰다. 시민을 하나로 일치시킨 게 저항이었고, 그 순간 시민 모두는 '대동'을 보여주었다."

▲ 김천욱 민주노총 경남본부장과 이종엽 창원시의원 등이 3.15의거 50주년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 국립3.15민주묘지에 있는 김주열 열사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 윤성효


- 대동정신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경찰에 쫓기는 시민을 숨겨주고, 데모하는 사람한테 물과 주먹밥을 주고, 다친 시민을 치료해 주었다. 시민은 하나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대동정신이다. 3․15와 4․19 정신이 저항정신이고 대동정신이라고 했을 때, 그 정신을 지켜나갈 수 있다. 그래야 피 흘리며 독재와 불의에 맞서 싸우다가 희생된 모든 민주영령들의 정신을 계승할 수 있다."

- 신동엽 시인이 한 말이 생각나는데?
"신동엽 시인은 4․19도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엊그제 3․15의거 50주년 기념식이 열렸는데, 그 날 행사에 참석했던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가 행사 도중에 나와 발표한 성명서를 보니 그랬더라. 3․15도 껍데기는 가라고. 오죽 했으면 그랬겠나. 문성현 전 대표는 '정작 3·15정신을 거스르고, 민주주의 역사를 되돌리는 자들은 정치적 행세로 기념식장을 좌지우지하고, 그 역사의 주체인 유족과 시민들은 들러리 취급을 받는 3·15기념식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생색을 내며 자기들 끼리 공치사를 주고받을 일이 아니다. 그 역사의 주역인 민주시민의 자존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더라. 공감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친구야 미안하다> 제작중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는 다큐멘터리 영화 <친구야 미안하다>를 제작하고 있다. 오는 4월 17일 마산 3․15아트센터에서 시사회를 연다. 김영만 위원장이 다큐멘터리의 감독과 시나리오, 내레이터를 맡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소식지 <희망세상>(2009년 3월호, 마산 3.15의거 현장을 찾아서)을 내면서 김주열 열사와 관련해 "무학초등학교 옆 이모할머니 댁에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다"라고 기술했다.

이후 추모사업회(남원·마산)가 정정을 요구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해 7월 정정보도문을 통해 "김주열은 형 광렬(당시 19세)과 함께 시위대에서 경찰과 대치하여 투석전을 벌이는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현장에서 산화했다"고 바로잡았다.

김영만 위원장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된 것은 김주열 열사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 다큐멘터리 영화 <친구야 미안하다>를 만들고 있는데 잘 돼 가는지?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지?
"잘 돼 가고 있다. 마산이 언제부터인가 김주열을 폄훼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김주열은 이모할머니 집 앞에서 데모 구경하다 죽었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파다하다. 그 말이 맞다면 의문이 생긴다. 그 당시에는 왜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랬다면 김주열은 열사가 될 리가 없다. 그 당시 시민들은 몰랐단 말이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식지에 어떻게 해서 그렇게 기술되었는지,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런 소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알지만, 김주열을 생각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그렇다면 마산에서 김주열 열사를 폄훼하는 게 언제부터였다고 보는지?
"그게 참 '아이러니'다. 민주열사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나서, 관련 법이 생기고 나서부터다. 기념사업이며 진상규명과 관련한 법이 만들어진 무렵부터다. 그 법은 각종 지원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행사에 그냥 돈을 줄 수 없는데, 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다. 관련 단체들은 사무실도 공짜로 쓸 수 있게 되었다. 묘하게도 그런 법이 만들어진 때와 김주열을 폄훼하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때가 일치한다. 그때부터 김주열은 민주열사 중의 한 사람, 즉 1/n이 되었다. 상징적 인물이 아닌 것이 되었다. 3․15의거 때 김주열만 죽었나 하는 말도 나온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3․15의거 때 전국 어디를 가나 3․15는 몰라도 김주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 추모사업회는 언제 만들어 진 것인지?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진 게 1999년부터다. 남원에서 먼저 만들어지고, 마산에서는 그 다음해 만들어졌다. 그때부터 추모사업이 다양하게 일어났다. 마산에서는 추모사업에 대해 잔뜩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김주열이 데모 구경하다 죽었다는 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역사의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마산) 회장을 지낸 '4.11 50주년 행사 준비위원회' 김영만 위원장이 50년 전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사진을 보며, 김주열 열사의 눈에 박혔던 최루탄의 실제 모형을 들어 보이고 있다. ⓒ 윤성효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의 '진짜 의미'는?

- 여러 증언을 들었을 텐데, 김주열 열사와 이모 할머니 집과 관계를 설명한다면?
"잘못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이 그럴듯한 게 있다. 가장 큰 이유를 잡는 게 이모할머니집이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다. 당시 이모할머니는 미장원을 하고 있었다. '샛별미장원'이었는데, 마산 자산동에 있었다. 그날 밤 엄청난 시위가 벌어진 길 가에 미장원이 있었다. 이모할머니는 집이 따로 있었다. 장군동으로 지금의 완월초등학교 아래 쪽이다. 집과 미장원은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다. 김주열이 데모에 참가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갈 수 없는 거리다. 이모할머니 집 앞에서 구경하다가 그랬다는 말은 맞지 않다."

- 당시 법정 기록은 어떤지?
"명백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김주열을 폄훼하는 사람들은 법정 기록을 보지도 않으려고 한다. 바로 혁명재판소 기록이다. 당시 마산경찰서 서장과 경비과장, 교통과장 등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경찰은 지금의 마산의료원 옆에서 시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격전이 벌어지고 한참 뒤에 아무도 없는 속에 죽어 있는 학생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의 눈에는 이상한 쇠뭉치가 들어 있었다고 경찰이 진술했던 것이다. 그 뒤에 경찰이 그 학생을 바다에 수장시켜버린 것이고, 그 학생이 김주열이었던 것이다. 구경하던 사람이 눈에 최루탄이 박혔다는 말은 맞지 않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소식지에서 김주열 열사가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다'는 글이 나온 뒤 지역 반응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주는 게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몫이다. 또 중앙․지방정부로부터 그런 것을 하라고 지원을 받는 단체가 있다. 국민 세금으로 비싼 사무실 주고 운영비 대주는 거 아니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소식지에 그런 글이 나오면 누가 제일 먼저 문제제기를 해야 하느냐. 바로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단체가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데 가만히 있었다. 오해 받을 수도 있기에 더 '잘못된 글'이라고 해야 하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 단체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의무를 갖고 있지 않나. 지금 이 순간까지 거기에 대해 한 마디도 없다. 지난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에서 나서지 않았다면 잘못된 소문은 사실처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도 그렇게 썼더라고 해서, 마친 진실인양 알려졌을 거 아니냐. 그런 차원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 3․15의거가 국가기념일이 되었는데.
"기분 좋다. 마산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좋다.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낀다. 3․15의거가 지금 과연 국가기념일로 제정되면서 정말 잔치를 벌일 만큼, 그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고 있는지 반성부터 하게 된다. 3․15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고는 있는지, 국가기념일은 누구 보고 제정해 주었는지, 여러가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반성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서로 공치사해서는 안된다. 국가기념일 제정이라는 것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피흘림에 희생당한 민주열사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국가적 차원의 예우다. 최고의 예우다. 국가가 산 사람을 보고 수고했다고 주는 거 아니다. 그러면 산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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