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스물세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예슬 선언' 자리에 남은 스물세 살 비정규직의 글
▲ '김예슬 선언'이 있던 자리에는 토플교제광고와 20대 비정규직 노동자의 글이 나란히 자리해 있다. ⓒ 최지용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스물세 살의 비정규직 노동자다"
지난 18일 고려대학교에서는 '김예슬 선언'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대자보는 지난 주말에 이미 철거됐고 '김예슬 선언'을 지지하며 이어졌던 대자보들도 모두 치워졌다. 대학생들의 비장한 토로가 지나간 자리에는 토플 교재를 홍보하는 포스터가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 옆에 흔한 광고 포스터처럼 관심 받지 못하는 대자보 하나가 붙었다.
'김무준'이란 스물세 살의 젊은 청년은 고려대학교 학생이 아니다. 대학생도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자신의 하루를 덤덤하게 써내려간 글은 '김예슬 선언'에 담지 못한 우리사회 또 다른 20대의 자화상이다. 그는 김예슬과 다르게 회사를 그만두지, 아니 거부하지 못했다.
대자보 글을 받아 적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옆을 스쳐갔다. 하지만 누구도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이 듣지 못한 그의 목소리를 <오마이뉴스>에서 전한다.
여덟시 삼십 분쯤이었다. 출근을 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연회장으로 향했다. 모 시청의 행사를 위해 연회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우리 팀 팀장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욕을 먹었다. 정장을 입고 있어야 하는데 왜 사복을 입고 있느냐는 거였다. 한참을 깨지고 파란 유니폼 윗도리를 입었다.
비가 왔다. 시청에서는 다른 건물에서 뷔페를 하겠다고 했다. 다른 건물의 식당에서 뷔페를 하기 위해서는 원형 테이블을 옮겨놓아야만 했다. 지름이 사람 키보다도 큰 원형 테이블을 나르기 시작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비를 막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지라. 비를 맞으며 테이블을 날라야했다. 일손이 부족하기에 혼자 테이블을 나르는 중이었다. 계속해서 강풍이 불었다. 걷기가 힘들 정도의 바람이 불었다. 테이블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바람이었다. 휘청대며 몇 발을 내딛다 테이블과 함께 바람에 날아갔다. 날아가는 테이블에 머리를 부딪쳤다. 테이블은 30미터쯤을 날아갔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몇 분 기절했던 모양이다. 먼저 테이블을 옮기고 있던 상사는, 쓰러진 내게 오는 게 아니라 박살나 버린 테이블을 주우러 갔다. 생면부지의 청년이 나를 부축했다. 상사의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한마디는 테이블이 날아가 주차된 차에 부딪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거였다.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머리가 울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일했다. 절뚝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스무 개에 달하는 테이블을 다 옮겼다.
급한 일을 끝내고 회사 의무실로 향했다. 의무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상사는 어디선가 반창고 하나를 구해다 줬다. 허옇게 살이 패인 상처에 붙이기엔 턱없이 작았다. 반창고를 붙이고 아직도 피가 멎지 않은 옆구리를 붙잡고 발을 절면서 일했다. 직원들이 다들 걱정했다. 애써 태연한 척 괜찮다며 일을 했다. 다행히도 시청 쪽 사람이 상비약을 구해다 줬고 다친 지 삼십여 분 만에 응급치료를 했다.
저녁이 되자 대학생들이 몰려왔다. 단체행사가 많은 기간이라 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콘도로 꾸역꾸역 밀려왔다. 모 대학의 학생회장이 작은 연회장에서 회의를 진행해야겠는데 빔 프로젝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프로젝터를 연결하러 갔더니 대학교수로 보이는 사람들이 세미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에 케이블을 연결하다 옆에 놓인 서류를 봤다. 회의 주제는 미대의 고교공모전 결과발표였다. 연회장 안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이 예술대학 교수들인 듯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예고를 가기위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대회나 도 대회를 준비하던 때가 떠올랐다. 학생회 부회장이 공부는 뒷전인 채 그림만 그린다고 구박하던 선생들이 기억났다. 이내 스크린에는 노트북 화면이 펼쳐졌고 나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예고가 아닌 외고에 진학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한 여대생이 앉아 있었다. 기억나질 않았다. 여대생은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초중학생 때 보고 몇 해를 본 적이 없었는데 얼굴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친구에게 성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눈에는 없던 쌍꺼풀이 생겼다. 즐겁게 보내라 말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해가 저물었고 비는 그쳤다. 그러나 아픔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옆구리가 아려왔다. 무릎이며 팔꿈치며 성한 데가 없었다. 차마 병원에 가보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직원이라고는 연회장을 담당하는 상사와 비정규직인 나 밖에는 없었다. 다른 직원들은 퇴근한 뒤였다. 사무실 앞 복도에는 학생들이 넘쳐났다. 행사 진행자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들려왔다.
담배를 피러 나갔다. 줄담배 피우는 습관을 전역 후에는 고쳤거늘 연달아 담배를 태웠다. 휴대전화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렸다. 스물 셋의 나이로 삼수를 하는 불알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녀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끼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구를 치는 중이라 했다. 군에 가기 전에 실컷 놀아 두려는가 보다 싶어 다음에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콘도에서 세달 남짓 같은 방을 썼던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울컥 울음이 터져 나왔다. 불 꺼진 스키장 슬로프를 바라보며 담배를 입에 물고 울고 또 울었다. 힘내라고 힘내라고. 힘내라는 형님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전화를 끊고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닦았다. 크게 소리쳐 외쳤다. 씨팔 나도 대학가고 싶다고, 또래 친구들도 사귀어 보고 싶고 디자인 공부도 하고 싶다. 남들이 다 하듯이 살아보고 싶다.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어둠에 묻혀 사라졌다. 자동문이 열리며 한 아저씨가 들어서다 눈이 마주치자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화장실에서 눈물 자국을 지우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연장수당조차 없는 회사에서 한 달 백십만 원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이미 열두 시간에 가까워졌다. 퇴근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학생단체의 행사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새벽에 나와 연회장에 테이블을 깔아야겠다는 상사의 앓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스물세 살의 비정규직 노동자다.
2010년 3월 15일 회사 사무실에서 김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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