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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한자말 덜기 (95) 동태

[우리 말에 마음쓰기 882] '바깥 동태를 살피면서' 다듬기

등록|2010.03.20 14:41 수정|2010.03.20 14:41

- 동태 : 바깥 동태를 살피면서

.. 마키노 할아버지는 일어나서 문 앞으로 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깥 동태를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  <오카 슈조/김정화 옮김-신들이 사는 숲 속에서>(웅진주니어,2010) 48쪽

이 글월에서 "바깥 동태를 살피면서"라고 적었습니다만, "바깥을 살피면서"라고만 적어 주어도 넉넉합니다. 바깥을 살핀다는 이야기는 바깥이 어떠한가를 살핀다는 이야기요, 바깥 흐름이나 모습을 살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바깥 흐름이든 모습이든 살핀다고 할 때에 "바깥 좀 살피자" 하고만 말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반드시 '동태'라는 한자말을 사이에 넣는 사람이 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어릴 적 텔레비전에서 보던 전쟁영화라든지 한국전쟁 다룬 연속극에서는 어김없이 '동태'라는 낱말이 나왔습니다. 이 한자말이 무엇을 뜻하는 줄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릴 때부터 '동태'라는 낱말은 익히 썼습니다. 국민학생 어린 꼬맹이끼리 놀면서도 '동태'라는 낱말을 썼으니까요.

스물이 넘은 나이에 군대에 들어갔을 때, '동태'란 다름아닌 군대에서 아주 즐겨쓰는 낱말임을 깨닫습니다. '총기 손질'이 아닌 '총기 수입(手入)'이라는 일본말을 쓰는 군대에서는 '손수레' 같은 낱말도 안 쓰고 '구루마'라고만 하고, 갖가지 모습과 일을 일컬을 때에도 일본말을 아무렇지 않게 썼습니다. 군 간부들은 일본말을 써야 권위가 있는 듯 여겼고, 처음에는 우리 말로 고쳐서 쓰던 새내기 소위들도 중위를 달 무렵이면 저절로 일본말로 옮아가 있었습니다.

 ┌ 동태(同態) : 같은 상태
 ├ 동태(凍太) : 얼린 명태
 │   - 선주는 동태 몇 마리를 식모애에게 건네주고
 ├ 동태(動胎) : [한의학] 태동불안
 ├ 동태(動態) : 움직이거나 변하는 모습
 │   - 동태가 수상하다 / 적의 동태를 살피다 / 민심의 동태를 파악하다 /
 │     상대편의 동태를 감시하다 / 이편의 동태를 엿보느라고
 │
 ├ 바깥 동태를 살피면서
 │→ 바깥 모습을 살피면서
 │→ 바깥 흐름을 살피면서
 │→ 바깥이 어떠한가를 살피면서
 │→ 바깥이 돌아가는 꼴을 살피면서
 └ …

국어사전에서 '동태'를 찾아보면 모두 네 가지 나옵니다. 이 가운데 어릴 때부터 자주 듣고 흔히 쓰던 '동태'는 "얼린 명태"를 가리키는 '凍太' 한 가지입니다. 이 낱말 '동태'를 손질해 본다면 '언명태'나 '얼린명태'가 될 텐데, '동태'를 그대로 써도 괜찮으면서 '언명태'나 '얼린명태'로 손질해서 써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마른버섯'과 '마른멸치'와 '마른고사리' 같은 이름이 있으니까요. 생협 일꾼들은 '마른-'과 '乾-'을 섞어서 쓰고 있습니다만, 말려서 마련한 먹을거리일 때에는 '마른-'이나 '말린-'을 붙여야 올바릅니다. 우리가 즐겨먹는 '마른오징어'를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오징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며, 마른 물고기 들을 다룰 때에는 '건어물(乾魚物)'이라 하고 있어요. '마른물고기'나 '말린물고기' 또는 '말린물것'처럼 우리 깜냥껏 알맞게 이름을 붙여 보고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합니다.

 ┌ 동태가 수상하다 → 움직임이 수상하다
 ├ 적의 동태를 살피다
 │→ 적이 어떠한가를 살피다 / 적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살피다
 ├ 민심의 동태를 파악하다
 │→ 민심이 어떠한가를 살피다 /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피다
 └ …

다시금 '動態'라는 낱말을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이 낱말을 얼마나 써야 할까 궁금합니다. 우리한테 이 낱말이 없으면 '움직임'을 살필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이와 함께 "같은 상태"를 뜻한다는 '同態' 같은 낱말을 꼭 써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구태여 한 낱말 '同態'를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우리 생각과 느낌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한의학에서는 '태동불안(胎動不安)'을 뜻한다는 '動胎'라는 낱말을 쓴다고 하는데, 한의학을 다루는 낱말은 지난날 모조리 한문으로 지은 낱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는 한데, 오늘날 한의학이라 한다면 오늘날 우리 삶과 넋과 말에 걸맞게 차근차근 고치고 다듬고 손질할 때가 한결 나으리라 봅니다. 양의학에서는 영어이니 독일말이니 즐겨쓰면서 여느 사람하고 금을 긋거나 울타리를 쌓으며 얄딱구리하다면, 한의학에서는 해묵은 한문을 단단히 움켜쥐면서 여느 사람하고 금을 긋거나 울타리를 쌓고 있으며 얄궂습니다.

우리 학문이 되지 못하고 우리 의학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문화로 나누지 못하고 우리 삶으로 보듬지 못합니다. 이에 따라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북돋우지 못하고, 우리 말밭과 우리 글밭을 일구지 못합니다.

 ┌ 상대편의 동태를 감시하다
 │→ 상대편 움직임을 살피다 / 맞은편을 살펴보다
 ├ 이편의 동태를 엿보느라고
 │→ 이편 움직임을 엿보느라고 / 이편을 살펴보느라고
 └ …

'움직임'을 가리키는 한자말 '動態'를 넣은 이 보기글은 어린이책에서 뽑았습니다. 어린이책을 읽다가 이 낱말을 마주하고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들려줄 어린이책에 이런 한자말을 넣은 모습을 보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일본책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어쩔 수 없이 이 낱말을 '못 옮겼는'지 모릅니다만, 일본책에 나오는 '동태'란 우리 말이 아닌 일본말임을 깨달아야 할 터이며, 앞으로는 어린이책이나 여느 문학책뿐 아니라 군대에서도 이와 같은 일본 말투와 찌꺼기는 찬찬히 살피면서 솎아내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일본 것이라서 솎아낼 말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 넋이 끔찍하게 서려 있기에 털어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말이 있으니 우리 삶과 넋을 가장 알차고 싱그럽고 곱게 담아내고 나눌 우리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부터 너나없이 즐겨쓰던 우리 말이 있고, 오늘날뿐 아니라 앞으로도 서로서로 살갑고 산뜻하고 주고받을 우리 말이 있으니, 이러한 우리 말을 사랑하고 껴안으며 어여삐 다스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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