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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 증손 윤두서, 왜 출세하지 않았을까

[서평]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등록|2010.03.21 15:52 수정|2010.03.21 16:54
이 작품에서 윤두서는 한 올 한 올 생생하게 묘사된 풍성한 수염과 살짝 올라간 눈매에 약간 살집이 있고 다소 불그레한 혈기를 보이는 얼굴로 마치 씩씩한 장수처럼 보인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조선시대에 자신의 모습을 정면상으로 그린 점에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며, 서양화법에서 유래된 음영법을 구사한 최초의 영정이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 책속 <윤두서 자화상> 설명 중에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즉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은 '조선 최고의 초상화'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 겉그림 ⓒ 돌베개

그간 이 조선 최고의 초상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초상화들은 상반신은 물론 심지어는 버선이나 신발까지 그린 것들이 대부분인데, 윤두서가 자신을 그린 이 초상화는 옷은 물론 귀와 목이 없이 얼굴만 뎅그러니 그려졌기 때문이다.

윤선도의 증손으로 명문가에 태어나 진사시에 합격했으면서도 끝내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화가로 평생을 마감한 그의 삶과 연관시켜 그림의 의도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이 얼마 전에 밝혀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보존 과정에서 사라진 것일 뿐, 현미경과 X선 투과촬영, 적외선, X선형광분석법 등으로 분석해 본 결과 귀와 몸체의 옷깃, 옷 주름의 흔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세월 따라 지워진 흔적의 비밀이야 어떻든, 애초에 어디까지 어떤 의도로 그렸든,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의 이 그림은, 조상들이 남긴 수많은 그림 중 내가 좋아하고 강렬하게 기억하는 그림 몇 중 하나다.

공재 윤두서(1688년∼1715년)의 <자화상>은 언제 봐도 강렬하고 심각하다. <자화상>에 그려진 그의 눈은 종이를 뚫고 세상을 넘어설 듯한 강렬한 기세와 의지를 담고 있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장수와도 같은 풍모는 당당함과 의연함을 겸비하여 한번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을 영원히 사로잡는 마력을 발산한다. 윤두서는 왜 이처럼 당당하고도 결연한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한 것일까. 아니면 윤두서 자체가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이 작품을 대하면서 느낀 충격과 감동만큼이나 윤두서에 대한 궁금증도 오래 지속된다. - <공재 윤두서> 중 '들어가는 말'중에서

국보 제24호 <윤두서 자화상>을 책표지로 한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돌베개 펴냄)는 조선시대 대표 선비화가랄 수 있는 윤두서의 삶과 작품을 조망한 책이다. 저자는 화가 윤두서가 남긴 수많은 그림들을 연대적으로 따라가면서 그의 삶과 작품의 배경 등을 맞물려 들려준다.

▲ <유하백마도>(비단에 색채, 34.3 x 44.3cm, 해남 종가 소장) ⓒ 해남 종가


윤두서가 남긴 그림들은 워낙 많다. 동물과 식물, 풍경, 노승, 인물, 풍속 등 그가 선택한 그림의 소재 또한 다양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중 <유하 백마도> <노승도> <채과도> <석류매지도>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는 지도도 그렸다.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는 보물(제481-3~4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때 윤두서 생존 당시 해남 윤씨 문중이 지도 제작을 위해 얼마간의 재산을 들여 첩자를 일본에 보내곤 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된 적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심득경이 죽은 후 완성했다는 <정재처사심공진>(보물 제148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당시의 일반적인 선비 영정과 달리 작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모습이나 입체감을 내고자 의습선과 의자 부분에 음영법을 사용한 점 등 때문에 주목받는 작품이다.

외에도 <나물 캐는 여인> <짚신 삼기> <수하독서도> <송하납량도> 등처럼 일상과 풍경이 어우러진 작품들도 많이 남겼다. 인물은 빼고 풍경만 그린 그림들도 많다.

공재 윤두서는 현재(심사정)·겸재(정선)와 더불어 삼재(三齋)로 불린다. 그의 그림 중에는 '서양화법에서 유래된 음영법을 구사한' <윤두서 자화상>처럼 당시 그림들을 한발 앞서가는 것들이 많다. 전각과 필사도 열심히 했던 만큼 책을 통해 만나는 윤두서의 흔적들은 다양하다.

저자는 윤두서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을 연대기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작품들과 맞물려진 그의 삶의 내력들까지 아울러 들려준다. 작품 설명과 당시의 역사를 함께 다루다 보니 읽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그래도 윤두서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에 흥미로운 책이다.

지방민에 대한 구휼과 배려는 윤두서에게도 주요한 관심사였다. 특히 1713년 해남으로 낙향한 직후에 심한 기근이 들자 윤두서는 집안 소유였던 백포 망부산의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굽는 염전사업을 추진하여 백성들을 구휼했다. 그리고 1715년에는 죽기 직전까지 버려진 땅을 개간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개간사업은 대규모의 인력과 자본이 투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한데, 큰 재산가였던 윤씨 집안은 불모의 땅을 경작지로 바꾸어 재산을 증식시켰을 뿐만 아니라 전민(田民)들의 생활터전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 책 속에서

책을 통해 화가 혹은 작품으로만 만나던 인간 윤두서를 만나는 일은 즐겁다. 특히 이런 부분은 신선하게 와 닿았다. 이런 일화와 함께 만나는 명문가 출신 선비 화가 윤두서의 따뜻한 인간애에 대한 감동 때문이다.

▲ 윤두서 걸작으로 평가받는, 노승의 느릿한 걸음을 묘사한 <노승도>(종이에 수묵, 57.5 x 37.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돌 깨는 석공들의 표정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현장감과 박진감이 생생한 <돌깨는 석공>(모시에 수묵, 22.9 x 17.7cm, 학고재 소장) ⓒ 책속에서


그는 <어부사시사> 혹은 '녹우당' '보길도 유배' 등으로 유명한 윤선도의 증손자로 해남 윤씨 어초은공파의 종손이었던 만큼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날까지 대단한 부와 명예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고 살아간다. 세상 물정 모르는 선비로 살아가기 딱 안성맞춤이다.

윤두서가 살았던 시대는 윤선도나 허목 등으로 대표되는 남인과 송시열 등으로 대표되는 서인이 팽팽한 줄다리기로 엎치락뒤치락 대립하던 숙종 때다. 당시의 실정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있으랴. 어쨌거나 하층민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는 고심한다. 그것도 당시의 대부분의 사대부가 선비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노비제도의 문제점과 하층민들의 척박한 삶을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고심을 실천에 옮겨 이처럼 하층민들의 구휼에 앞장선다.

…도연명이 아이에게 노비 한 사람을 주면서 경계하여 이르기를 이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 잘 대우하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 뜻을 모르는 이가 많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않고 노비를 재물로 본다. 채찍질하고 포학하게 대하여 소나 말보다 못하게 대한다.…얼고 굶주리게 하고,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를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병술년 4월 11일에 공재 주인 쓰다.- 윤두서의 <선우록제사> 중에서

노비 문제도 마찬가지다. '노복과 하층민들을 사람답게 대접하는 것이 집안을 길이 보전하는 길'이라고 자손들에게 종종 당부하고 강조했던 그는 시시때때로 노비를 인격체로 대접해 줄 것을 가르치곤 한다.

그는 노비와의 관계를 경제적인 필요성, 즉 노동에 의한 관계로 봤다. 그러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줘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한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노비 세습 제도를 문제 삼기도 한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고방식이었다.

…1707년 정월, 윤두서는 해남 현산면에 사는 노비 필경을 시켜 김생원으로부터 다섯 명의 노비를 사들였다. 이 노비들은 역시 김생원으로부터 사들인 노비 인섭이 숨겨두었던 식솔이었다. 윤두서는 다섯 명의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도록 조처했던 것이다. 윤두서 대에도 노비를 팔고 사는 일이 지속되었고 윤두서도 기회가 닿으면 새로운 노비를 확보했다. 그러나 윤두서는 자식들에게 당부했듯이 노비를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대접하는 일에 모범을 보였다.- 책 속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적극 실천한다. 노비 경원의 자녀들이 대가를 치르고 노비 신분을 면하게 해줄 것을 신청하는 소지를 올려 그들의 면천을 적극 도왔다거나 가족들이 함께 살기를 바라며 자신의 노비를 면천한 것 등 책을 통해 만나는 윤두서의 인간적인 면모는 뭉클하게 읽혔다.

▲ 보기에 따라서 유머러스한 <낙마도>(비단에 색채, 110.0 x 69.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부분. 사람에 따라 출세가 꺾인 자신을 그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국립중앙박물관


윤두서 그는 조선의 국부로 불린 윤선도의 증손이자 종손으로 윤선도의 정치적·사회적 유업을 이어받아 출세하려고 하나 당시 정치적 상황은 그의 이런 꿈을 꺾고야 만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지않고 자신의 이런 열망을 예술세계와 하층민들에게 쏟는다.

'윤두서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서화는 물론 문장에도 능했다는 그는 왜 다른 선비들처럼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묻혀 살았을까? 그가 남긴 작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의 그림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이 책을 선택한 동기이다. 4년 전쯤, 문화재관련 자료들을 정리하던 중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을 처음 만났는데,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 금기시됐던 그 시대에 명문가 출신인 그가 자신을 그려 세상에 드러낸 의도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충분한 답을 들려줬다. 그리고 그림 한 점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하고 말 이름을 뭉클하니 기억하게 한다.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는 우리에게 선비화가로만 많이 알려진 공재 윤두서의 예술세계는 물론 인간적인 면모를 맘껏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내가 사는 오늘 윤두서와 같은 식자들이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하며 읽은 책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선비 그림의 선구자>|박은순 (지은이)|돌베개|2010-01-20|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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