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23회)

꿈길밖에 길이 없어 <1>

등록|2010.03.24 11:28 수정|2010.03.24 11:28
서대문에 속하는 천연동(天然洞)엔 자연적인 연못이 있어 천연지(天然池)라 했다. 도성 서쪽에 있으므로 사람들은 서지(西池) 또는 서쪽 연못이라 불렀다. 둘레는 넓고 깊었으며 연꽃이 무성했다. 연못 위쪽으론 선대왕 영조 때 세운 천연정이란 정자가 있어 이 연못의 풍광을 내려다보기론 그만이었다.

그런가하면 남대문 남쪽엔 남지(南池)란 연못이 있었다. 중종 때의 간신 김안로의 집터였다. 세간에 전해진 얘기론 이 연못의 꽃이 무성하면 남인이, 서대문 연못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이 득세했다고 전한다.

남지인지 서지인지 분간이 안 되는 연못 위에 자욱이 안개가 깔린 어둑새벽, 무심히 연못가에 서있는 정약용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는 손길이 있었다.

"여보게, 날세."

화들짝 놀라 뒤돌아서자 다섯 자 거리에 해맑은 미소로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다. 유노인(柳老人)이었다. 그의 부친과 절륜한 사이였는데 한때 큰 도움을 주었던 은인이었다. 정약용이 한양에 있을 때 유노인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그를 찾아와 형제처럼 지내며 서로 의지해 살 것을 넌지시 종용했었다.

"이 아이 이름은 내가 지었네. 이름 자에 하(霞) 자를 사용했네. 자네 부친의 말처럼 내게 무슨 대단한 힘이 있어 그리한 게 아니고, 어쩌다 주역(周易)을 들어다 보니 그런 이름이 눈에 띄더란 말일세. 그 녀석이 자네와는 십여 년 터울이 있으니 형처럼 보살펴주게."

그렇게 당부한 게 엊그제 같았는데 노인은 다섯 해 전 병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진하(進霞)는 이듬해부터 연락이 끊겼다. 유노인이 갑자기 꿈길을 찾아온 건 까닭인가? 노인의 손을 잡아끈 것은 서둘러 집으로 모셔가고 싶은 생각때문이었다. 노인이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아니냐. 자네의 고마운 뜻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보다 내 아들의 처지가 위태롭네. 자네가 그 아일 찾아보게. 부탁하네."

노인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힘없이 손을 흔들더니 안개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괴이한 꿈이었다. 유노인의 아들이라면 진하(進霞)다. 자신의 나이에 비한다면 그 아이도 스물이 가까워졌을 것이다.

유 노인이 나타나 이런 부탁을 할 정도라면 그 아이 신상에 위험이 닥친 것인가? 선하품을 쏟아내며 좌우를 두리번거리니 어느새 사헌부 창밖엔 잔뜩 안개가 내려 있었다. 문이 열리며 송화가 들어섰다. 그녀는 손에 든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한 마디 내놓았다.

"안개 낀 날, 여인이 자진이라···. 나으리, 괜히 으스스한데요. 그렇지요?"
"자진? 어디서?"

"서대문의 서지란 연못 어디라는데요. 신고를 받고 관원들이 나갔는데 돌아올 때가 됐어요. 혼자된 과부가 은장도로 자신의 목을 찔렀답니다."

관아로 돌아온 관원들은 보고서 양식을 작성해 검시기록과 함께 내놓았다. 죽은 자는 민자연(閔姿延)으로 나이가 열일곱으로 박씨 일문에 시집 온지 일곱 달 만에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왔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시댁에선 적극적으로 재가(再嫁)를 권했답니다. 그러자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은밀히 뭔가를 부탁해 3개월 동안 지내기로 했는데, 고작 1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이런 변이 생겼으니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어요."

눈은 여전히 검시기록 위를 달렸지만 입에서 떨어지는 물음은 전연 다른 것이었다.

"집은 어떤가.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인가?"
"몸채는 둘러보지 않았으니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별채와 중문의 위치나 구조로 보아 중인(中人) 이상은 돼보였습니다. 내 생각엔 장사를 한다거나···."
"이쪽으로 앉게."

정약용은 관원 둘을 원탁의 반대 쪽 위치를 가리켰다.

"시형도(屍形圖)에 의하면, 여인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목 밑을 찌른 것으로 돼 있고, 상흔의 길이와 폭이 은장도와 일치하지 않다는 느낌이 오는데 자네들 보기엔 어떻던가?"

사건 현장에 나갔던 관원이 입을 열었다.
"여인의 사체는 처음 보기에 상흔의 형태만 적어왔습니다. 어차피 송화가 나설 것으로 본다면 중요한 건 주변 상황이 아니겠어요."

"주변 상황이라니?"
"검시기록을 작성하는 동안 저는 집주인 박씨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분은 며느리가 목숨을 끊었으니 집안의 정기가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무척 화를 냈습니다. 집안을 말아먹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며느리 죽음에 대해 애석해 할 리 없어요. 저희가 현장을 보존시킨 건 증거가 고작 한 자루 칼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초검을 작성했으니 나으리가 그곳에 가실 때 참조하십시오."

다음날 길 떠나기 전 정약용은 서지(西池)를 비롯해 남지(南池)에 전해오는 자료를 뒤적였다. 서지는 특별한 게 없었으나 남지는 김안로의 집터라는 점에 구구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중종 때 문신으로 기묘사화 때 유배됐으나 당대의 실권자로서 무자비하게 권력을 휘둘러 정적을 살해한 공포정치의 대가였다.

그의 위엄과 세력이 불꽃처럼 거세진 것을 누군가 사헌부 문(文)에 쓰기를 '나라의 권력자루가 거꾸로 안로의 손에 떨어졌으니 백년 사직이 누가 주인이 되는가?'란 내용이었다.
이것은 정치를 어지럽힌 자는 김안로지만 그를 등용한 건 군왕이란 뜻이다. 바꾸어 말해 김안로를 등용한 건 군왕이지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풍수비기(風水秘記)인 김안로 집터 탓이란 설명이다.

이러한 세를 타고 이곳의 연꽃이 무성할 때는 남인 세력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서지 가까이 자리 잡은 박씨 집안에선 자신들이 그 동안 부를 이룬 것을 가상법(家相法)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가상법으로 결(缺)한 곳을 며느리가 대신 채워준다고 믿은 건 아닐까.'

이러한 의문은 송화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더욱 짙어졌다. 집안은 그런 대로 조경이 잘 이뤄진데다 곳곳엔 적당량의 자갈이 깔려 있고 넓은 집터엔 균형 맞게 건물이 서 있었다.
그동안 여러 곳의 집터에 대한 수사를 해 오면서 보아온 것이지만 이렇듯 소량의 자갈이 깔린 건 음기(陰氣)가 성한 것을 견제하려는 뜻이 있었다. 궁 안처럼 여인들이 많은 곳에 자갈을 까는 것은 음기(陰氣)가 음기(淫氣)를 불러일으켜 좋지 않다.

중문을 벗어나니 며느리 처소로 생각되는 뒤 채가 나타났다. 나무를 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우거진 곳이 아니어서 음울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세 칸으로 나누어진 처소는 중앙이 방이었고 좌는 자잘한 물건을 놓아두는 광으로 사용하던 곳이고 우는 일종의 부엌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건을 사용한 지 꽤 오래 된 탓에 먼지가 수북하게 내려앉았다. 여인의 주검은 방안의 이불 위였다.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의 글귀가 들어서는 문의 좌측 벽 족자 안에 고즈넉이 담겨 있었다.

강물은 가을되어 잔잔하고
구름은 석양에 막혔구나
서리바람에 기러기 울고가니
차마 떠나지 못하네

시제를 보니 송하곡갑산(送荷谷甲山)이다. 시를 쓴 날짜는 불과 몇 개월 전이니 남편을 여의고 난 후 쓴 시구였다. 남편이 갑산으로 귀양 갈 때 심경을 여류시인 허난설헌이 탄식한 내용이었다. 그렇듯 애틋한 마음을 가진 여인에게 남편 아닌 정인(情人)이 생겼을까? 정약용의 시선은 방안 곳곳을 빗질하듯 훑어가며 묻는다.

"방안은 정결하고 내걸린 시구 또한 그런 냄새가 짙다. 그런데도 허한 곳이 있다는 느낌은 웬 거냐?"

"나으리 느낌이 맞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송화가 무릎걸음으로 앉은 자세에서 들어 올린 건 죽두(竹頭)였다. 한쪽 구석에 쳐 박힌 칼날엔 선혈이 말라 있었다. 발이 쳐진 건넌방에서 다시 물음이 날아왔다.

"사체는 어떤 모습이냐?"
"잠들기 전 여인네 몸가짐입니다. 하온대···."

"뭐냐?"
"아래쪽 옷이 다소 찢긴 듯싶습니다."

"찢겼다?"
"이를테면 갑작스런 누군가로 공격으로 인해 방어의 수단으로 찢긴 것 같습니다."
"옷을 억지로 벗기려다 찢겼단 말이냐?"
"예에, 나으리."

"검시기록에 의하면, 칼을 든 여인의 형태가 누운 자세라 하지 않았느냐? 누운 자세에서 자진을 한다? 자진 한다면 칼날을 앞으로 든다는 건 어설픈 모양이고···, 분명 아래쪽으로 쥐었을 터! 하면, 그도 어설픈 모양이 아니냐?"
"그렇긴 합니다만···."

"칼날이 목을 찌른 것 외엔 다른 상처는 있느냐?"
"없습니다."

"약물은 어떠냐?"
"깨끗합니다."
"교접(交接)한 흔적이 있는지 살펴라"
"없···습니다."

얼굴이 붉어진 송화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방을 나섰다. 누군가 들어왔다면 정문은 아닐 것이다. 담장이다. 담은 넘나들기 좋은 통로니 얕은 곳이 제격이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담장 밑에 뜻밖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호패(號牌)였다. 그것을 집어든 순간 정약용의 눈이 크게 치뜨렸다. 호패 주인은 유진하(柳進霞)였다.

두어 시각 후 조사실에 잡혀 온 유진하는 사건이 일어나던 날밤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앞에 앉은 관원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자신으로 인해 죽었노라 탄식을 뿌렸다.

"그렇습니다.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가씨가 칼로 목을 찔렀다면 그것은 나로 인한 죄업입니다. 아무 말씀 마시고 나를 벌주십시오. 더 이상 세상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관원이 짜증스럽게 채근했다.

"글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죄가 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선비님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조사해야 될 게 아닙니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그토록 심약한 말을 하는 것은···."

그때 조사실로 정약용이 들어오며 눈짓을 보냈다. 관원이 자리를 비키자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문득 고개를 든 유진하의 눈이 크게 치떴다.

"날 알아보겠느냐."

[주]
∎결(缺) ; 허한 자리
∎죽두(竹頭) ; 선비들이 장식 삼아 차고 다니는 칼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