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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없애야 말 된다 (303) 상징적

― '상징적으로 표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으로나' 다듬기

등록|2010.03.24 18:24 수정|2010.03.24 18:24

ㄱ. 상징적으로 표현

.. '녹색 테이블'이란, 세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정상회담 장소에 놓인 회의 테이블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막이 오르면 두 대의 피아노가 분절음의 활발하고 풍자적인 탱고를 연주한다 ..  <조안 하라/차미례 옮김-빅토르 하라>(삼천리,2008) 22쪽

보기글 앞쪽에 '세계 지도자들'이라고 적었으니 바로 뒤에 '정상(頂上)'이라고 되풀이 적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모이는'이라고도 적었기에 바로 뒤에 '회담(會談)'이라 적어 주지 않아도 돼요. 이 대목은 "세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자리에"로 고쳐씁니다. "표현(表現)한 것이었다"는 "보여준 셈이었다"나 "드러낸 셈이었다"로 손질하고, "두 대의 피아노"는 "피아노 두 대"로 손질합니다. "분절음(分節音)의 활발(活潑)하고 풍자적(諷刺的)인 탱고를 연주(演奏)한다"는 "소리가 딱딱 끊어지며 힘차고 신나는 탱고를 꾸중하는 듯 들려준다"로 손봅니다. "회의(會議) 테이블(table)"은 "회의 책상"이나 "책상"으로 다듬습니다.

 ┌ 상징적(象徵的) :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물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   - 상징적 표현 / 상징적 직위일 뿐 / 상징적인 의미 / 상징적인 인물 /
 │     상징적인 존재
 ├ 상징(象徵)
 │  (1) 추상적인 개념이나 사물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냄
 │   -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삼다 / 사랑의 상징이었던 손수건은
 │  (2) [문학] 추상적인 사물이나 관념 또는 사상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일
 │
 ├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 상징처럼 나타낸 셈이었다
 │→ 돋보이도록 보여준 셈이었다
 │→ 비아냥거리듯 이야기하는 셈이었다
 │→ 비꼬듯 다루는 셈이었다
 │→ 비웃듯 말하는 셈이었다
 └ …

'표현'이라는 낱말을 생각한다면, 보기글에서는 '-적'을 떨군 '상징'이라는 낱말조차 안 넣어도 됩니다. "세계 지도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놓인 책상을 보여준다"처럼 적으면 깔끔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줄을 보면, 세계 지도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일이 그리 아름답거나 훌륭하지 않았는가 봅니다. 이들이 모인 자리를 '풍자'한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런 풍자 느낌을 헤아리면서 '비아냥거리다'나 '비꼬다'나 '비웃다' 같은 낱말을 넣어 볼 수 있습니다.

 ┌ 상징적 표현 → 상징 표현
 ├ 상징적 직위일 뿐 → 상징 같은 자리일 뿐 / 허울 같은 자리일 뿐
 ├ 상징적인 의미 → 상징이 되는 뜻 / 돋보이는 뜻
 ├ 상징적인 인물 → 상징 같은 사람 / 돋보이는 사람
 └ 상징적인 존재 → 상징으로 삼는 무엇 / 내세우는 무엇

그나저나, 무엇인가를 '나타낸다'고 할 때 쓰는 '상징'이고 '상징적'입니다. 나타낸다고 하면 '나타낸다'고 하면 될 텐데, 한자말 '상징'을 빌어서 쓰니, 이 낱말에 '-적'을 붙일 때에도 뜻이나 느낌이 흐리멍덩합니다. 뚜렷하지 못합니다. "비둘기를 평화를 나타내도록 삼다"라 말하거나 "사랑을 나타내던 손수건은"이라 말하면 되는데, 이렇게 '나타내다'를 쓰지 않고 '상징'이라는 낱말을 넣으니, 우리들 말씨와 말투도 우리 느낌을 담아내기 어렵고 맙니다.

이러다 보니, '상징'이라는 낱말을 넣지 않으면 어딘가 느낌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느낌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자꾸자꾸 "상징이 되는 뜻"이나 "상징 같은 사람"처럼 쓰고 맙니다.

처음에는 한두 번이었을지 모르나, 한두 번이 쌓이는 사이 우리도 모르게 길들어 버리고 익숙해집니다. 길들거나 익숙해지는 가운데 저절로 '-적'도 뒤에 붙이게 되고, 이렇게 우리 말투를 잃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말하거나 보여주려고 했는지 잊어버립니다. 생각을 잊고 말을 잃고 느낌을 잊고 얼을 잃습니다.


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 돈이나 지위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 풍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무너져 버린 일본 사회의 추악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치가 아닌가 ..  <고히야마 하쿠/양억관 옮김-인생이라는 이름의 여행>(한얼미디어,2006) 217쪽

"가치(價値) 있다고"는 "값어치 있다고"나 "값있다고"로 다듬고, '풍토(風土)'는 '흐름'으로 다듬으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關係)"는 "사람과 사람 사이"나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고리"로 다듬습니다. "일본 사회의 추악(醜惡)한 모습"은 "더러운 일본 사회 모습"이나 "끔찍한 일본 사회 모습"으로 손보고, '수치(羞恥)'는 '부끄러움'이나 '창피'로 손봅니다.

 ┌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
 │→ 잘 보여주는
 │→ 남김없이 보여주는
 │→ 고스란히 보여주는
 │→ 오롯이 보여주는
 │→ 깡그리 보여주는
 └ …

보기글을 곰곰이 곱씹습니다. 이 글은 일본사람이 썼기에 일본 사회가 더럽거나 끔찍한 모습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임자말을 '한국'으로 바꾸어, "돈이나 지위만이 값어치 있다고 믿는 흐름, 사람과 사람 사이가 무너져 버린 한국 사회 끔찍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부끄러움이 아닌가"라 해도 그리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가 될 테고, 중국이나 러시아도 마찬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나 겨레나 사회라 하더라도, 돈과 지위만을 높이 우러를 때에는 우리 삶터도 사람도 자연도 깡그리 무너집니다. 깡그리 무너지면서 엉망이 되고 뒤죽박죽이 되다가는 망가집니다.

터전과 사람과 자연이 망가진 자리에서는 문화도 망가지기 마련이고, 문화가 망가지면 말이 망가집니다. 말이 망가진 곳에서는 생각다운 생각과 느낌다운 느낌이 자리잡지 못합니다. 넋다운 넋이나 얼다운 얼이란 자취를 감춥니다.

어떤 상징과 같이 보여주는 이런 '끔찍한 모습'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 삶터가 끔찍하게 무너져 내렸음을 잘 보여주는 모습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고스란히 보여주는 모습은, 오롯이 보여주는 모습은, 숨김없이 보여주는 모습은, 죄 보여주는 모습은, 통째로 보여주는 모습은, 환하게 보여주는 모습은, 구석구석 보여주는 모습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니, 우리들은 우리 삶터며 마음이며 자연이며 하나도 안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흔들리고 있어도 흔들리는 줄 모릅니다. 망가져도 망가지는 줄 모릅니다. 엉터리가 되어도 엉터리가 되는 줄 모릅니다. 이리하여, 말과 글쯤 흔들리거나 망가지거나 엉터리가 되는 일이야 우스울 뿐이고, 흔들리거나 망가지거나 엉터리가 된다 한들 우리 먹고사는 데에 아무 걸림돌이나 어려움이 없다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ㄷ. 상징적으로나

.. '입춘대길' 같은 쪽지를 대문이나 집의 기둥에 써붙이고 좋은 일이 있기를 기대했다. 새해의 새봄부터 새날이 시작된다는 것은 실제로나 상징적으로나 다 좋다 ..  <강운구-시간의 빛>(문학동네,2004) 233쪽

"새해의 새봄부터"는 "새해 새봄부터"나 "새해를 맞이한 새봄부터"나 "새해가 열리고 새봄부터"로 다듬습니다. "새날이 시작(始作)된다는 것은"은 "새날이 열리는 자연은"이나 "새날이 되는 삶은"이나 "새날이 되는 흐름은"으로 손질해 봅니다. "집의 기둥"은 "집안 기둥"이나 "기둥"으로 손보고, '기대(期待)했다'는 '바랐다'나 '꿈꾸었다'로 손봅니다.

 ┌ 실제로나 상징적으로나 (x)
 ├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x)
 └ 실제로나 상징으로나 (o)

보기글을 살피니 '실제로나'에서는 '-적'을 붙이지 않습니다. '상징적으로나'에서는 '-적'을 붙인다면, 앞자리에서도 '-적'을 붙여야 서로 알맞을 텐데요. 그나마 한 군데에서는 '-적' 없이 글을 썼다고 여길 수 있으나, 곰곰이 헤아리면 앞자리나 뒷자리나 굳이 '-적'을 안 넣어도 된다고 하겠습니다. 괜스레 '-적'을 붙이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를 어지럽히는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뜰히 추스를 수 있는 말투를 살뜰히 추스르지 못하고, 알차게 가다듬을 수 있는 말투를 알차게 가다듬지 못하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보기글을 통째로 손질해 봅니다. "새해 새봄부터 새날이 열리는 삶은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다 좋다"로. "새해에 맞이하는 새봄부터 새날로 여기면 우리 삶으로나 우리 마음으로나 다 좋다"로. 그러나, 제가 이렇게 손질해 보았다 해서 꼭 이렇게 고쳐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로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글로 적바림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쓰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분들은 다른 분들 말씨와 말투를 살리며 다독이면 됩니다. 아니, 우리들은 서로 다른 넋과 삶에 알맞게 서로 다른 말마디를 보듬으며 펼쳐낼 노릇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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