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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24회)

꿈길밖에 길이 없어 <2>

등록|2010.03.26 10:53 수정|2010.03.26 15:34
"아니, 삼미자 형님이 아니십니까!"
"지난밤 꿈길에 유진사 어른을 뵈었다. 너무 화급한 일이라 하여 놀라 깼는데 네가 사건에 연루된 걸 알았다. 어찌된 연유인지 말하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다. 더구나 이 일은 살인이다. 사람을 죽였으니 어찌 살아나겠느냐. 네가 죽기를 자처하고 입을 열지 않으면 너는 네 아버지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만 말해라."
"예에, 형님."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먼저는 그날 밤의 행적이었다.

"제가 그 집에 간 건 저녁 10시가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다른 날이라면 저녁 8시 경에 찾아갔을 것입니다."
"다른 날? 하면, 한 번 찾아간 게 아니냐?"
"예에."

"계속하게."
"보통은 그 시각이면 책을 읽든 수를 놓든 불이 켜졌을 것입니다만, 그날은 불이 꺼졌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잠이 들었을 거라 여겼거든요. 설령 다른 곳에 갔다 해도 서찰 한 장 쯤은 남겨놓았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누군가 사정없이 나를 밀치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게 아니겠어요. 누구냐!고 외치며 따라 갔지만 이내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밤이 깊은 데다 아가씨 걱정이 돼 더는 따라갈 수 없었거든요. 돌아와 보니 아가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고 손에 든 은장도로 목을 찌른 후였어요. 아무리 아가씨를 흔들어도 이미 절명한 뒤라 전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대로 놓아두고 일단 돌아왔습니다만 신열(身熱)로 인해 일어나질 못했습니다."

"보통 때엔 8시 경에 갔다 했는데···, 몇 번이나 갔느냐?"
"예닐곱 번은 될 것입니다."
"네가 여기 온 걸 다른 사람은 모르느냐?"
"아는 친구가 있습니다."

"누구냐?"
"이도행(李棹行)으로 글방을 같이 다닌 친굽니다. 저의 일이면 크고 작거나를 가리지 않고 도와줍니다. 더구나 아가씨도 그 친구의 도움으로 만난 것인데다, 우리 일이 잘 되도록 이 댁 어른께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그 날도 잠시 그 친구를 만나 도움을 청하고 기다리다 늦은 탓에 10시 경 당도했습니다."

"하면, 그 친구도 그 시간에 헤어졌느냐?"
"아닙니다. 그 친군 오지 않았습니다. 9시 30분이 넘어서야 그곳에서 출발했습니다. 다음날 만나 물어보려 했지만 내가 몸이 아픈 탓에 지금껏 누워 지냈습니다."

유진하는 새삼 일어나는 추억 때문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련했던 지난  날의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가 아마 봄이었을 것이다. 우연히 창덕궁에 들른 민자연은 후원의 부용정 연못가에 핀 샛노란 개나리 가지를 꺾어 손에 들었다. 문득 뒤쪽에서 유진하가 한 마디 했다.

"꽃보다 예쁜 아가씨가 왜 꽃을 꺾을까?"

비록 농담이었지만 그 말은 하나의 끈이 돼 두 사람을 잇는 사랑의 가교가 됐다. 창덕궁은 조선 후기의 정궁으로 특히 이곳엔 주합루(宙合樓)란 누각이 숙종의 친필 액자로 남아 있다. 궁 안의 누각 설명을 할 정도로 가까워지자 유진하는 빈 웃음을 깨물며 주합루 설명을 곁들였다.

"어느 누각이든 훗날 어떤 목적으로 쓰임새를 가졌는가는 누각이 남아있을 당시 군왕의 치도가 어떠했는지 판가름 하게 됩니다. 나라를 세운 초기엔 그런 쓰임새가 있었답니다. 군왕과 왕비가 잠자리에 들면 엿보는 눈이 많았어요. 그 눈들은 왕과 왕비가 공적으로 합금(合衾)을 원만히 수행하느냐 따라 주합루의 종을 울렸답니다. 천지의 신께 고해 우리 양위마마가 합금을 원만히 수행했으니 자녀를 내려 달라 청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궁 안 어른들은 주합루 종소리가 들려야 안심하고 잠을 잤답니다."

갑자기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바람에 유진하의 환상은 깨어졌다. 언제 소식을 들었는지 이도행이 찾아와 와 눈물이 그렁해진 낯으로 유진하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기에 연락이 끊겼는가. 자네를 만나기로 약속한 그날 밤, 내가 이상백(李尙帛) 어른을 만나 부탁을 하지 않았는가. 자네와 며느리 민씨 관계를 인정해 달라고 말이네. 그런 부탁을 하고 약속 장소로 갔더니, 자넨 자리에 없더구먼. 멋쩍게 앉아 있기도 뭣해서 술 한 잔 한다는 게 그만 고주망태가 돼 여태껏 속이 안 풀려 누워 있었네. 잠시 전 사헌부에서 포교들이 오지 않았다면 자네가 여기 있는 걸 몰랐을 것이네. 참으로 미안하네."

시간이 지난 탓에 여인의 사체에선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진마유를 코 밑에 바르고 입마개를 한 송화는 몇 가지 의심스러운 점들을 찾아냈다. 그녀는 이제껏 사체가 방안에 놓인 그대로를 머릿속에 그리며 검시기록을 점검하며 하나 둘 의문점을 적어나갔다.

처음에 보았던 그 모습과 의복, 이불 위의 핏자국, 칼에 찔린 상처의 깊이와 푼촌(分寸), 요막(膋膜)이 나왔는지 들어갔는지, 칼에 찔려 곧 절명한 것인지를 구분해 적어나갔다. 송화의 손길이 순식간에 멈췄다. 눈 앞엔 처음 보았던 이불 위에 여인의 사체가 있었다. 베개엔 흥건히 피가 고인 상태였다.

칼에 찔렸으니 피가 흐를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목 주위엔 혈흔이 없었다. 칼에 찔렸으니 목 주위도 피가 흐를 건 당연했지만 그것은 소량이었다. 송화는 황급히 검시의를 찾았다.

"그렇구만 그래. 송화의 안목이 맞았네. 이 여인은 칼에 찔려 죽은 게 아니고 목이 졸려 죽었네. 그 다음 칼에 찔렸어. 죽은 후에 칼날로 상처를 입었으니 피를 흘릴 리 없지···, 자네가 보았을 땐 베개자리에 피가 있었다 하지 않았는가. 이상한 건 왜 대소변이 없었나 하는 것이네. 해부하면 알 일이다만 나라 법으로 금했으니 그럴 순 없고, 내가 보기엔 무슨 이유로든 죽은 여인은 며칠간 곡기를 끊었을 것이다."

곡기를 끊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건강상의 이유로 금식이나 단식 한다거나 구충약을 먹기 위한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죽은 이유가 칼이 아닌 손이라는 점이다. 또한 유력한 용의자 유진하가 방에 들어갈 때 누군가 그를 밀치고 나왔다고 했다.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당연히 나중에 나온 자가 범인일 것이다.

'사체가 놓인 상태는 누워있는 모습이고, 그런 자세에서 자신의 목을 겨냥했다. 상대를 찌르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목을 겨냥했다. 왜? 자신의 방을 침입한 침입자를 겨누어야할 칼날을 자신의 목에 겨냥했을까?'

송화의 상상은 여기에서 뚝 그쳤다. 모든 추정은 죽은 민씨나 유진하가 아는 사람이란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 시각 북창동에 위치한 춘방원(春芳園)이란 음식점 한 방엔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던 사내가 있었다. 그의 머릿속엔 이상백의 노기 띤 얼굴이 자리 잡은 채 물러갈 줄 몰랐다.

"자넨 일을 그리 처리하는가. 앞뒤 정황을 재며 말을 해야지 그렇듯 막무가내로 나서다간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네. 어쨌거나 앞으로는 매사에 생각 있게 처신하게."

이상백은 노란 봉투 하나를 내놓고 일어섰다. 밖으로 향하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문 앞에 선 사람은 뜻밖에 정약용이었다. 그가 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것과 함께 이상백이 굳은 낯으로 자리에 앉았다.

"이렇듯 두 분을 뵙게 돼 반갑습니다. 자, 이렇게 만났으니 묵은셈을 해야지요."

이상백은 술 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워 한 모금 입안을 적셨다.

"어느 부모든, 자식이 먼저 떠나는 건 불횹니다. 이제껏 부모 슬하에서 잘 자라던 아이가 못된 민가 계집을 만나 혼인이라는 걸 하더니 결국엔 그 아일 저승으로 몰아갔어요. 사인이 뭔줄 아십니까. 복상사(腹上死)예요. 젊으나 젊은 나이에 아들이 복상사로 죽었다면 부모 심정이 어쩌리라 보시오. 민가 계집이 지나치게 색을 밝힌 탓이라 보지 않겠소? 아들이 살았을 때 그 계집을 데리고 약방에 갔더니 음사병(陰邪病)이라 진맥했소. 그 병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메밀묵을 한 닷새 복용하고 해묵은 장기 알을 삶아 그 물을 복용하면 낫는다는 게 비방이라 그리 했는데 전연 말을 듣지 않았소이다."

이상백의 낯은 점점 붉어졌다. 울화가 뒤끓는 징조였다. 그는 가까스로 화기를 다스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중 자식이 덜컥 세상을 떠났으니 내 심경이 어쩌리라 생각하시오. 며느리 행실이 그렇다 해도 자식이라곤 그 녀석 하나뿐이니 가문의 맥이 끊어지게 생겼잖습니까. 해서 그랬습니다. 죽은 자식과 살아 온 걸 생각하면 석 달은 지내봐야 자식이 들었는지 아니 들었는지를 알 것 아니냐 했지요. 그랬더니 며느리가 3개월은 더 있겠다고 선선히 수긍하더라고요."

정약용이 말을 끊었다. 그는 상 위에 놓인 노란 봉투 안에 든 돈의 액수를 눈어림으로 환산했다.

"적지 않은 금액을 넣었습니다. 이것이 댁의 며느리를 죽인 대가입니까?"

때마침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송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낯선 장소에서 정약용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이었다. 짐짓 모른척하며 들어서는데 정약용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지금 중언부언 하는 건 며느리 민씨를 죽인 데 대한 해명입니까, 아니 죽였다고 강변하는 것입니까?"
"못된 년 죽이는 건 저 젊은이 몫이지 내가 한 게 아니요."

이도행이 펄쩍 뛰었다.

"내가 왜 사람을 죽입니까!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정약용의 눈짓을 받은 관원이 갑자기 상대의 팔을 휘어잡고 옷소매를 올렸다. 상흔이 없었다. 관원들에게 명했다.

"이번 살인 사건에 공모해 친구를 모해한 자다. 다시 조사할 것이니 관아로 압송하라."

그가 끌려 나가자 이번에는 이상백과 마주 앉았다. 자연스럽게 한 잔 술을 따라 잔을 채워 단숨에 마셔버렸다.

"어차피 시간이 많은 분 같으니 내가 야한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드리리다. 이도행은 태양혈이라 부르는 눈 밑의 관골이 튀어나온 사두형(蛇頭形)이오. 대개 이런 형의 인물은 다른 사람이 고통당하는 걸 몹시 즐기지요. 그런 것들은 한때 복서(卜書)를 들추었으니 모른다 하지 않겠지요?"

"그런 것이야···."
"그런 인물들은 배신을 잘 합니다. 상대의 말에 잘 속는 건 이득을 얻을 때만 종종 있지요. 내 며칠 전 찾아갔을 때 이도행이 찾아와 친구인 유진하와 며느리 민씨 관계를 허락해 달라고 조르다가 돌아갔다 했지요?"
"그렇소."

"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소이다. 그 시각 두 사람은 며느리 방에 있었소. 물론 이도행은 밖에서 친구인 유진하가 오는가를 망 보았고. 당신은 방안에서 그때 뭘 하고 있었습니까. 당신 입으로 직접 듣고 싶소이다."

이상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모든 걸 체념하는 듯한 낯빛이었다.

"어떻게든 아이 하나만 낳아 달라 했소이다. 전연 모르는 놈과 짓거리를 하느니보다 도행이는 나와 사촌 간이니 남이라고도 할 수 없잖소."

"천만의 말씀이오. 당신은 처음부터 며느리 민씨에 혹심을 품었소. 그런 처지에 다른 사람의 씨를 자신의 핏줄로 받아들일 수 있겠소? 당신 말대로 처음엔 그런 뜻이었는지 모르나 아들이 죽은 후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오. 석 달을 더 머무르게 한 것은 그 사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며느리를 손 안에 넣으려는 욕심이었을 것이오. 한데, 당신 생각을 눈치 챈 유진하가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게 하여 계획에 차질을 가져온 것이오. 방안에서 설득하고 있을 때 유진하가 온 것을 알리자 며느리 입을 막고 방안의 불을 끈 후에 이도행으로 하여금 상대를 밀치고 도망치게 했을 것이오."

그러나 이상백은 여전히 아니라고 고집을 피웠다. 결코 며느리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토록 씨(후손)가 필요했다면 명문가의 자식을 받아들여 자식을 보면 될 일이었소. 한데도 굳이 민씨의 몸을 빌어 자식을 얻으려는 건 정상적인 사람의 행위라곤 생각할 수 없는 일! 분명 당신의 손이 며느리의 입을 막았을 것이고, 이도행이 자리를 빈 후 당신의 두 손이 민씨 목을 졸랐소. 칼로 목을 찌른 건, 사후의 일이니 피가 흥건히 베개를 적실 수 없었을 터! 당황한 나머지 스스로 당신의 팔을 찔렀을 것이오!"

눈짓을 받은 관원이 상대의 팔을 거머잡았다. 옷소매를 올리자 칼로 찌른 자국 위에 무명천이 빙빙 돌려 감겨 있었다. 그것은 가문을 위한 천이었다.

[주]
∎삼미자(三眉子) ; 정약용의 어릴 때 이름
∎합금(合衾) ; 섹스. 조선 왕조땐 양위마마가 원만히 섹스를 마치면 천지의 신께 고하려 주합루의 종을 쳤다.
∎요막(膋膜) ; 지방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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