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실용주의'는 정파적 이익을 가리는 가면이 아니다

다산 정약용의 실학에서 배우는 교훈

등록|2010.03.31 13:39 수정|2010.03.31 13:39
다산 정약용은 어떤 인물인가?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흔히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를 '교훈'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것을 이루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 대상이 역사적 인물일 경우에는 그 난감함이 배가 된다.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도 한몫 할 것이며, 인간 본래의 다양성도 감안해야 한다. 어쩌면 역사적 인물의 실질적 이해에도 미치지 못하고 말지도 모른다.

우리는 부득이하게 하나의 기준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그 기준은 바로 '오늘'이다. 물론 이 말이 정약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연구는 철저히 역사적 사료에 입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이란 대체 어떤 의미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오늘'이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오늘의 '문제'를 일컫는다. 당면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나 아니면 어떤 시사점을 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역사적 인물에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약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문제'와 무관하게 그를 읽는 것은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인가? 2년 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난 뒤 우리는 '실용'이란 개념을 쉽게 접하게 되었다. 세계적 경쟁이 화두가 된 오늘날, 현실에 실질적으로 쓰임이 있는 것을 중시한다는 태도는 한편 타당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한 불관용과 '이건희 전 삼성회장 처벌'에 대한 관용을 접하고 나서, 과연 현 정부가 내세우는 '실용'이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철거민은 개발에 방해가 되니까 현실에 쓰임이 없고, 전 재벌회장은 동계 올림픽 유치와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되니까 현실에 쓰임이 있다고 판단한 것인가? 만약 '실용'이 이런 것을 의미한다면 '실용'은 현 정부의 정파적 자기 이익을 가리려는 가면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정한 실용은 파당의 이해에 매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지금 정약용을 이야기하려는 이유이다. 실학자 정약용은 누구보다도 실용적이었다. 그리고 정약용은 누구보다도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흔히 실용과 원칙은 이질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진정한 실용은 원칙에서 출발한다. 실용은 원칙을 지키고 실현하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원칙이 없으면 실용도 없다. 실용이 원칙일 수는 없는 것이다. 파당의 이해에 이로우면 관용하고, 불리하면 불관용하는 태도는 정약용이 일생을 두고 멀리했다. 그럼 정약용은 무엇을 지키려 했을까? 그가 실용으로 이루려고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원칙 없는 실용이 진정한 실용을 사칭하는 사이비 실용의 시대에 우리 모두가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정약용은 탐관오리에 관용적이지 않았다. 1794년 33세 때 그는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고발해서 처단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연천현감 김양직과 삭령군수 강명길을 벌하고 경기감사 서용보의 부정을 캐내었다. 이런 정약용의 철저함은 훗날 자신의 해배(유배에서 풀려남)와 벼슬살이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때의 일로 앙심을 품은 서용보 등은 정약용의 해배에 철저히 반대했다.

정약용의 탐관오리 척결이 얼마나 철저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이 일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해배 논의가 조정에서 있을 때 자식에게 보내는 글에서 "하찮은 일"이라며 끼어들지 말 것을 당부한다. 탐관오리 척결에 대한 이런 태도는 당시 관리들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정약용으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굶주리는 백성」(1795년)이란 시에 드러난 당시 관리의 모습은 이랬다.


고을 원님 어진 정사 베푼다면서
사재 털어 없는 백성 구한다기에

걷고 또 걸어서 고을 문에 닿고 보니
옹기종기 입만 들고 죽솥으로 모여든다

개, 돼지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음식
굶주린 사람 입엔 엿처럼 달구나

어진 정사 베푸는 것 원하지 않고
사재 털어 구휼함도 달갑지 않네

관가의 돈 궤짝 남이 볼까 쉬쉬하니
우리들 굶게 한 건 이 때문이 아니더냐

관가 마구간에 살찐 저 말은
진실로 우리들의 피와 살이네


관가에는 돈이 넘쳐나고 마구간의 말은 백성의 피와 살로 살이 쪘는데도, 백성에게 주는 구휼이란 것이 개, 돼지도 먹지 못할 것을 내어 놓는 것이 당시 관리들의 모습이었다. 나라의 일을 대신하는 관리들이 이러고서야 나라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는가? 탐관오리와의 타협 없는 정약용의 자세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백성이다!

정약용은 늘 백성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고 행동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그가 남긴 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이 없는 사람을 구제해 주고 재물이 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자 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그들을 버려둘 수 없는 뜻을 둔 뒤에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정약용은 「원목(原牧)」에서도 자신의 목민관을 밝히면서 백성을 중심에 놓는다. 자세한 내용은 이렇다.

"백성을 위한 수령인가 수령을 위한 백성인가? 목민관(지방수령)을 위해 백성이 있는가,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있는가? 백성이 곡식과 옷감을 생산하여 목민관을 섬기고, 또 수레와 말과 하인들을 내어 목민관을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며, 또한 백성들의 고혈(기름과 피)과 진수(진액과 골수)를 짜내어 목민관을 살찌우고 있으니, 백성이 과연 목민관을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이 경험한 세상은 백성이 중심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 시절 그가 남긴 시에 따르면 백성은 아주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의 시를 보자.

「적성촌에서」1794년

시냇가 헌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체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집 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팔아도 칠, 팔푼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같이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무너앉은 선반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구리 수저 이정(통반장)에게 빼앗긴 지 오래인데
엊그젠 옆집 부자 무쇠 솥 앗아갔네

닳아 해진 무명이불 오직 한 채뿐이라서
부부유별 이 집엔 가당치 않네

……

실상은 정약용이 본 것처럼 관리가 주인이고 백성은 관리의 노예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었다. 백성의 안위를 위해 존재해야 할 관리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완전히 뒤집힌 세상에서 정약용은 관리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본래 관리란 백성의 분쟁을 공정히 판결하는 자였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백성의 피와 기름을 짜내는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정약용은 현실 정치에서 이런 그의 뜻을 실현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저서에는 그의 뜻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만둘 수 없는 일"

정약용은 「여유당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은 그만두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자신으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은 이 일이 그만둘 수 없는 일이어서다. 자신은 하고 싶어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자신에게 못하게 하는 것은 이 일이 그만두어야 하는 일이어서다."

위의 글은 정약용이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려 했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자신이 정한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 원칙은 개인의 사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정약용의 삶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의 개혁과 백성의 삶에 잇닿아 있다.

그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었던 일은 다름 아니라, 탐관오리의 철저한 척결과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원칙만은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 없이 지키며 살았던 것이 정약용이다. 그래서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의 실용은 이런 원칙이 지켜지는 실용이다. 아니 이런 원칙을 위한 실용이었다.

다시 '오늘의 문제'를 마주하자. 오늘 우리에게 정약용의 삶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원칙 없는 실용은 실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웠던 정약용의 원칙은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정치적 박해도 감내했던 것이다. 그런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는 실학이라는 사상 정립에 매진했던 것이다.

실용이란 말은 있어도 원칙은 없는 현실. 그래서 실용을 변통(變通)쯤으로 알고 상황에 맞게 자신의 정파적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현 정부. 이런 시대에 원칙주의자 정약용의 모습은 훌륭한 거울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미성년자'(http://blog.daum.net/anti21)에도 올립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