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자꾸 따라오네, 어떻게 하지?
'고창 행복원'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2)
▲ 모양성 인근에 있었던 50년대의 행복원. ⓒ 김수복
돈이란 내가 벌고 싶다 해서 벌리는 것도 아니고, 안 벌고 싶다 해서 안 벌리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뜻을 배반하는 것으로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놈의 돈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에 어떻게 쓰여야 하는 것일까.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쩌면 너무 어려워서 뒤로 슬쩍 밀쳐놓았던 것인지도 모를 이 문제를 다시 접했을 때 나는 환장할 듯이 기뻤다. 환장이란 문자 그대로 창자가 뒤집어진다는 것인데, 정말로 그랬다. 그대로 그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이 말은 과장이다. 어쩌면 돈으로 온갖 악행을 다하는 것으로 유명한 기업인에 관한 뉴스를 거의 매일 접해야 하는 데서 오는 절망감이 이런 과장을 낳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창 행복원'의 사무국장은 말한다.
"그 시절에 아마 인플레가 심했던 모양이에요. 수금한 돈을 직원들이 손수레에 싣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니까."
- 그런데 교복 사업이 그렇게 돈벌이가 좋은 건가요?
"지금도 교복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비유되곤 하잖습니까. 그런데 육칠십 년대에는 업체도 별로 없었고, 고창에서는 아마 그런 쪽에 관심을 둔 다른 업체가 아예 없었을 것 같은데, 게다가 그 시절에는 학교가 좀 많았습니까."
- 보통 사람이라면 그 돈을 은행에 넣거나, 사채를 놓거나, 어디에 재투자를 하거나,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게 그런 쪽이었겠지요?
"글쎄요. 그렇게 했다면 지금쯤 아마 천문학적인 금액이 됐겠죠. 그런데 지금 있는 자산이란 행복원 부지와 건물들이 전부죠. 그것도 개인자산이 아니라 법인 자산이고요."
- 사회사업이란 대개 단맛쓴맛, 세상을 어지간히 거쳐 온 뒤의 자신감이랄까, 그런 데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전임 원장님은 젊어서부터 아예 손에 들어오는 돈을 모두 여기에, 마치 가족을 부양하듯이 해 오셨단 말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동력이 뭘까요?
"제가 말씀드리기는 너무 어려운데요. 그 점은 아무래도 관심 있는 분들이 연구를 해서 밝혀야지 않을까요."
이 점에 대해 전임 원장의 장녀, 그러니까 현재의 원장 강선자씨는 말한다.
"지금도 저는 탄복을 해요. 어머니가 그때 행복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않겠어요. 돈을 벌고자 해서 벌었든, 우연히 어떻게 해서 벌게 되었든, 어쨌든 돈이 수중에 많이 있게 되면 당황하기 마련이란 말이거든요.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아차 생각 한 번 잘못 하면 아주 몹쓸 짓을 저지르게도 되지 않겠어요. 돈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참으로 행복하게도 그런 몹쓸 짓이 아닌, 죽음에 이르러서도 후회하지 않게 돈을 쓸 수 있는 길을 그때 발견하셨던 거예요."
- 돈으로 돈을 버는 세상에서 왜 그런 쪽으로는 생각이 닿지 않았을까요?
"예? 아이그 참, 저희 어머니에게는, 뭐랄까. 그런 말 자체가 모욕이지요. 어머니는 아마 그런 말이 세상에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셨을 거예요. 스물일곱 나이에 혼자 되신 이후 돌아가시는 날까지 한눈 팔 틈이 없었으니까. 젊어서는 딸 둘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생각지도 않은 돈이 벌리면서부터는 거의 매달 한 명씩 늘어나는 또 다른 자식들을 보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그런 삶이었단 말이거든요. 실제로 어머니는 육십, 칠십, 팔십년대에 찍은 사진이 거의 없어요. 있었던 사진이 사라진 게 아니라 찍을 시간이 없었던 거예요."
정신대와 징용이라는 괴물의 시대를 지나
▲ 경성가사학교 즈음의 이초순 ⓒ 김수복
본명 이초순(李草順 1924년생). 김수영의 시에 나오는 풀을 연상케 하는 그는 정말로 풀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바람이 불면 이유 따지지 않고 숙여주고, 바람이 잠잠해지면 얼른 일어서서 무럭무럭 성장하는 풀. 그런 풀 같은 그는 일제 치하에서 '경성가사학교'를 나왔고, 궁지에 몰린 쥐처럼 다급해진 일제가 국민총동원령을 내리고 젊은 남녀들을 전장으로 끌어갈 즈음 결혼을 했다.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이초순의 남편은 결혼 직전의 일기에서 이런 말을 쓰고 있었다.
"나를 남편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 될 것이다."
왜? 그는 이미 징용대상자로 찍혀 있었으니까. 결혼을 하자마자 남의 나라 남의 싸움터에 끌려가도록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특히 젊은 여성으로 미혼인 상태라면 몹시도 불안했던 시기였다. 정신대라는 전무후무한 이름의 것이 법제화를 거쳐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던 것. 정신대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 당시에 알 수는 없었지만, 지진 같은 천재지변은 가장 약한 동물들이 먼저 알고 피난을 가더라고, 몸으로 느껴지는 불온이 없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일제는 아예 까놓고 독신의 젊은 여성을 일차 대상자로 지목하고 정신대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별이 예정된 결혼이 부모들 간에 진행되었다. 이별이 예정된, 약속된 이별이 없다면 결혼을 해야 할 필요도 없었을 그런 결혼이었지만, 아니 오히려 그런 결혼이었기에 부부간의 애정은 깊었다. 오래된 우물처럼, 오래 전에 약속되어 있었던 것처럼 여인의 뱃속에 아이가 생기고, 남자는 자신의 눈물과 아내의 눈물로 흠뻑 젖어버린 손수건과 함께 기차에 태워져서 징용으로 끌려갔다.
쌀 9말로 시작한 젊은 여인의 새로운 인생
▲ 1944년도의 청첩장 ⓒ 김수복
영원이라도 할 것처럼 극성을 부리던 일제의 만행이 끝나고 귀향한 남편의 머릿속에 아주 색다른 무엇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아내는 직감했다. 하지만 차마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지는 못하고 남편이 스스로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해방 정국에서 남편은 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아내의 불안은 고조되어 갔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남편을 붙잡고 머릿속에 있는 것을 꺼내 보여 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공포감에 입이 얼어붙어 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50년 6월 사변이 발발하고, 행방불명된 남편을 죽은 지도 석 달이 지난 뒤에서야 입고 나간 옷을 보고 시체더미 속에서 찾아내었을 때, 그때서야 도당의 비밀 감찰이었다는 둥, 세포 책임자였다는 둥의 소문이 들리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정황증거는 아무것도 없는 채로 27살의 여인은 그만 과부가 되고 말았다. 7살, 그리고 2살의 어린 두 딸이 살아야 한다고 눈으로 말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 장녀인 강선자씨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버지가 좌익이었다면 어딘가 그 기록이 있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 가족은 연좌제에 걸려 공무원 같은 것을 전혀 할 수가 없었을 텐데, 그런데 동생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교육공무원이란 말이거든요."
첩보기관의 정보수집 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다. 어쨌든 27살의 여인은 시부모로부터 독립을 권고받는다.
"네가 우리랑 같이 살아봐야 굶는 고생밖에 더 있겠냐. 딸 둘 데리고 나가서 살면 하다못해 옆에서 도와주기라도 할 거다."
다음날 시부모님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쌀 한 가마니를 실어 와서 이것밖에 줄 것이 없다고, 미안하다면서 어서 가라고 했다. 그 쌀 한 가마니를 우마차에 싣고 읍내까지 가는데 우마차 삯으로 한 말을 주고 나니 아홉 말이 남았다.
인생이란 어찌 이렇게도 눈물겨운가
눈물을 따 써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다.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도 없는 눈물을 바닥이 보일 때까지 아이들 몰래 밤마다 흘렸던가 어쨌던가. 눈이 퉁퉁 부어서 아이들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을 때 엄마는 일어나서 앉았다. 그리고 묻고, 또 묻기를 되풀이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농사도 지을 줄 모릅니다. 땅도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두었지만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는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 책을 읽을 줄은 압니다. 책을 읽고, 그 책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일은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며칠 뒤에 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결연한 자신감 하나만 갖고 <도산국민학교> 교장실을 찾아간다. 저를 선생님으로 써 주십시오. 무턱대고 찾아와서 교사로 채용해 달라는 젊은 여인을 교장 선생님은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본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서, 나중에는 종교적인 어떤 숭고함으로, 시선을 피할 수가 없는 채로 한참을 보고 있던 교장은 책상에 수북이 쌓인 봉투를 가리킨다. 이게 다 교사로 채용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와 이력서들이라고, 그런 설명을 한 뒤에 교장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이렇게 해서 선생님 생활을 하게 된 이초순, 그는 며칠이 안 되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댄다. 하루 학교에 나오고 사흘 결석을 하는 학생들, 결석이 싫은 학생은 아이를 업고 와서 수업분위기를 망쳐놓기 일쑤고, 이것이 뭔가.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참을 수 없다는 심사인 채로 그는 교실을 뛰쳐나와 농촌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시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시골을 잘 몰랐던 그는 이제야 시골을 조금씩 알아가게 된다. 그 결과 교과서 공부보다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경성가사학교 시절에 배운 것을 응용해 보기로 한다. 우여곡절 끝에 교장선생님의 동의를 얻고 결재를 받아 교실에 미싱을 들여놓게 되는데, 학생들에게 양재기술을 가르친다는 이 아이디어는 생각 이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인근 마을의 아낙네들까지 몰려와서 학교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게 되는데, 급기야는 여기저기 다른 학교에서 특강 요청까지 들어온다. '내 학교' 아이들 가르치랴 '남의 학교' 아이들 가르치랴 자동차도 많지 않은 시절에 날마다 파김치가 되어 쓰러지곤 하는 이초순, 그는 어느 날 학교를 그만두고 읍내로 나가서 아예 양재학원을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렇게 해서 그는 절차와 규칙을 따라야하는 학교라는 한정된 틀을 벗어나서 보다 큰 바다로 뛰어든다.
돈이 자꾸 따라오네? 어떻게 하지?
양재학원은 대성황이었다. 정읍에서도 수강생이 오고, 장성에서도 몰려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일제 때 배운 것을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는 것이 아니라 매주 한 번씩 서울행 기차를 타고 가서 더 큰 학원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워오기 때문이었다.
학원을 수료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도처에 양장점을 개업했다. 그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개업하는 곳은 빠지지 않고 찾아가서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 어느 날 제자가 운영하던 양장점 하나가 문을 닫게 되었다.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 그는 양재학원 부속 시설로 그 양장점을 직영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뒤에 직영 양장점에서 가까운 이웃 몇몇 아이들에게 교복을 만들어서 입혔다. 이 교복의 디자인이 신선했던 것일까. 아니면 실용적이었던 것일까. 이 사람도 한 벌, 저 사람도 한 벌, 생각지도 않은 교복 주문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학교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왔다.
이 학교에서도, 저 학교에서도, 해가 갈수록 주문양은 늘어났다. 양장점은 이제 양장점이 아니었다. 공장이었다.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돈이 갑자기 마구 들어왔다. 어린 딸들과 살고자 해서 일을 시작했고, 일을 하다 보니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 많이 눈에 띄어 다른 일에 손을 댄 것일 뿐이었다. 그 행로의 어디에도 돈이라는 글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워진 그는 먼 옛날에 남편과 주고받은 편지를 꺼내서 읽어보는 것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곤 했다. 그러나 가슴 속 저 깊은 고민은 커져만 갔다. 그야말로 번민의 나날이 몇 달간이나 이어졌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하지? 어떻게 하지?
아아 그러자. 학교를 세우자. 어느 날 새벽의 별빛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생각을 보다 깊이 그리고 넓게 전개시켜 보니 문제가 한 둘이 아니었다. 학교를 세우자면 돈을 더 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슬프다. 그러나 학교를 세우자면 돈이 훨씬 더 많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지?
이 새로운 갈등의 와중에 발견한 것이 고아원이었다. 아니, 고아원이라기보다 고아원을 운영하는 교회의 목사님이었다. 목사님은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여기저기에 많은 빚을 안고 있었다. 사흘이 멀다고 빚쟁이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심지어는 얻어맞기까지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 때문에 죽을 때 가장 행복하다
▲ 쓰러지기 한 달여 전의 모습 ⓒ 김수복
"그러니까 그때 저희 어머니께서는 돈 쓸 곳을 제대로 찾았던 것이에요. 지금이야 사정이 아주 딴판이지만 그 당시에 고아원이란 돈이 없이는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까요. 목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이 여사, 이 일은 이제부터 이 여사가 맡아주십시오. 돈도 없는 목자가 이런 일을 한다는 것도 사실은 죄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지도 넉넉하게 매입하고, 건물도 새로 짓고, 그렇게 됐던 것이에요."
- 따님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상속권자의 입장에서 어머니가 돈을 그렇게 써버린 것에 대해 아쉬움은 혹시 없으신가요?
"아쉬움이란,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 뭐랄까, 우리는, 동생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제 자식들까지도 어려서부터 그렇게 커 왔어요.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는, 말이 잘 안 되는데, 뭐랄까, 예를 들자면 이런 거였지요. 우리 집에는 군것질거리가 없어도 고아원에 가면 있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뭔가 먹고 싶으면 고아원으로 가곤 했어요. 그렇게 고아원과 우리는 한 몸이 되어간 것이죠. 지금 생각하면 그게 어머니가 우리를 가르친 방법이었다고 여겨지는데, 아무튼,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섞여진 것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아주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이고요. 어머니가 만일 그 당시에 사업을 확장하고 돈 벌이에 적극적으로 나섰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마 우리는 어머니를 잃어버릴 수도 있었겠지요. 그렇지 않겠어요?"
얘기를 듣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이란 내가 벌고 싶다 해서 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사회라는 이름의 바다에 풍덩 스스로를 빠뜨렸을 때, 그 빠뜨림 자체에서 큰 행복을 느끼며 활발하게 걷고 있을 때, 그 어느 즈음에 나도 모르게 내 손으로 들어와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편의상 돈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 이것이 한 인간의, 그 인간이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의, 이 우주의 운행 법칙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는 그렇게 살았다.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보기에 따라서는 아주 극적인 죽음이었다. 유난히도 내성적인, 바람만 불어도 상처를 받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그는 이 사내아이에게 마지막 정을 쏟았다. 사내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그는 이제 됐다, 다 자랐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 주일에 사흘도 출석을 하지 않는다고, 출석을 해도 이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고, 너무나 걱정이 돼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전화를 드리게 되었다고, 오늘도 아마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돌아갈 것이라고, 그러니 지켜봐달라는 내용의 학교 선생님 전화를 받고 돌아서는데 아이가 들어서고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너무나 놀랍고, 실망스러워서 뭐라고 말이 안 나왔다.
"너, 너 이 녀석…"
이 한 마디와 함께 그는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79세.
"그때 어머니가 보름 정도 의식이 없었어요. 코마라고 하나. 얼굴에 혈색이 하나도 없이, 백지처럼, 그런 상태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어머니의 귀에 대고 지금 행복원 앞에 안 쓰고 있는 부지를 처분해서 장학회를 만들겠다고,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세상에, 무슨 기적처럼 얼굴 가득 불그레하니 혈색이 도는 거예요. 그렇게 가셨지요.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 70년대의 행복원 아이들 ⓒ 김수복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추후 인물연구 형식으로 보다 상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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