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충사단종을 따르던 시녀와 종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민충사.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2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 하주성
영월군 영월읍 동강가에 있는 작은 사당 한 채, 민충사. 단종임금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세조 3년인 1457년에 죽임을 당하자, 단종임금을 모시던 시녀와 종인들이 동강에 몸을 던져 모두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물로 뛰어든 곳을 낙화암이라 불렀으며,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그곳에 단을 설치하고 넋을 위로 하였다.
동강가 제단에서 제를 지내 오다가, 영조 18년인 1742년에 이곳에 민충사를 설립하여 시녀와 종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영조 25년인 1749년에는 부사 김응복이 민충사를 중수하였으며, 그 후 여러 번 중수를 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크게 파괴 되었던 것을 1968년 중수한 것이다. 민충사에서는 매년 한식과 음력 10월 24일 단종의 기신제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 일각문민충사 일각문 밖으로 동강이 내려다 보인다. ⓒ 하주성
▲ 민충사정면 세 칸으로 지어진 민층사. ⓒ 하주성
영월읍 시가를 가로질러 흐르는 동강. 영월대교를 건너 시가지로 들어가다가 우측으로 영월성당이 보인다. 그 성당을 끼고 오르면 금강공원이 있는데, 그곳에 동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민충사가 있다. 계단을 오르면 일각문이 있고, 그 안에 민충사라는 현판을 건 정면 세 칸의 사당이 있다. 안에는 '시녀지신위(侍女之神位)'와 '종인지신위(從人之神位)'라고 쓴 위폐가 나란히 상 위에 올려져 있다. 옆에는 촛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단종임금이 영월로 유배를 당했을 때, 단종임금을 따라 길을 나섰던 시녀와 종인들. 단종이 청령포에 갇혀 늘 한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을 때도, 종인과 시녀들은 그와 함께 있었다.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2008년 12월 국가지정 명승제50호로 지정이 되었다.
▲ 민충사일각문 밖에서 들여다 본 민충사 ⓒ 하주성
▲ 중수시민충사에 걸린 중수기 ⓒ 하주성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는 것이 사전에 누설됐다. 이후 복귀운동을 꾀하던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이 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와 주천을 거쳐 이곳에 유배되었다.
이곳 청령포가 큰 홍수로 인해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기자,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겼다. 관풍헌은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영월읍 중앙로에서 동강1교 방향으로, 약 7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물은 태조 1년인 1392년에 객사와 함께 건립되었다. 세조 2년인 1456년 6월 28일, 단종은 세조의 명으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과, 공생 화득의 교살에 의해 세조 3년인 1457년 10월 24일 사사됐다고 한다.
죽음으로 택한 임 향한 마음
▲ 계단민충사를 오르는 계단 ⓒ 하주성
▲ 위폐민충사 안에 모셔진 시녀와 종인의 위폐 ⓒ 하주성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관풍헌에서 현재의 민충사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다. 동강을 따라 이곳까지 온 시녀와 종인들은, 아마도 가장 수심이 깊은 곳을 택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푸른 동강 물로 뛰어들었을 시녀와 종인들. 자신들이 모시던 단종임금의 죽음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 아픔이 얼마나 견디지 못할 고통이었기에, 스스로 몸을 동강에 던져 불귀의 객이 되었을까?
오늘 이곳 민충사에 올라 스스로에게 자문을 해본다. 과연 내가 섬기던 분이 비명에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나는 저들과 같이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쉽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모시던 단종을 따라 동강 깊은 물에 뛰어 든 시녀와 종인들. 그 마음 아픈 사연을, 오늘 푸른 동강에서 읽어낸다. 현재 민충사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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