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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영화는 괜찮고, 예능은 안 된다?

[주장] '천안함 침몰' 방송사 예능프로 결방의 모호한 기준

등록|2010.04.07 14:06 수정|2010.04.07 14:06

▲ MBC 예능 간판 프로그램 <무한도전>도 결방됐다. ⓒ MBC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스포츠도 되고, 영화도 되고, 드라마도 되고, 예능은 안 되고. 웃지 말란 뜻인 건가. 이현령비현령."


지난 4일 가수 김C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김C는 이날 자신의 트위터에 방송사의 무더기 예능 결방과 대체 편성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란 뜻의 고사성어 '이현령비현령(耳縣鈴鼻縣鈴)'을 말하면서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명확한 기준 없이 예능 프로를 결방시키는 방송사의 행태를 꼬집었다.

지난 3월 26일 천안함 침몰 사고가 발생하고 46명의 실종자가 발생하자 지상파 방송사에서는 특보 체제를 갖추는 동시에 재빠르게 예능 프로 결방을 선언했다. KBS와 SBS는 보도자료를 통해 "국가적 참사에 대해 국민 정서와 사회 분위기를 감안해 가요와 코미디 프로그램을 배제한다"며 예능 프로 결방을 알렸고, MBC 역시 이에 동참했다.

사고가 일어난 다음날인 3월 27일부터 방송사들은 일부 예능 프로를 방송하지 않았고, 29일에 들어서서는 대부분의 예능을 결방했다. 예능 프로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특선영화가 방송됐다. 결국 시청자들은 MBC <세바퀴> <무한도전>, KBS <개그콘서트> <해피선데이>, SBS <웃찾사> <일요일이 좋다> 등과 같은 각 방송사를 대표하는 예능 프로를 일주일 이상 볼 수 없었다.

방송사들의 오락가락 예능 편성, 어지럽다

수십여 국군 장병들이 바다 속에서 실종돼 생사를 알지 못하는 국가적 참사가 발생했고, 국민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그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앞서 김C가 지적했듯, 방송사들이 가요 및 코미디 프로그램 결방을 명확한 기준도 없이 자신들이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결정 내린다는 데 있다.

▲ 음악프로그램은 안 되고, 스포츠는 된다? ⓒ KBS


지난 3일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하 <스타킹>)은 오후 6시 30분, 제시간에 방송됐다. 동시간대에 방송되는 MBC <무한도전>과 KBS <천하무적 야구단>이 결방한 가운데 홀로 전파를 탄 <스타킹>은 '나 홀로 예능 편성'에 힘입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실로 오랜만에 동시간대 1위 자리에 올랐다.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하 <일밤>) 역시 4일 '단비' 코너를 스페셜 방송으로 꾸며 정상 방송했다. '우리 아버지'와 '뜨거운 형제들' 같은 웃음에 치중한 코너는 배제하는 대신 공익성이 강한 '단비' 코너만을 특집으로 꾸며 방송한 것. 이날 방송된 <일밤> 역시 동시간대 방송되던 KBS <해피선데이>와 SBS <일요일이 좋다>가 결방한 덕분에 평소의 2배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1위에 올랐다.

오락가락 기준을 알 수 없는 편성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지난 4일 SBS는 대표적인 예능 프로인 <일요일이 좋다>를 결방시켰다. '패밀리가 떴다2'와 '골드미스가 간다'로 대변되는 인기 예능 프로 <일요일이 좋다>를 결방하고 특선영화로 대체한 SBS는 그러나, 이날 오전 또 다른 예능 프로인 <퀴즈! 육감대결>은 그대로 정상 방영했다.

퀴즈 프로그램이긴 하나 <퀴즈! 육감대결>은 MC부터 게스트까지 출연진 모두가 연예인으로 구성된 일종의 예능 프로다. 방송 내용 역시 퀴즈를 푸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출연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 토크와 폭로, 충격고백 따위가 줄을 잇는다. 이날 방송에는 신지, 김종민, 유세윤, 정경미, 이수근, 김재경, 강은비 등이 출연해 저마다의 걸출한 입담을 과시하며 재치를 뽐냈다.

마찬가지로 연예인 출연진들이 퀴즈를 풀어나가는 형식의 예능 프로인 MBC <세바퀴>나 KBS <스타골든벨>은 결방을 선택했다. 같은 형식의 예능 프로라도 어떤 방송사에서는 방영되고 어떤 방송사에서는 결방된다. '웃고 떠든다'는 보편적인 예능의 기준에서 보면 차이를 찾아볼 수 없는데, 방영과 결방을 결정하는 기준은 불분명하다.

가요프로는 안 되고, 스포츠 중계는 된다... 왜?

대체 편성의 기준 또한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다. MBC는 매주 토요일 저녁 방송되는 <세바퀴>를 영화 <7급 공무원>으로, SBS는 일요일 저녁 방영되는 <일요일이 좋다>를 영화 <내 눈에 콩깍지>로 대체 편성했다. 그런데 이 두 영화의 장르는 공교롭게도 모두 로맨틱 코미디. 국민 정서와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 예능 프로를 결방하고 대체한 편성이 코미디 영화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음악 프로는 안 되고 스포츠 중계는 되는 이 아리송한 기준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지난 2일 방송 됐어야 하는 KBS <뮤직뱅크>와 MBC <쇼! 음악중심>(3일), 그리고 SBS <인기가요>(4일)와 같은 방송 3사의 대표적인 가요 프로는 모두 결방됐다. 이로 인해 데뷔와 컴백을 앞둔 적잖은 가수들이 피해를 봤지만 그것은 그럴 수 있다 치자. 문제는 가요 프로는 안 되는데 스포츠 중계는 된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 <세바퀴> 결방을 결정한 MBC가 선택한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인 <7급공무원>이었다. ⓒ (주)하리마오 픽쳐스


KBS는 지난 4일 2TV에서 2010 프로야구 <SK : 두산> 전을, 1TV에서 09-10 프로농구 <울산모비스 : 전주KCC, 챔피언 결정전 3차전>을 중계 방송했다. 웃고 떠드는 성격이 아니긴 하나 스포츠 중계 역시 엄숙함과 숙연함을 이유로 줄줄이 예능 결방을 결정한 방송사에서 내보낼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가수들의 노래에 팬이 열광하고 선수들의 플레이에 관객이 환호하는 행위의 본질은 다르지 않을 테니.

방송사들은 국민 정서와 사회 분위기를 말하지만 사실 그들에게 그런 것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제는 사회 분위기를 말하며 예능 프로를 결방했다가, 오늘은 시청자의 방송 선택권을 말하며 예능 프로를 원래대로 방영한다. 내일은 또 어떻게 말이 달라질지 모른다. 슬픔을 함께 나누자는 취지에서 예능 프로를 결방하면서 대체 편성으로는 코미디 영화와 스포츠 중계를 내세운다.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예능 프로 결방의 기한을 언제까지로 하느냐 하는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할 점이다. 사고 직후 3월 27일부터 4월 4일까지 아흐레 동안 예능 결방에 나섰던 방송사들은 지난 5일부터 일제히 예능 정상화에 나섰고, 이날 저녁 MBC <놀러와>, KBS <미녀들의 수다>가 정상 방영됐다. 복수의 방송사 관계자들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번 주부터 대부분의 예능 프로가 정상화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실종자의 가족들과 수색 작업 가운데 순직한 군인의 유족들이 비통에 잠겨 있는 이즈음, 죽어도 예능 프로를 봐야겠다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예능 프로가 결방할 수도 있다. 문제는 예능 결방에 대처하는 방송사의 태도다. 그들의 결정에서 진심으로 국민 정서와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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