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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유어야, 너희들 뭐하니?

봄을 준비하는 헤이리

등록|2010.04.09 11:02 수정|2010.04.09 11:02
4월 초순 아침, 서재의 롤스크린을 올리자 정원에 하얀 서리가 덮고 있습니다. 수조에 살얼음도 보입니다. 아기 손처럼 여린 쑥이 여든의 할머니처럼 흰머리로 변해있습니다. 주황 빛 몸을 가진 자동차의 지붕도 흰빛입니다.

▲ 정원 수반의 살얼음 ⓒ 이안수


▲ 흰 서리를 이고 있는 어린 쑥 ⓒ 이안수


이미 한 뼘의 키를 키운 정원의 산마늘은 칼날 같은 서리에 허리를 꺾고 말았습니다. 끓는 물에 데쳐놓은 듯한 산마늘 잎을 만져보았습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사각사각' 하는 소리를 냈습니다. 세포가 완전히 얼어서 회생이 가능할까 염려되었습니다.

▲ 된서리로 허리를 꺾은 산마늘 ⓒ 이안수


지금쯤은 화사한 봄기운에 나른해야 할 때가 아닌가? 외투를 장에 넣기를 망설이게 하는 올 봄은 어떤 조화(造化)인지. 하지만 절기에 맞춘 준비를 게을리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헤이리 주민들은 마을청소로 지난 겨울을 털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주민들은 마대자루를 메고 헤이리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주웠습니다.

지난 겨울 바람에 날리다 구석진 곳에 걸린 비닐뿐만 아니라 빈 도시락봉지와 음료수봉지처럼 사람들이 기회를 엿보아 일부러 내던진 게 분명한 것들도 많았습니다. 스스로의 양심에 반하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아침 한 시간의 작업으로 15자루의 버려진 양심을 주웠습니다. 헤이리는 자신이 배출한 쓰레기는 당연히 자신이 되가져가야 하는 규범과 방문객들의 성숙된 시민의식에 대한 믿음으로 마을에 쓰레기통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 겨울을 털어내는 헤이리의 마을청소 ⓒ 이안수


물 표면의 온도 변화를 안 잉어 유어(幼魚)들이 수면가까이에서 봄기운을 즐기고 있습니다. 물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를 쫓기도 하고 바람에 날아든 마른 풀잎에 입맞춰보기도 합니다. 지난 가을보다 씨알이 굵어진 녀석들이 그룹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집단 유아발레처럼 안차진 모습입니다.

▲ 갈대늪에서 노니는 잉어유어 ⓒ 이안수


여전히 청년 같은 할아버지 천호균 선생이 산책을 나왔습니다. 천 선생은 이즘 농사꾼이 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똥, 오줌'을 모아 거름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줌을 삭히는 법은 익혔고 이제 똥을 삭히는 법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소변과 인분은 바로 퇴비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숙성이 되어야 땅을 걸게 하는 기름진 퇴비가 될 수 있습니다. 일정기간 효모의 힘을 빌려야하는 것이지요.

천 선생께서는 작년에 수십 년간 열정을 바쳤던 '쌈지'라는 회사의 경영권을 이양하고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 일에 부부가 함께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취학을 앞둔 손녀를 둔 할아버지로서 나이에 참 어울리는 삶이다 싶습니다.

노년까지 경영권을 고수하고자하는 욕심을 흔히 봅니다. 때로는 물러앉았다가 여론을 보아가며 다시 복귀하기도 합니다. 끝없는 욕심과 나만이 최고라는 아집 그리고 주변의 과잉충성이 빚어낸 합작일 것입니다. 세상에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는 자리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 또한 후임의 교육에 게을렀던 전임자의 책임입니다.

앨리스가 느티나무아래에서 자전거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탐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의 모습은 마치 창공을 비행하는 새인양 자유롭습니다.

▲ 노래부르며 자전거 타는 앨리스 ⓒ 이안수


나무를 심는 모습도 봄의 모습입니다. 최근 헤이리는 느티나무나 산벚나무 혹은 이팝나무같은 고목이 될 수 있는 나무를 심는 일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100년 혹은 200년 뒤에 이 늙은 나무들이 빚어낼 풍취와 울창한 공원으로서의 헤이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렙니다.

▲ 산벚나무 심는 참나무골 ⓒ 이안수


한낮이 되자 조직이 얼어서 죽어버리면 어쩔까 염려되었던 산마늘이 다시 생기를 찾았습니다. 필시 봄날의 된서리에 질겁했을 산마늘이지만 봄서리쯤은 너끈히 이기는 힘이 있나봅니다.

▲ 한낮에 다시 기운을 회복한 산마늘 ⓒ 이안수


이게 겨우 나무껍질 속에서 기척을 하고 있는 벌레를 찾는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가 소란스럽습니다.

▲ 정원의 버드나무 껍질사이의 벌레를 찾는 딱따구리 ⓒ 이안수


건축답사를 나온 학생들은 모티프원의 애완견 해모를 쓰다듬느라 걸음이 느리고, 교회에서 나들이 나오신 어르신들은 길가의 쑥을 캐느라 발걸음을 옮길 수 없습니다. 갓 꽃망울 터드린 노란 산수유 너머에서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한 부부도 필시 봄나물 탓일 것입니다.

▲ 봄기운을 따라 헤이리로 나들이 나온 학생들과 어르신 ⓒ 이안수


갈대늪의 해거름은 북쪽으로 이주하는 것을 잊은 흰뺨검둥오리들의 차지입니다. 겨울을 이곳에서 난 동료들의 북쪽을 향한 V자 편대 비행 행렬은 이미 지난달에 끝이 났습니다. 짝과의 사랑 탓에 계절을 잊은 모양입니다. 여름을 고빗사위로 맞을 일이 걱정이긴 하지만 텃새들과 어울려 헤이리에서 여름을 날 작정인 것 같습니다.

▲ 갈대늪에서의 사랑때문에 유조留鳥가 된 후조候鳥 ⓒ 이안수


제가 봄을 찾으러 나간 사이 누군가가 두고가신 고깃국 냄비에서도 아지랑이처럼 봄이 피어오릅니다. 그 향기는 봄기운만큼이나 짙은 이웃의 정입니다.

▲ 필시 청향재 사모님이 두고가셨을 고깃국 ⓒ 이안수


저녁참에 청향재의 송교수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몇몇 이웃이 모였습니다. 이 즉흥적인 회합은 마당안숲의 손영원 사모님이 쑥전을 만들어 오신 원인이었습니다. 노르스름하고 쫄깃한 쑥전을 한 입 베어 물자 입안에 봄향기가 가득해졌습니다. 민들레도 몇 잎 넣었다, 했습니다.

▲ 손영원선생님이 산기슭 여린쑥을 뜯어 만든 쑥전. 이 쑥전을 빌미로 이웃들이 모였습니다. ⓒ 이안수


이렇듯 찬서리가 서슴는 때에도 봄은 이웃들과 나누는 번철위의 쑥전처럼 노릇노릇 익어가고 있습니다. 봄이 오는 것은 무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맺은 연인의 언약보다도 더욱 자명한 기약입니다. 점점더 꽃망울을 넓혀가는 산수유를 보아도 틀림없습니다.

▲ 헤이리 제3교에 이름을 새긴 자물쇠를 잠그고 이 연인은 분명코 개울에 열쇠를 던져버렸을 것입니다. 가운데의 하트무늬가 증명하는 이 사랑의 맹약이 영원히 풀리지않토록 기원하면서...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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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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